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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The Same Moon 08화

【나를 살린 멜번】

by 글로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만큼은 게으름을 부릴 수 없다. 그것이 마치 나를 지탱하는 삶의 근원인것처럼 찾고 또 찾는다. 인천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다음에는 어느 나라를 가볼까?’ 생각한다.


항공권과 숙박을 먼저 해결하고 그 다음은 계획이 없다. 어차피 로컬들이 사는 동네나 공원들을 주로 걷기 때문이다.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하고 가끔은 학교도 보러 간다. 초등학교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노는 모습을 보면 왠지 그 나라의 속살을 모두 본 듯 속이 후련하다. 여기의 어린 새싹들은 이런 말을 쓰며 이렇게 노는구나! 그 천진함이야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만 우리네 운동장과 그 나라의 것을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다.

새로움을 찾는다는 것이 신기루처럼 매직한 걸 원한다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그들의 일상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 똑같은 인간이지만 태어난 땅에 따라, 사회 내에서 약속한 것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 어떻게 우리는 마치 쌍둥이처럼 인간이라는 종으로 태어나 이렇게나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신체조건과 구조가 똑같은데 다양하고 다른 모습으로 사는 것이 오묘하다.


하루에 2만보 가까이 걷다 보니 이제는 여행을 가면 오히려 잠을 더 잘 잔다. 침대를 싫어해 집에서는 요를 깔고 생활한다. 그런데 잦아진 여행에 침대가 익숙해서인지 이번 멜번여행에서는 매일 숙면을 취했다. 예전에는 못 자고 화장실도 못 가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몸도 여행에 적응을 했는지 모든 것이 편안하다. 평소에도 걷기야 하지만 멜번에서의 걷기가 특별한 것은 풍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네모난 건물이 아니라 비정형의 식물들을 보고 있자니 눈이 즐겁다. 마트에 진열된 물품들도 하나하나 다 구경거리다. 로컬들의 일반주택들은 최고의 구경거리다. 남의 집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집의 형태는 걸으며 얼마든지 감상할 수 있다.


한국의 기나긴 겨울 동안 마른 나뭇가지만 봐서 마음까지 앙상했는데 이곳에 오니 모든 것이 푸르고 왕성하다. 내 기운도 솟아나는 듯하다. 지루하고 나약한 기분이 일시에 날아가고 삶에 대한 의지가 전에 없이 강해지는 걸 느낀다. 때맞춰 재미있는 한국드라마까지 우리의 하루를 마무리하도록 도와준다. ‘폭삭 속았수다’를 매일 한 편씩 보았다. 작은 핸드폰 화면으로 보아도 어찌나 재미있는지 딸은 눈가가 빨개지도록 울었다.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이곳이 제주도인지 멜번인지 햇갈릴 정도다. 크기만 다르지 섬은 섬이군!


딸은 평소에 수영을 하지 않는데 ‘하얏트 센트릭 멜번’에 수영장이 있는 걸 알고는 가자고 했다. 가끔 자유 수영을 가는 나는 마다하지 않았다. 안에 들어가니 사람도 2명밖에 없고 길이도 상당했다. 물속에 들어가자마자 놀란 건 바다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물이 짜다는 거였다. 물 교체를 한지 오래된 느낌이 들어 기분이 상쾌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딸의 고집으로 2시간 가까이 물놀이와 수영을 병행하며 시간을 보내다 나왔다. 어렸을 때 함께 수영한 걸 제외하면 이렇게 딸과 함께 수영장에서 놀아본 것이 얼마만인가?

수영장에는 우리 뒤로 가족 단위의 사람들, 커플들, 아빠와 아들이 들어와 각자의 방식으로 물속에서 놀았다. 왜 들어왔는지 모르게 몸만 담그는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전세 낸 듯 작은 공, 큰 공을 던져대며 노는 사람들도 있었다.


딸이 예약한 ‘와이너리 투어’를 갔다. 4군데를 방문하고 초코렛 공장도 다녀오는 코스다. 아침 10시에 만나 시티에 다시 오니 6시가 되었다. 딸이나 나나 술을 전혀 못한다. 그나마 딸은 조금 마실 수 있지만 나는 논알콜 외에는 마실 수 없었다. 꼭 와인 때문에 간 것은 아니고 풍경을 보러 간 것이다. 서너가지의 와인을 시음할 수 있는 곳들이었다. 한군데서는 점심식사를 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와이너리를 보며 야외에서 먹는 식사는 행복 그 자체였다.

멋진 와인잔을 들고 야외로 나가 홀짝거리는 시늉을 하며 사진도 찍었다. 어느 나라 왕비가 부럽지 않았다. 온통 초록인 풍경 안에 와인과 비슷한 버건디색 가디건을 입은 엄마가 와이너리와 썩 잘 어울린다고 딸이 말해주었다. 예전에 와이너리 투어를 갔을 때는 한곳에서 10가지의 와인을 시음하고 스낵을 곁들였는데 이번에는 다른 4군데를 둘러볼 수 있어 더 풍성했다.

낯선 환경에 오면 새로운 행동, 생각, 대응을 하게 되어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알게 되고 대처 능력도 키우게 된다. ‘나는 새로운 곳에 잘 적응하는 사람인가? 앞으로도 여행을 감행할 만큼 건강한가?’ 체력테스트도 해 볼 수 있다. 10시간이 훌쩍 넘는 비행시간을 견디는 것은 쉽지 않다. 여행의 설렘보다는 비행에 대한 두려움으로 전날 밤을 새우기도 하는데 아직은 여행을 다녀도 될 것 같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뻤다. 먼 거리로 여행가는 것을 꺼렸는데 말이다.

여행을 다녀오며 느낀 것은 세상은 다채롭다는 것이다. 우울할 틈이 없다. 조금만 용기를 내서 자신을 새로운 곳으로 던져보면 나도 모르는 새로운 모습이 불쑥 튀어나온다. 내가 모르던 모습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내가 기특하기도 하다. 결심도 하게 된다.


첫 번째는 운동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것이다. 달리기와 수영을 자주 해서 기초체력과 근육을 키워나가야겠다.

둘째는 평소에 쓸데없는 곳에 소비하는 것을 줄이고 여행에 투자를 하자는 것이다. 새로운 곳으로의 여행은 지루한 삶을 살만한 것으로 탈바꿈시켜준다. 누구도 줄 수 없는 기쁨을 여행지에서 자주 느낀다. 가야만 알 수 있고,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다녀와서도 오래 기억에 남아 언제든 꺼내 볼 수 있다. 주머니에 돈이 두둑하대도 이런 기분은 못 느낄 거다.


새로움으로 무장한 나를 데리고 더 건강하고 활기차게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자꾸만 샘솟는다. 다음, 그리고 다음 여행지는 어디가 될까? 세상은 넓고 갈 곳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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