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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 박용운 Feb 22. 2022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2)

군함 마리(軍艦茉莉)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는 해방과 더불어 성년을 맞은 뒤 곧바로 참혹한 전쟁을 겪은 한 조선 청년의 내면을 보여준다. 이 시집을 뒤덮고 있는 죽음의 이미지는 시인이 살아낸 연대가 죽음의 연대였음을 증언한다." 

  망우산 사색의 공원을 산책로 오른쪽을 따라 2, 3분만 걸어가면 박인환 시비가 보인다. 시비의 아래쪽 가파른 언덕 아래 명동백작, 댄디보이로 통하는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의 묘가 있다. 한국의 모더니즘 문학을 열고, 당대의 라이벌 김수영과 격론을 벌였던 입담의 박인환은 자신이 노래했던 '그리움'을 남긴 채 후배 문학인들을 맞이한다. 묘비번호 102308 그것이 망우산에 있는 그의 주민등록번호다. 이곳에서 첫 사자후를 한다.

  여기서 '사자후(死子逅)'란 '죽은 이와 우연히 만나다 또는 죽은 이와 만나 허물없이 지내다'라는 의미이다.

 

  "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의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 전문) 


  나는 이 시 역시 노래로 먼저 만났다. 포크송이 유행하던 시절, 카세트테이프 꽂이에 하나씩 꽂혀있었던 박인희라는 목소리로 말이다. 테이프 A면 첫 곡에 '목마와 숙녀'가 낭송되고, 두 번째 곡으로 들을 수 있었던 노래가 바로 '세월이 가면'이었던 것 같다. 가수 박인희는 70년대 박인환이라는 시인을 전파하는 메신저였나보다. 이 테이프로 인해 학생들이나 청년들의 행사는 물론 크고 작은 무대에서는 음악과 시와 만남이 이루어지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이 시가 노래로 만들어진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56년 3월 중순. 명동의 선술집에는 문인과 음악인 몇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잔이 몇 순배 돌자 갑자기 박인환은 휴지 위에 한 편의 시를 쓰고는 작곡가 이진섭에게 바로 건넸고, 이진섭은 단숨에 악보를 그렸다. 그리고는 한자리에 있던 테너 가수 김만섭과 나애심이 그 곡을 젓가락 장단으로 즉석에서 불렀다는 것이다. 이후 이 노래는 ‘명동의 샹송’으로 유명해지고 훗날 박인희에 의해 대중화가 된 것이다.


  시인 박인환은 이 노래를 쓰고 부르고 일주일 뒤 31세의 일기로 영원한 그리움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1926년 8월 15일. 소양강의 원류가 되는 강원도 인제군 상동리에서 아버지 박광선(朴光善)과 어머니 함숙형(咸淑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는 면사무소 직원이었고 약간의 토지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중등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세련된 외모와 진취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버지 박광선은 면 직원을 그만두고 여러 지방과 도시를 떠돌며 산판업을 하다가 끝내 서울에 안주하였다. 

  1936년 11살의 박인환에게는 그의 생애에서 큰 전환을 맞는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고향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거처를 옮기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산판업을 시작하면서 먼저 자리 잡고 있다가 가족을 모두 서울로 이주시켰다. 이는 어린 나이에도 어머니가 사준 버스표 한 장으로 아버지의 집을 찾아갈 정도로 똑똑한 아들을 서울에서 공부시키려는 아버지의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서울시 종로구 원서동 134의 8번지가 새로운 박인환이 새로 태어난 곳이다. 


  아버지의 호방함과 잘생긴 외모 그리고 넉살은 영락없는 부전자전이라는 것이 이 부자를 아는 사람들의 증언이다. 서울로 온 박인환은 덕 수 보통학교에 시험을 통해 4학년에 편입하고 우등상을 받으며 1939년에 졸업하였다. 14세 같은 해 내로라하는 수재들이 모인 경기중학교(5년)에 입학했다. 경기 중학의 입학은 아버지는 물론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중학 시절에 박인환의 속내를 잡고 있던 예술적 기질이 발동하여 학업보다는 시, 그림, 영화에 빠져들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1941년 경기중학교를 자퇴하고, 한성학교를 거쳐, 1944년 황해도 재령의 명신 중학교를 졸업했다. 이해 평양 의학 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해방이 되자 학업을 중단했다. 

