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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 박용운 Mar 16. 2022

실존주의(Existentialism),

사르트르(Jean-Paul Sartre)

  

실존주의(Existentialism), 사르트르(Jean-Paul Sartre)    


  언제부터일까? '실존주의'라는 말이 가슴 한편에 들어와 자릴 잡았다. 난 개인적으로 실존주의 사상이 나랑 조금 잘 맞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아직도 갈 길이 한참 멀지만, 진정으로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인식을 가진 것도, 그간 이유 모를 담을 쌓고 지낸 철학에 급작스레 관심이 간 것도 모두 거슬러 올라가 그 근원을 따져보면 그곳에 실존주의(Existentialism) 사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실존주의는 인간 전체의 본질보다 인간의 삶과 내면을 중시한 철학이었나? 

  나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스스로 결단하여, 이 세상에 왜 존재하는지를 결론 내려야 하는 존재다. 타자와 부대끼며 끝없는 고통 속에 인생과 저항하며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그런 인간에게 우울함이 온다는 것은 존재에 의미에 대한 의문이 들었을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내 존재를 의심할 때 내가 가장 보잘것없이 보인다. 존재의 부정은 공허함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라 했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는 인간은 먼저 실존한 다음 세계 안에서 서로 만나고, 세계 속에서 문득 모습을 나타냈다가, 그 후에 정의된다고 했다. 따라서 인간 중심의 이 사상은 기독교와 유대교 그리고 무신론을 말하는 광범위한 주제들과 저자들이 포함될 것이다. 

  실존주의가 인간의 음악, 미술, 문학, 연극, 시, 정신분석 등 다양한 인간 문화와 예술 활동이 이 사상을 전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게 된 것도 이해가 된다. 아마 실존주의라는 말의 의미를 대략적으로나마 깨달은 것은 알베르트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나서였던 것 같다. 사후적인 깨달음에 불과했지만, 우연히 만난 여성과 성관계를 나누고, 태양을 느끼며 죽음 앞에서 삶의 행복을 절감하는 뫼르소의 모습. 

  또한 유발 하라리의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이라는 책에서 인간 생에 우주적 의미가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대목을 읽고 크게 감화했던 것 같다.

  내 인생에는 특별한 운명이 있겠거니, 의미가 있겠거니 생각했던 것은 얼마나 무용 無用하였다는 말인가? 그럴 뿐만 아니라 카뮈의 <시 지프 신화>에 영향을 받은 코엔 형제의 영화 <인사이드 르윗>, 혹은 실존주의 이전의 작가이지만 실존주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를 받는 도스토옙스키와 카프카의 소설과 같은 작품들 역시 나의 실존주의 관심에 큰 도움을 주지 않았나 싶다. 

  “신은 죽었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니체(1844-1900)에서 시작되어 하이데거, 사르트르, 보부아르, 카뮈, 조르주 바타유, 메를로 퐁티로 이어진다. 

  근대 실존주의(Existentialism)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스페인 내전(1936-1939),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을 겪은 뒤 유럽의 지식인들 사이에는 허무감과 좌절감이 팽배했다. 인간의 이성과 역사의 발전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가 생겨났으며, 신의 권능에 대해서도 불신하게 된다. 

   실존주의는 외부 사물이 인간 주체 안에 현상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탐구한 현상학(하이데거 등)에 영향을 받은 철학의 분야라 할 수 있다. 또한, 헤겔의 관념론(인간의 체계적 이해)과 콩트의 실증주의(모든 것은 과학적 실증이 중요하다)를 반박하면서 그 모습을 드러냈었다. 

  그런데 실존주의는 하나의 철학사상이라기보다 하나의 정신적 운동이었다. 그것은 이 철학사상이 등장한 시대적 분위기, 즉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를 지배했던 서구 과학 문명의 폐해를 직면하는 시대적 반성의 분위기와 크게 부합되는 점에서 그렇다.

즉 실존주의는 서구의 과학 문명 쇠퇴의 전주곡이고, 서구 문명의 위기의식과 보조를 같이했다. 다시 말하면 실존주의는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이라 할 수 있다. 

  실존주의는 인간의 본질을 부정한 대신 인간 개인의 절대성과 고유성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인간 중심적 사상이다. 실존이라 번역되는 exisence란 단어는 existere(ex=sistere) 파생어로서 합리론 체계에서 인간의 내면, 심리적 인식을 고찰해서 관념적 본질을 발견하려는 것과는 달리 그 체계가 밖으로 나온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를 중시한다. 

