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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 박용운 Feb 23. 2022

“전류가 한번 흐르니
온 천지가 번쩍이도다.”


  아주 오래전 어느 날 TV를 켜고 드라마를 보다 보니 아관파천 당시의 러시아 공사관이 무대였는데 깜짝 놀랄 장면이 전개되고 있었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가 거처하는 공사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가 휘황찬란한 것이 아닌가. 아관파천이 있었다. 1896년은 아직 한국 민간에 전기가 들어와 있지 않았던 때다. 민간에 전기가 들어간 것은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900년 이후의 일이기 때문에 아마도 당시의 연출자가 러시아 공관쯤 되니 당연히 전기가 들어외 있으리라 생각하고 최고급 샹들리에를 달아 놓았던 것 같다. 


  조명 관련 역사를 찾다 보니 자연히 시대적 상황도 알게 되었다. 1898년 설립된 한성전기회사가 종로 5가에 있던 동대문 발전소에 새롭게 125Kw짜리 발전기를 증설해, 총발전력을 200Kw로 늘려 종로 사거리에 가로등 3본을 세우고 점등한 것은 1900년 4월 10일이었다. 그전까지 주로 전차 부설 개통에 주력했던 한성전기회사가 전등 사업에 주력키로 결정한 뒤 처음 실시한 사업이었다. 


  이 땅에 전기에 의한 가로등이 생긴 시초였던 것이다. ‘황성신문’ 1900년 4월 11일 자는 이때의 일을 “종로 전등” 전기회사에서 정교 鄭喬의 ‘대한 계년 사’ 광무 4년 4 월조에는 ‘10일(구력 3월 11일) 미국 전차회 사인(米國電車會士 시설 전등 어종가(始說電燈於鍾街)“라고 기술했다. 한 국에 근대화가 전등으로 시작된 것임을 시사하는 기록이다. 

  민간의 가정 등(家庭燈)은 우선 각 외국 공관에 점등되었고, 이어 진고개의 일본 상인들의 주도로 1900년 5월 하순부터 점등을 개시했다고 한다. 이렇게 최초로 켜진 전등의 수는 약 600등으로서 대부분이 10w였으며, 한 집에 두 개 이상을 설치한 집은 드물었다고 한다. 요금은 10w 기준으로 한 달에 1원 60전이었다고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기가 발명되기 이전의 밤 시간은 실로 길고도 따분한 것이었다. 한국의 경우 당시의 주된 조명기구는 호롱이었고 조명 연료는 고깃기름과 채유(菜油)였다. 예외로 쇠기름으로 만든 육 촉(肉燭) 같은 것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 외 상어 기름, 피마자기름 같은 것이 서민 대중의 조명 연료였다. 

  석유램프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은 1880년경으로 보인다. 박 영효, 김 옥균의 권유로 일본에 다녀온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이 여비 조로 가져간 순금 봉을 처분해 석유, 램프, 성냥 등을 사 가지고 와서 친지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 시초였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1884년 갑신정변 이후 한국에 들어온 일본 상인들의 무역품 중 으뜸인 것이 석유, 램프, 성냥이었다고 한다. 

  6-70년대만 해도 전기 선로가 놓이질 않은 곳이 많아 호롱불, 램프를 쓰는 집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사실 필자는 사용해 본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더러 전기가 갑자기 들어오질 않아 촛불을 켜거나 호롱불을 밝힌 적은 있다. 초등학교 재학 시절 친구들 중에 몇 명이 실제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어도 직접 체험하지 않은 이상 알 수가 없었다. 전기는 단순한 조명 수준이 아니라 도시와 농촌을 가릴 것 없이 생활양식 전반을 근본적으로 바꾼 새로운 혁명이었다.

 

  필자가 조명 사업을 하면서 가장 짜릿했던 기억들이 있다면 거제도 수암지구에 대동건설이 건축한 2000세대 아파트 단지에 조명 일체를 설치하고 처음으로 점등하던 날과 베트남 하노이에서 6성급 호텔 조명 공사와 마지막으로 중부지방 킨 토시에 LED 가로등을 설치하고 점등하던 날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 가로등이 처음 가설된 배경을 자세히 들여다 보기로 하자.

  조미수호통상조약이 맺어진 것에 대한 답례 겸 통상 사절단으로 1883년 6월 전권대사 민영익과 부사 홍영식이 미국으로 떠나 1884년에 귀국했다. 그들이 그 이전 미국에 갔을 때 1879년 에디슨(Thomas Edison)이 발명해 미국 전역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던 백열등의 신기함에 놀라 직접 에디슨 회사를 찾아가 주문 상담을 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경복궁에 전기설비가 도입된 계기였다고 한다. 


  왕실에 전기 설비가 최초롤 도입된 날자가 정확하게 기록된 자료는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아마 1885년 말경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그리고 이때 설치된 전기설비는 증기기관에 의한 발전기 두 대였으며 이를 경복궁 안 향원정 부근에 설치하고 100w의 서치라이트 두 본을 건청궁과 그 앞뜰에 설치했다고 한다. 

  1887년 정월 18일 외무대신 김윤식은 주뉴욕 한국 명예영사 프레이지(E, Frazar)에게 ’ 지금 전등 공사를 담당할 공사 인부가 도착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으니 앞으로 2달 내에는 준공될 것.‘이라는 내용이 담긴 서한을 보냈다. 그리고 이 공사 주임 기사로 파견된 미국인 멕케이(William Mckay)라는 사람이 공사 완성 후 시운전 중에 백(白)이라는 한국인 기수(旗手)의 권총 오발로 다음 날 사망했는데, 이때의 공사가 경복궁 내 각 방의 점등을 위한 발전시설 설치 중 이었던 것으로 츠측하고 있다. 


  즉, 경복궁내의 전기시설은 두 단계로 나뉘어 설치되었는데 1885년 말경에 서치라이트가 성명 미상의 서양인 기술자에 의해 설치되었으며, 이어 1886년 말경에 미국인 멕케이(William Mckay)라는 기술자가 와서 약 3개월의 공사 끝에 경복궁 안 각 방의 점등 고사를 실시했다고 한다. 왕실에서의 전기공사는 그 이후에도 상당히 오랫동안 한성 전기회사와는 별도로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우선 경복궁 안 전기시설의 유지, 관리와 내국인 기술자의 양성을 위해 내무부 공작사에서는 1887년 9월 1일 영국인 기술자 피르(Pirre)와 1년간 고용 계약을 맺었다.

그 뒤 일본의 나가사키에 와 있던 홈 링거(Home Ringer) 상회로부터 40마력짜리 석션(Suction) 가스엔진 한 대와 25Km짜리 직류발전기 한 대를 구입하고, 동시에 궁 내부에서는 동 회사 소속의 기사 코엔(T, H, Koen)을 초청해 고용계약을 맺었다. 

  이리하여 경운궁에도 자가발전소를 설치해 1903년 봄 경운 궁내에 약 900등의 에디슨 램프(백열전구)를 점화했다. 그 후 순종황제의 거처가 된 창덕궁에는 45마력의 석유 발전기와 25Kw의 직류발전기를 일본의 상사로부터 구입해 1908년 9월부터 발전, 점등했다. 이런 식으로 왕실은 1910년 1월까지 자가발전을 계속했다.

(참고:한국 개항기 도시사회 경제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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