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The Same Moon 10화

【딸아, 고맙다】

by 글로

이래서 가족, 가족 하나보다. 가족이 때로 힘들게도 하지만 위기 상황에서 가족만큼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존재도 없다. 나 다음으로 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해결해주려고 하니 말이다. 아니 어떨 때는 더 갈급하게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이번 휴대폰 분실 사건 때 그랬다. 오히려 나보다도 딸이 휴대폰을 엄마에게 꼭 찾아주겠다는 강한 의지로 열심히 노력했다. 그 모습을 보고 적잖이 감동을 받았다. 귀찮고 싫은 내색 한번 없이 열심히 뛰어주었다.

만약 딸이 분실했다면 나는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 분명히 잔소리를 심하게 했을 것이다. 그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느냐? 너 때문에 여행 초반부터 진을 다 뺐다는 둥 평소의 생활태도를 들먹이며 꽤나 싫은 소리를 퍼부었을 것이 뻔하다. 나의 태도와 다른 딸의 성숙한 모습에 내 자신이 반성 될 정도였다. 여자끼리 더군다나 딸과 가니 편한 것이 좋았다.



호텔방을 함께 사용하는 데도 전혀 불편함이 없고 왠만한 건 나에게 양보해주니 고마웠다. 나는 예민하고 까다로워 좋은 것 보다는 불만을 가질만한 것을 발견하는 스타일인데 반해 딸은 왠만한 건 넘어가자는 주의다. 그러다 보니 내가 ‘이런 것은 불편하다. 별로다. 어떻게 참지?’ 라고 얘기하면 딸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도록 프레임을 바꿔놓는다. 딸의 말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조그만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던 나는 모든 것이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되었다. 딸의 그런 태도와 담대함이 부러웠다. 나는 어딜 가나 불만 거리를 찾아 불평하는데 딸은 쿨하게 잘도 넘어간다.

20년만에 와서 본 멜번은 그대로인 것도 많이 있지만 변한 것도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상한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이상하다는 말이 애매하지만 정상이 아닌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어딜가나 그렇겠지만 유독 눈에 많이 띄었다. 역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해변가나 주택가 거리에서도 어김없이 발견되었다. 예전에 1년 반을 거주 했을 때와 비교해서 수가 몇 배로 늘어난 느낌이다.


일반 시민들이 사는 주택가에서도 중얼거리며 지나가는 사람, 상업지구에서 혼자 앉아 상대방 없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사람, 공중전화 부스가 떠나가라 욕을 하며 떠드는 사람, 계속 똑같은 행동을 하며 역 안을 돌아다니는 사람 등등, 정서적으로 위협을 가하는 사람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젊은 시절 혼자 멜번에 거주하며 스스럼 없이 트램을 타고 트레인을 타고 교외로 나가곤 했었다. 그때는 큰 두려움 없이 잘 다녔는데 이제는 혼자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나중에 딸에게 그런 것에 대해 물어보니 신경쓰지 말라고 별로 겁이 안 난다고 얘기했다. 젊어서 그런 건지, 성격이 그런 건지 같은 현상을 보고도 반응이 다른 것이 놀라웠다.




잘 때도 이명 때문에 핸드폰을 사용했다. 유트브에서 명상음악을 틀어놓고 조용히 들으며 자야 한다. 조용해야만 잘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또한 거슬리는 소리일 수 있다. 그러나 딸은 자신의 휴대폰을 빌려주고 소리도 괜찮다며 나를 위로했다. 불편했을텐데 내색 안 하고 도와준 딸에게 많이 고마웠다.

나와 딸은 재즈를 사랑한다. 집에서도 늘 재즈를 배경음악으로 틀어놓는다. 한 때는 재즈를 들으러 미국의 뉴올리언즈를 가겠다며 꿈을 꾸었다. 딸이 재즈바를 한국에서 예약했다. 시티에 있는 곳이고 지하1층이었다. 어둡고 아늑하고 재지한 느낌이 흐르는 곳. 내가 꿈에 그리던, 맛보고 싶었던 분위기가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테이블 번호를 부여받고 찾아갔다. 이곳은 모두 합석이다. 모르는 사람과 테이블을 나눠써야 하는 것이다. 흔치 않은 경험에 당황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모두 음악을 듣느라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KakaoTalk_20250409_004816174.jpg

딸은 칵테일을 시키고 나는 술을 못하니 간단한 스낵 안주만 시켰다. 조금 있다보니 목을 축이고 싶어 바텐더에게 논알콜로 무엇이든 좋으니 음료를 만들어달라고 했다. 너무 좋아하며 뚝딱 이것 저것을 넘치게 섞어 만들어주었다. 맛은 애매했지만 상황이 재미있었다. 가격도 술이 들어가지 않아 그런지 5,000원으로 저렴했다.

악기만 연주하는 공연인지, 보컬이 있는 재즈인지 아무것도 모르고 갔다. 여자 보컬이 있었다. 가창력이 좋고 성량이 풍부했다. 기량이 뛰어난 보컬리스트다. 소화해내는 음역대도 넓고 부드럽게도 강하게도 표현할 줄 알았다. 작은 공간이 무색하도록 재즈 보컬리스트는 최선을 다해주었다. 20분 브레이크타임 후 그녀의 노래는 끝을 모르도록 계속되었고 마지막 곡까지 마치 처음곡마냥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끝나고 딸과 함께 우리는 한국에서 왔고 당신이 우리의 밤을 멋지게 만들어주었다고 말했다. 가수는 행복해하며 우리와 사진을 찍었다. 연주도 훌륭했지만 단연 무대는 보컬리스트의 것이었다. 더 큰 무대에서 노래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노래를 잘했다. 재즈의 맛을 제대로 살려주었다.




여행중에 생일이 끼어있었다. 딸은 무엇이라도 사 주고 싶어했다. 반지를 사 주고 싶어했는데 내가 잘 잃어버리는 것을 알고 차라리 옷을 사주겠다고 했다. ‘옷은 설마 잃어버리지 않겠지?’ 하며. 대형브랜드매장에 들어가 10벌 정도의 옷을 골라주었다. 그 중 2개를 사 주겠다는 것이다. 옷을 많이 가져오지 않아 똑같은 옷만 입고 있는 엄마가 안쓰러워 보였나보다. 배경이 워낙 멋있으니 옷도 조금 신경 써서 입으면 우리의 추억이 더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생각도 했을 것같다.

아주 마음에 드는 것들로 골라왔는데 나의 신체조건이 받쳐주질 않아 포기하고 2개를 골랐다. 딸이 호주에서 생일선물로 사 준 옷을 입고 사진을 찍으며 행복했다.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 밤 10시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떴네!’ 며칠 전에는 한국에서 달을 바라보았는데 이렇게 다른 땅에서 하늘을 바라본다. 똑같은 달을 바라보는 우리. 지구에서 함께 살고 있다. 밤 공기마저 신선하고 신비로웠다. 멜번의 밤은 재즈처럼 흘러간다.

keyword
이전 09화【다시 없을 에피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