  합리론적 체계가 인간보다 인식의 대상인 법칙에 매인 하나의 기계로서의 자연, 또는 객체 대상에 주목하고 그것을 다루는 사람 그 자체에 관해 관심 두지 않으므로 인간은 강조하는 것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음을 비판한다.

인식의 주체는 단지 인식하는 기계, 거울일 뿐인 것으로 여겨진다. 또 본질, 원칙, 원리란 사실상 구체적인 사실들의 이론적 추상일 뿐, 오히려 삶을 왜곡하고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 할 수 있다. 

  어거스틴, 파스칼 등을 거론하나 일반적으로 키르케고르(1813-1855)가 기독교 실존주의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서구철학에서 흔히 도외시되었던 파토스 pathos 적 인간에 주목하고 인간의 불안, 죄, 절망, 허무, 공포 죽음의 주제로 삼았다.

그는 인간을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라 하였으며,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 안에 내던져진 존재"라 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인간은 사물과 다르게 본질이 규정되지 않고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없이 세상에 우연히 내던져진 존재라는 그 모호한 문장이 잊히지 않는다. 인간의 무 無의 상태에서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해 행동과 운명을 선택하고 결과에 책임지는 과정을 통해 본질을 창조해 나간다는 그 울림이 선명하다. 

  ‘인간에게서 중요한 것은 이성이나 인간성 같은 보편적 본질이 아니라 실존이다.’라고 주장한다. 또 ‘인간의 경우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라고 주장했다. 실존은 인간의 ‘현실 존재’(진실 존재)를 뜻한다. 본질도 존재이긴 하지만 가능적 존재, 추상적 존재일 뿐이다. 

  실존주의는 20세기 초 서구의 위기의 상황으로 인해 큰 영향을 미쳤다.

  실존주의는 다른 어떤 사상보다 기독교와 더 깊은 연관을 맺은 사상이었다. 실존적 철학자 중 가장 반기독교적이라 할 니체 역시 부친이 목사였던 기독교에 뿌리를 둔 사람이었다. 그 외에도 마르셀, 베르자예프, 마리탱등 모두가 기독교인이었고, 그 외에도 마틴 부버나 레비나스는 유대인으로 유대교 적 전통의 철학을 했던 사람이다. 

  “죄가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고 말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나에게 가르쳐 주었을 뿐이다.”

  -카뮈의 “이방인” 중에서- 

  사람을 죽이고도 그것이 죄인지도 모른다는 말은 일반인이 받아들이기 위해 할 수 없는 말이다. 표면적으로만 봤을 땐 소시오패스 같은 정신적인 질환을 가진 자들에게서나 나올 법한 말이다. 근래에 카뮈의 “이방인”을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다. 아마도 한 30년 전쯤에 읽지 않았을까. 

  실존주의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삶이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살고자 하는 마음의 분투 奮鬪라고 설명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인간은 몸에 해로운 것들을 일삼거나 정신적으로 병리적인 증상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죽음을 향한 두려움과 공포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게 아니라 그러한 공포를 직면하고 앞으로의 삶을 마주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는 일이다. 

  어렸을 때부터 아주 익숙하게 따라다녔던 죽음과 무의미에 대한 불안감, 이것들이 나를 덥석 집어삼키지 않도록, 내 안에 너무 깊게 팬 상처들이 이제는 나를 아프게 만들지 않도록 그 곯아있는 것들을 차분히 들여다봐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 동시에 내가 평생을 고민하며 짊어지고 가야 할 일이었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기 때문에 삶을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눈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한순간이라도 더 치열하게 살아가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 열쇠도 없이 내 마음을 활짝 열고 들어온 그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내어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 그리고 그들과 아낌없이 또 남김없이 순간의 행복을 온몸으로 누리며 나아갈 것, 하지만 그러면서도 타인의 관심과 보살핌에 전전긍긍 목매는 것이 아니라, 오롯한 나 자신으로서의 자리를 굳게 지킬 것, 이러한 다짐들을 내 안에 소중히 새겼다. 

  이것이 이번 연도 아니 내 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변화이자 출발점으로 삼아야겠다. 드디어 내 눈앞의 죽음이 아니라 내 눈앞의 반짝이며 남은 날들을 위해서 한 걸음씩 씩씩하게 내디딜 준비가 되었다. 나라는 사람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아주 아름답고 환한 내생의 가장 젊은 날을 향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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