  스무 살 되던 해. 해방을 맞아 평양 의학 전문학교를 중퇴하고 서울로 돌아온 박인환은 아버지와 이모로부터 빌린 돈 5만 원으로 시인 오장환(吳章煥. 월북작가)이 종로3가 낙원동 입구에서 경영하던 스무 평 남짓한 서점을 인수하여 화가 박일영(朴一英. 초현실주의작가)의 도움으로 간판을 새로 달고 다시 문을 열었다. 이곳이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의 산실인 책방 마리서사(茉莉書肆)이다. 


  서점 이름은 일본 현대 시인 안자이 후 유에(安船衛)의 시집 "군함 마리(軍艦茉莉)"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고, 프랑스의 화가이자 시인인 마리 로랑생의 이름에서 빌렸다는 이야기도 전하나 어느 것이 정확한지 확인하지 않았다. 

  ‘세월이 가면’은 프레베르의 시에 코스마가 곡을 붙인 ‘고엽’만큼이나 시고 달곰하다. 박인환은 다른 이들처럼 고종명하지도 못했다. 재능의 모자람에다 요절까지 겹쳐 이상(李箱)이나 윤동주처럼 특별한 사회적 문학사적 위세를 누리지도 못했다. 박인환에게는 그런 요행도 없었다. 

  한국 시인으로서 박인환의 가장 큰 불행은, 그 세대 시인들에겐 흔한 일이었지만, 한국어가 서툴렀다는 점일 것이다. 그의 세대에 속하는 한국인들은 학교를 비롯한 공적 공간에서는 일본어를 사용하고 가정을 포함한 사적 공간에서는 조선어를 사용하는 비대칭적 이중언어 상태 즉 다이글로시아에서 지적 성장기를 보냈다.

  (*다이글로시아 : 한 언어 지역 안에서 동일 언어가 2가지 형태로 공존하는 현상. 예를 들어 문학어와 일반언어) 


  말하자면, 문화적 언어적 양서류가 되기를 강요받았다. 이런 생태 환경에 잘 적응한 종(種)은 물에서도 뭍에서도 편안하지만,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종은 뭍에서도 물에서도 불편하거나, 적어도 한쪽에서는 불편하다. 박인환은 이런 생태 환경에 충분히 적응한 양서류가 아니었다. 일본어에 대한 그의 감각은 확인할 길 없지만, 적어도 그의 한국어 감각은 문필가로 행세하기에 넉넉지 않았다고 한다. 


  “그(박인환)는 일본말이 무척 서툴렀고 조선말도 제대로 아는 편은 못되었다”라는 김수영의 비아냥은, 박인환의 조선말에 관한 한 중상모략“이라고도 했다. 

  시집 ‘목마와 숙녀’에 자주 나오는 외래어(나 추상적인 관념어를 포함한 이른바 ‘문명 어휘’)와 이국적 이미지들은 그의 서툰 한국어를 치장하면서 말하자면 이 박래舶來 어들은 그것들이 명사의 꼴을 취하고 있을 때도 사실은 ‘형용사’다. 그런 설익은 관념 취향이, 한편으로는, 박인환의 시가 잠깐이나마 누린 대중적 인기의 비결이기도 했을 것이다. 


  책방에서 여러 문학과 예술인과 만난 박인환은 본격적으로 시를 쓰고 시론(詩論)을 논하게 된다. 1946년 12월 그는 '거리'라는 작품으로 국제 신보에 발표하므로 시인으로 데뷔한다.  


  "거리"  


  "나의 시간에 스코올과 같은 슬픔이 있다

   붉은 지붕 밑으로 향수가 광선을 따라가고

   한없이 아름다운 계절이

   운하의 물결에 씻겨갔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지나간 날의 동화를 운율에 맞춰

