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에 이런 곳이!
20대에 속초여중에서 4년을 근무했다. 50대가 되어도 속초가 제일인 줄 알고 바다가 보고 싶으면 거기로 달려갔다. 그런데 왠일인지 이번에는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다. 강릉. 딸이 드라이브를 하고 싶다고 했다. 부쩍 운전에 관심이 생겨하는 걸 보니 연습 겸 한번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3시간만에 도착.
'세인트존스 호텔'에 묵었다. 가성비 좋은 깨끗하고 넓은 호텔. 그리고 강문해변을 품은 호텔이다. 속초에서 바다를 지겹도록 보았건만 오랜만에 본 바다는 처음 본 듯 신선하고 새로웠다. 6월 초라 그런지 사람도 별로 없고 백사장이 깨끗했다. 바다를 보자마자 어린아이처럼 신발을 벗고 물에 발을 담그는 딸. 요즘 직장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로 힘들어하던 차에 생각지도 않던 멋진 바다를 만나니 많이 좋은가보다. 오랜만에 보는 환한 미소다. 좋으면 좋은 걸 온 몸으로 표현하는 딸의 밝은 표정과 몸짓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죽는 것도 아닌데 바닷물에 발 못 담글 것도 없지 하던 우리는 무릎까지 바지를 걷어올리고 하염없이 해안선을 따라 걸었다. 양 옆으로 끝이 어딘지 보이지도 않게 강문해변은 넓디 넓었다. 바닷물이 찰랑찰랑. 아직은 차가웠다. 발에 닿는 촉감이 어찌나 생생하고 간지러운지 온 몸에 세포가 살아나는 듯 했다. 이런 기분을 느껴본 것이 언제인가? 역시 자연과의 만남이 최고다. 그 어떤 것도 줄 수 없는 살아있는 이 원초적인 즐거움.
저녁에 식당을 알아보니 거의 문을 닫아 호텔 1층에 있는 주막집을 찾았다. 간이 세고 강한 두부김치와 바싹 새우전을 술 없이 저녁으로 먹었다. 뭘 해도 즐거웠다. 푹 자고 다음날 일어나니 바다는 더 파랗고 예뻐졌다. 하늘, 바다 온통 푸르르고 맑았다. 그 사이에 불순물은 들어갈 수 없는 듯 나도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어졌다. 갑자기 강릉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갑자기 강릉 러버가 되었다. 딸은 나보다 증상이 더 심했다. 우리가 이렇게 좋은 곳을 왜 모르고 살았냐며 즐거워했다.
점심으로는 유명한 초당순두부를 먹었다. 여러 식당 중 고민하다 선택한 집은 대성공이다. 이름이 좀 특이해서 들어간 농촌순두부. 15,000원 한상이 어찌나 푸짐하고 맛있는지. 다시 오고싶다. 커피는 까다롭게 마시는 편이라 여기서도 아무 곳이나 들어갈 수 없어 고심했다. 카페가 너무 많으니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그중 고르고 골라 ‘갤러리밥스’로 찾아갔다. ‘초당옥수수커피’. 흔한 커피가 아니니 조금은 기대를 했지만 이럴 줄이야. 춘천에서도 마셔본 메뉴인데 이곳이 두 배 정도 더 맛있는 듯 하다. 생각지도 못한 환상적인 맛에 딸과 나는 극강의 행복을 맛봤다. 날도 더워지고 해서 ‘초옥이커피아이스크림’도 맛보았다. 이것 역시 아무나 낼 수 있는 맛은 아닌 듯하다.
바로 앞에 ‘테라로사 경포호수점’이 있다. 테라로사 커피점을 좋아해 많이 가보았는데 이곳은 카페가 아니라 건축물인듯하다. 담쟁이부터 조경식물 가꿔놓은 것이 예사롭지 않다. 건물 사이 서로 드리우는 그림자가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매우 바빴을 것 같다. 2층까지 둘러보는데 계속 감탄사를 내뱉게 된다. 강릉에 가면 이곳은 꼭 들렀으면 좋겠다. 여느 테라로사 점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주변 배경이 좋아서 그런 것도 있을 것이다.
강문해변에는 먹을 것이 천지다. 오히려 횟집은 드문 드문 찾기 힘들다. 바다를 만끽할 수 있는 2층 카페가 줄지어 있다.
밤에 바닷바람이 불어 약간은 추웠다. 딸이 걸치고 온 얇은 셔츠를 모래사장에 깔고 누웠다. 날이 흐려 별은 보이지 않았지만 바다를 앞에 두고 하늘을 위로 하고 딸과 누우니 좋았다. ‘폭삭 속았수다’의 애순이 버전으로 너무 좋았다. 아, 이런 시간이 내게 주어지다니. 남들은 흔하다 말하겠지만 나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라 좋은 의미에서 어리둥절했다. 가능하다면 잠이라도 잘 수 있을 듯 마음이 말랑말랑하고 평화로웠다.
강문해변가 뒤로는 해송이 있어 그늘이 되어준다. 해변가를 따라 길게 늘어서 있다. 작품도 몇 점 있고 사진찍을 수 있는 장치들도 되어있어 재미를 더해준다. 그래도 바다만한 게 있으랴? 바다 보고 하늘 보고 출발하는 배도 쳐다보니 시간이 훌쩍 훌쩍 지나간다. 돌아가야 하는데 집으로 가기 싫어진다. 세인트 존스에서 조금 걸어가니 ‘씨마크’호텔이 보인다. 현대에서 운영하는 5성급 호텔이다. 이곳 로비는 긴 테이블과 의자를 두어 앉아서 바다를 감상할 수 있게 해놓았다. 첫째 날 저녁 늦은 밤인데도 그곳까지 걸어가 로비를 구경했다.
바가 운영되고 있어 딸과 함께 칵테일을 즐겼다. ‘트로피컬’과 ‘민트마티니’를 마셨다. 늦은 밤 딸과 칵테일을 한잔 놓고 바에 앉아 있으니 천국이 따로 없다. 어리고 어린 딸이 커서 엄마와 술 한잔을 즐기고 있으니 여러 가지 감정이 들었다. 딸은 좋은 친구다. 편하고 의지가 되고 말벗이 되어준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찾아주고 불편한 것이 있으면 최대한 해결해주려 노력한다. 서로 조금만 양보하고 타협하면 환상적인 여행이 완성된다.
호텔이 바다뷰라 테라스에서도 원 없이 바다와 백사장을 감상할 수 있었다. 1박 2일 아주 짧은 여행이지만 의미있고 충분히 즐거웠다. 딸과 함께 올 수 있는 날이 이렇게 나에게 선물처럼 주어지다니 역시 인생은 쉽게 판단할 것은 못 되나보다. 내일 일을 모르고 한치 앞도 모른다는 말은 명언이다.
나도 예전에 딸과 둘이 강릉에 와서 이렇게나 행복하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게 될 줄 미처 몰랐다.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선물 같은 시간이 다시 주어질지 기대된다. 다음에는 '고성'에 가보기로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