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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uruvuru Feb 15. 2017

빛으로 감싸안는 따쓰한 마무리

영화 <도쿄 소나타>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공포∙스릴러에 정평이 난 감독이다. 이와 같은 장르는 기본적으로 여타 장르와는 다른 방식으로 취급되며 별개의 방식으로 건조된다. 공포영화는 영화의 큰 범주안에 속하지만 그 자체로 공포영화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를테면 영화를 통해 끌어가는 방식과 의도 그리고 정황들이 보통의 영화들과는 꽤나 다르다. 스토리도 중요하지만 어디까지나 분위기(무드)가 제 몫을 해야 되고 긴장과 공포를 심게 만드는 연출을 곳곳에 포진시켜야 한다. 이는 보통 영화가 강박을 갖게 되는 스토리라인과 기승전결 구조를 넘어서 장치에 더 힘을 쏟는다는 말이다. 배경음악, 배경 묘사, 연출 등 더 다양하고 농밀하게 이뤄진다. 공포영화가 무엇보다 만들기 어려운 이유기도 하다. 


만약 이런 장르에 정평이 난 감독이 기존과 전혀 다른 장르를 시도한다면 자연스레 이목이 쏠릴 법한 일이다. 그것도 꽤나 정평이 나있는 감독이라면! 그들에게선 보통의 시도와는 다른 색다른 시도를 기대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보기 좋게 해냈다. 2008년에 내놓은 그의 작품 <도쿄 소나타>가 이를 여지없이 증명한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과 주인공 카가와 테루유키

공포영화의 경우, 관객의 감정을 지배하는 것이 최우선적 과제다. 방법은 여러 가지지만 다짜고짜 무서운 장면을 나열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억지로 공포를 심는 건 삼류 코메디보다 못하다. 중요한 건 전제다. 관객이 얼마나 공포에 지배당하는지는 등장인물의 상황과 입장에 어떤 위치를 마련하고 시선을 잘 맞추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가령 등장인물과 관객이 직렬적으로 연결되어있을 경우, 그 효과가 가장 크다. 그렇지 못하고 실패하는 공포영화의 경우에는 이런 내러티브와 위치 선정이 부족한 경우에 해당되다. 그런데 이런 방식이 공포영화에만 한정되진 않는다. 이와 같은 효과는 놀랍게도 휴머니티에 가장 걸맞은 방식이기도 하다. 


휴머니티는 공감을 통해 건조된다. 이는 앞서 말한 직렬적인 연결에서 극대화된다. 여운이 남고 간혹 눈물샘이 자극되는 건 직접적으로 그 상황에 관객이 스스로를 투영하기 때문이다. 결국 두 장르의 극명한 차이는 장면의 전환이다. 공포는 곳곳에 놀랄만하고 긴장감 어린 장면을 수시로 나열한다. 이런 장면의 빠른 전환 때문에 계속해서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다. 반면 휴머니티는 장면의 전환을 삼가고 시선을 오래 둔다. 보통 인물의 얼굴을 줌인해서 관객과 인물 사이를 보다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맞닿게 만든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이런 장르적으로 공통분모적인 면과 그렇지 못한 부분들을 보기 좋게 섞어냈다. 이는 <도쿄 소나타>의 스토리와 장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평범한 가족에 균열이 찾아들기 시작한다. 능력이 부족했던 아버지의 권고사직이 시작이었다. 직업적으로 무너진 가장은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게 된다. 원래부터 대화가 부족했던 가족인데, 되려 그런 좋지 않은 상황이 맞물리게 되면서 최악의 국면으로 향하게 된다. 남편 그리고 아들들과 적절한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겉도는 어머니는 점점 이상해지는 가족의 형태에 스스로 마저 무너뜨리게 되고, 이런 볼성없는 가족에 환멸을 느낀 큰 아들은 난데없이 미군에 지원한다. 더구나 가족의 현 상황을 부정이라도 하듯 눈치 없이 재능을 개화한 피아노 천재 둘째 아들로 인해, 이 가족은 서로의 생각과 입장을 보드 담을 여유 없이 저마다의 균열을 확대하고 무너지게 이른다. 



아버지는 우여곡절로 일을 구하지만 기대했던 이하의 직업을 구한다. 어머니는 우연히 집에 들어온 도둑과 

함께 가족을 떠나려는 도피를 한다. 작은 아들은 괜히 친구 가정사에 오지랖을 부리다 감옥에 들어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맞는다. 좀처럼 맥락 같지도 않은 우스꽝스러운 상황들이 가족에게 들이닥친다. 여기에 개연성이란 없다. 그냥 저마다의 일탈을 겪고 있던 와중에 서로 충돌하거나 다시 일탈로 돌아가거나 하면서, 아주 갑작스럽게 이 영화는 어떤 분기점을 제시한다. 


이 극명한 분기점은 단 한순간에 이뤄진다. 일탈을 마치고 돌아온 가족이 아까 전에 들었던 도둑으로 인해 난장이 된 집에서 조우하는 장면부터다. 이미 난장이 되어있는 가족의 외적인 형태가 집의 난장으로 서슴없이 표현되지만 이상하게도 가족들은 이에 놀라거나 의문을 제시하지 않는다. 이미 그들의 내면은 난장에 가깝기 때문이다. 다른 걸 돌보고 살필 여유조차 없는 것이다. 그저 직감적으로 느끼는 허기를 자연스럽게 연출하며 가족이 한 식탁으로 모이는 경우를 억지스럽게 상정한다. 기괴하고 뜬금없는 이 장면은 대체로 맥락 없이 소름 끼치는 공포영화의 방식과 굉장히 흡사하다. 


간혹 포착되는 난데없는 장면들도 압권이다. 주인공 가족부터 다른 등장인물까지 이 영화에서는 그들의 표정이 잠시 동안 줌인되는데, 좀처럼 이들의 생각을 읽기 어렵다. 난처한 상황이거나, 좋지 않은 상황을 겪고 있는 건 짐작할 수는 있어도 표정을 통해 묻어나는 진의를 확인하기 어렵다. 괜히 극단적인 상황이 초래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불안이 엄습하며 향후 전개를 두근거리면서 간을 졸이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이 영화는 불친절한 맥락을 뛰어넘어 말미에 가서 전개를 급 선회한다. 피아노에 유독 재능을 보이던 둘째 아들의 연주 장면을 통해 앞서 쌓아왔던 모든 감정들을 단번에 청산한다. 이 장면은 앞선 장면들과는 다르게 유독 평범하고 아주 자연스럽다. 아들의 콩쿨에 따라간 가족의 모습을 슬며시 비추며, 아들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을 대략 4분가량 지긋이 담아낸다. 절망이 길게 누웠던 가족 간의 유대가 한 편의 피아노 곡으로 말끔하게 청산된다. 그리고 우리는 비로소 앞서 확인했던 불안함을 잊게 된다. 곡은 드뷔시의 <달빛>. 어둡기만 하던 암울한 시간을 지나서 빛으로 감싸안는 영화 <도쿄 소나타>는 그 어떤 영화보다도 마무리가 강렬하고 따뜻하다. 


영화 <도쿄 소나타> 마지막 연주 장면 

https://youtu.be/VM5LbbH4y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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