   거리에 화액(花液)을 뿌리자

   따뜻한 풀잎은 젊은 너의 탄력같이

   밤을 지구 밖으로 끌고 간다

   지금 그곳에는 코코아의 시장이 있고

   과실처럼 기억만을 아는 너의 음향이 들린다

   소년(少年)들은 뒷골목을 지나 교회에 몸을 감춘다

   아세틸렌 냄새는 내가 가는 곳마다 음영같이 따른다

   거리는 매일 맥박을 닮아갔다

   베링해안 같은 나의 마을이

   떨어지는 꽃을 그리워한다

   황혼처럼 장식한 여인들은 언덕을 지나

   바다로 가는 거리를 순백한 식장으로 만든다

   전정(戰庭)의 수목 같은 나의 가슴은

   베고니아를 끼어안고 기류 속을 나온다

   망원경으로 보던 천만(千萬)의 미소를 회색 외투에 싸아

   얼은 크리스마스의 밤길로 걸어 보내자“ 

   <"국제 신보"에 발표한 박인환의 시 '거리' 전문> 


  1948년 입춘을 앞두고 박인환이 문학의 씨앗을 발아하던 마리서사를 처분하고 김경린, 양병식, 김수영, 임호권, 김병욱 등과 "신시론(新詩論)" 제1집을 발간하고 자유 신문사에 기자로 생활한다. 이때 한 살 아래의 이정숙(李丁淑)과 결혼하여, 이후 종로구 세종로 135번지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1949년 박인환은 김수영, 김경린, 임호권, 양병식 5인 합동 시집 "새로운 도시(都市)와 시민(市民)들의 합창(合唱)"이라는 동인지(앤솔로지)를 낸다. 이 시집에 '열차. 지하실' 등 5편의 시를 발표한다. 그리고 자유 신문사에서 경향신문사로 옮긴다. 그리곤 또 다른 동인지인 "후반기"를 발족한다. 


  분단과 전쟁으로 찢긴 옛 식민지 출신 청년이 이국에 대한 선망과 감상주의로 제 상처를 어루만지며 그 궁핍한 시대를 버텨내려고 했을 때, 그 안간힘이 안쓰러울망정 그것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 감상주의에 버무려진 대로 이 시집에 그리도 자주 나오는 죽음의 이미지는 이 청년 시인이 살아낸 연대가 그대로 죽음의 연대였음을 증언한다. 


  시인 박인환은 훤칠한 키에 수려한 용모의 미남이었으며, 당대 문인 중에서 최고의 멋쟁이,'댄디보이' 또는 '명동백작'이라 불렀다. 

  "여름은 통속이고 거지야. 겨울이 와야 두툼한 홈스펀 양복도 입고, 바바리도 걸치고 머플러도 날리고 모자도 쓸 게 아니냐" 이렇게 말하며, 그는 여름에도 정장을 하곤 하였다. 어느 날 그는 친구들 앞에 땅끝까지 내려오는 긴 외투를 입고 나타나, "이게 바로 '에세닌'이 입었던 외투란 말이야"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에세닌'이 31세의 나이로 자살하기 직전 입었던 외투를 본떠, 미군용 담요로 지어 만든 외투를 입었던 박인환도 '에세닌'과 같은 31세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날 줄 누가 알았을까. 


  하지만 그의 기인 적인 행동에는 문단의 선배는 물론 내로라하는 평론가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고 한다. 그를 댄디보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가 통속적인 것을 혐오하고, 원고를 쓸데는 구두점 하나에도 신경질적으로 까다롭게 굴고 싫어하는 사람과는 차도 한잔 마시지 않는 결벽증을 지녔다 한다. 

  수주 변영로 선생이 금주를 선언하자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은 선배 자격이 없다며, 앞으로는 선생 자격이 없다며 으름장을 놓는가 하면, 스카라(구 수도)극장에서 "제3의 사나이(그레이엄 그린 원작)"를 문단 선후배들끼리 모여서 관람하던 중 박인환이 갑자기 일어나 선배 평론가 백철에게 소리를 질렀다. "어이. 백철 씨 제3의 사나이를 알아야 해. 저걸를 말이야. 저것을 모르고 무슨 평론을 쓸라고 해." 느닷없는 일갈에 사방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친구들 가운데 그와 친한 문인들은 물론 주변 사람에게 자신의 나이를 4~5세 부풀린 탓이다. 그가 죽을 때까지 그의 나이를 정확히 아는 사람도 없었고, 그의 부친 또한 그가 죽을 때까지 자식이 문학을 하는지 모를 정도였다고 하니 그를 기인이라고 해야 할지 희대의 반항아라 해야 할지 그것 또한 숙제다.  


