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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 박용운 Feb 24. 2022

추억속의 다방(4)

혼돈 混沌의 시대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언제쯤이나 코로나 이전처럼 지낼 수 있을까? 라는 기대보다, 카오스 chaos의 문이 열려 엄청난 재앙이 들이닥칠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곤 한다.

  코로나, 기후변화, 대중영합주의(포퓰리즘 정치), 금융위기, 저출산, 부동산침체 등, 곧 현실로 다가올 위기에 대처를 어떻게 해야 하나, 그야말로 대혼돈, 총체적 난국인 듯하다.     

  이러듯 세상이 시끄러워지면 과거엔 예술인들이나 지식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거리의 이곳저곳 조그만 다방에 모여 시국을 걱정하고 했었는데 그런 풍경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밖에 볼 수 없다. 다방의 풍경은 세계 어느 곳에도 없는 한국적 명물을 두고 어느 외국인은 이런 말을 했다. ‘한국에선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밖에 없다. 허구한 날 사람들이 모여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진지한 토론을 한다. 거기에는 남녀노소가 없고, 대체로 화제도 일정하지를 않다. 흥분해서 목청을 높이는가 하면 토론은 끝이 나질 않는다.“     

  "두더지 굴처럼 담배 연기로 가득한 음악다방은 20∼30대들로 발을 디딜 틈도 없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들은 유리창 속의 장발 머리의 굵직한 ‘디스크자키’ 목소리와 함께 흘러나오는 달콤한 음악에 취해 미동도 하지 않는다.

  가끔 고막이 터질듯한 보컬 그룹의 록 음악이 나오면 마치 리드 보컬이 된 듯 노래를 따라부르며 몸 장단을 맞춘다."


  70년대에서 80년대 초반까지 도심과 변두리 지역에 분포했던 ‘음악다방’ 속의 한 장면이다. 커피 한 잔 값이 100원 정도 하던 시절 호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사회 초년생들이나 젊은이들의 유일한 휴식처였다.

  사랑하는 연인과 시원한 음료나 커피를 마시며 평소 좋아하던 팝송을 맘껏 들을 수 있는 음악다방의 인기는 하늘을 치솟았다. 





  음악다방의 얼굴마담은 단연 DJ였다.

  유리 안 뮤직박스 속의 DJ들은 신비 그 자체였다. 그 시절 젊은이들은 누구나 한 번쯤 DJ를 직접 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아마도 아가씨들에게 인기가 많아서 그렇지 않았을까?


  장발 머리에 나팔바지에 미니스커트가 유행하던 시절이었고, 사내들 바지 뒷주머니에 도끼빗을 하나쯤 넣고 다니며, 한껏 뽐을 내며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는 DJ의 모습 또한 그렇게 멋져 보였다. 특히 갓 성인이 된 새내기들에겐 DJ가 선망의 대상으로 비쳤다.


  그들은 구석진 자리에 앉아 커피 한 잔 시켜놓고, 노닥거리며 음악을 신청하며 종일토록 음악에 묻혀 지냈다. 당시 유행하던 팝송과 가요를 섞어서 신청했었다. 선남선녀들이 모여 눈이라도 마주치길 기대하며 시간을 보내다 눈이라도 한번 마주치면 친구들에게 자랑을 늘어놓기 일쑤였다. 


그 시절 다방 이름들을 살펴보면 ‘약속다방’은 왜 그리도 많았던지.

  아마도 약속約束이란 단어가 주는 뉘앙스(프랑스 nuance) 덕에 그런 것 같다.

  벌써 세월이 30년이 훌쩍 넘어 버렸다. 추억의 음악다방을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다. 당시에는 좋은 오디오를 구매할 수 없어 음악을 듣기 위해 감상실이나 다방을 찾았지만, 시대가 변한 지금 시대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음악다방의 시발 始發은 1950년대 말 서울 충무로에서 문을 연 ‘쎄시봉’으로 알려져 있다. 명동의 ‘은하수’가 최초라는 주장도 있다. 그 후 생겨난 종로2가 뒷골목의 ‘디쉐네’, 미도파 옆 시대백화점 자리에 ‘라 스칼라’, 화신백화점 3층의 ‘메트로’,충무로의 ‘카네기’ 등도 70년대까지 전성기를 이뤘다고 한다. 

  음악다방들도 한때 최고의 인기를 누렸었다.      

  625전쟁의 휴전 협정이 조인된 것은 1953년 7월 27일이다. 부산에 내려가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서울로 돌아온 것은 그해 8월 15일이었다.

  1950년대가 시작된 것이다. 시인 고은이 1971년 잡지 ”세대“에 ‘1950년대’라는 작품을 1년간 연재한 적이 있다. “나의 고향은 폐허였다.”라는 부제가 붙은 이 연재물은 1950년대가 얼마나 힘든 시대였고 그 시대를 한국의 문인들이 어떤 모습으로 돌파했는가를 회상하는 글이다.      

  ”아이 50년대”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논리를 등지고 불치의 감탄사로서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50년대의 운명과 허위의 절망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폐허를 사랑한다는 뜻이 된다. 모든 것이 끝났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라고 한 1950년대 한국의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이었던가. 서울을 포함해 전국의 크고 작은 도시들이 폐허의 거리였다. 시가지도 파괴되고, 공장도, 학교도 모두 파괴되었다. 당연히 일자리가 없었고, 실업자가 거리를 메웠다. 1955년 당시 한국인 1인당 국민(생산)소득은 65달러였고, 1960년에는 80달러였다. 물론 공무원, 은행원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도시 주민의 주된 직업 서너 가지를 알아보면 지게꾼과 넝마주이와 창녀였다고 한다. 물론 구두닦이도 빼놓을 수 없다.     

  서울의 경우 1954년의 인구수는 124만 명이었다. 그것이 1955년에는 157만 명이 되었고, 1960년에는 244만 명이 되었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의 일자리는 무엇이었을까? 대표적인 것이 다방과 술집 그리고 음식점이었다. 명동과 충무로는 공습 피해로 폐허의 거리로 변해 있었다. 다방과 술집이 영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도 종로와 을지로에는 집이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종로, 을지로에는 하룻밤만 자고 나면 다방이 하나 생겼고, 술집이 하나 생겼다고 한다.     

  서울의 다방 수가 최초로 집계된 것은 1954년 3월 31일이었고, 총 282개였다. 중구 관내에 171개, 종로 관내에 64개였다고 한다. 1956년 말에는 433개, 1957년 말에는 499개, 1959년 말에는 887개로 집계되었다. 중구 종로에만 1960년까지 600개가 넘는 다방이 있었다. 6·25전쟁이 끝난 다음 서울에 갑자기 다방 수가 늘어나며 다방의 성격도 크게 바뀐다. 지금까지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멋을 추구하는 것이 일반적인 풍속이었다. 주인 자신부터 문화 예술계에 몸담고 있었고 모여드는 사람 역시 같은 부류의 동지들이었다. 그러나 전쟁 이후 다방의 주인은 지식인 계급의 남자 주인에서 영리에 밝은 여자 주인으로 바뀌었다. 

  그 밑에 얼굴마담과 레지, 계산기 주방장이 종사하는 체제가 정착됐다. 규모와 분위기가 전보다 크고 화려해졌다. 1950년대에 걸쳐 서울의 범위가 확장되면서 다방의 분포 또 한 점차 넓어졌다. 물론 중구와 종로에 많이 모여 있었지만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변두리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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