  "미스터 모의 생과 사" 


  "입술에 피를 바르고

   미스터 모는 죽는다

   어두운 표본실에서

   그의 생존시의 기억은

   미스터 모의 여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인도 없이

   유산은 더욱 없이

   미스터 모는 생과 작별하는 것이다.

   일상이 그러한 것과 같이

   주검은 친우와도 같이

   다정스러웠다.

   미스터 모의 생과 사는

   신문이나 잡지의 대상이 못된다.

   오직 유식한 의학도의

   일편의 소재로서

   해부의 대에 그 여운을 남긴다.

   무수한 촉광 아래

   상흔은 확대되고

   미스터 모는 죄가 많았다.

   그의 청순한 아내

   지금 행복은 의식의 중간을 흐르고 있다.

   결코

   평범한 그의 죽음을 비극이라 부를 수 없었다.

   산산이 찢어진 불행과

   결합된 생과 사와

   이러한 고독의 존립을 피하며

   미스터 모는

   영원히 미소하는 심상을

   손쉽게 잡을 수가 있었다."

   <박인환의 시 '미스터 모의 생과 사' 전문> 


  이시는 그가 죽기 직전 1955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마치 자신의 참회록을 쓴 것처럼. 평소 이상(李箱)을 유난히 좋아했던 그는 이상의 기일(忌日)인 3월 17일 오후부터 주변 사람들과 함께 이상을 추모하며 폭음을 했다. 하지만 이상이 실제로 죽은 것은 1937년 4월 17일이니 기억의 착오였다. 그날 박인환은 옆자리에 있던 이진섭에게 '인생은 소모품. 그러나 끝까지 정신의 섭렵을 해야지'라고 메모한 것을 주었다. 


  "누가 알아. 이걸로 절필하게 될지." 무슨 예감이라도 있었던지 박인환은 씩 웃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 밤 9시에 만취 상태로 세종로의 집에 돌아온 그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답답해! 답답해!"를 연발했다. 그러다가 자정 무렵 "생명수를 달라!"는 부르짖음을 마지막 말로 남기고 눈을 감았다. 새벽 미처 술이 깨지 않은 술친구들이 그의 시신이 있는 방에 들어섰을 때 눈을 부릅뜨고 있는 모습을 감히 바라보지 못했다. 그의 눈을 감긴 이는 송지영이다. 또 다른 친구가 그의 시신에 조니 워커를 따라주었다. 그의 나이 불과 삼십 일세였다. 그의 시신이 시인 장으로 망우리에 묻힐 때 지인들은 그가 좋아했던 조니 워커와 카멜 담배를 함께 묻었다. 그가 죽던 해에 발표한 글은 '죽은 아포롱', '옛날의 사람들에게' 등이다. 


  -박인환과 사자후를 마치며 

  박인환 시인의 면모를 여기저기 섭렵하면서 자료를 얻었다. 70년대 고등학교 재학시절 통기타를 치며 읊조리던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은 시인이 얼마나 고뇌하고 그 고뇌 속에서 명작이 나오는가를 잘 알려주는 대목이다.

  쫄 대기 시인으로 시인의 흉내를 내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그가 너무너무 사랑했던 고향 '인제'라는 시로 열변을 마친다. 


   '인제’ 


   봄이면 진달래가 피었고

   설악산 눈이 녹으면

   천렵 가던 시절도

   이젠 추억.

   아무도 모른 산간 벽촌에

   나는 자라서

   고향을 생각하며 지금 시를 쓰는

   사나이

   나의 기묘한 꿈이라 할까

   부질없고나

   그곳은

   전란으로 폐허가 된 도읍

   인간의 이름이 남지 않은 토지

   하늘에 구름도 없고

   나는 삭풍 속에서 울었다.

   어느 곳에 태어났으며

   우리 조상들에게 무슨 죄가 있던가

   눈이여

   옛날 시몽의 얼굴을 곱게 덮어준

   눈이여

   나에게도 정서와 사랑이 있었다 하더라.

   나의 가난한 고장

   인제

   봄이여

   빨리 오거라 

   <죽기 10일 전 조선일보에 발표한 박인환의 시 '인제' 전문>  


   암울한 시대의 절망과 실존적 허무를 피에로의 몸짓으로 대변한 당대의 정신적 제왕이자 모더니즘, 사실주의(리얼리즘), 실존주의의 시의 세계를 구축하며 전후 문단의 지평을 넓힌 기린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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