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컨택트>
난데없이 인류 앞으로 외계 생명체가 등장한다. 이런 내러티브, 이미 지겹게도 봐온 건 사실이다. 미지의 세계를 관통해온 괴생명체. 인류가 결코 듣지도 보지도 못한 미지의 영역이 상상의 산물로서 쏟아진다. SF라는 장르가 건조하는 상상력의 결정은 분명 인류가 가진 몇 안 되는 축복임에 분명하다. 우리는 상상할 수 있으며 그걸 구현해낼 수 있는 단 하나의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영화 <컨텍트>(원제 ‘어라이벌’)는 그런 의미에서 잘 만들어진 지난 SF 영화들의 영광을 슬며시 들춰낸다. 상상을 근거하지만 그렇다고 과학을 배척하지 않은 그리고 공상에 치우쳐 있지 않은 그런 영화들 말이다. 이를테면 가장 최근으로는 <그래비티>나 <인터스텔라>와 <마션> 같은 영화다. 외계 생명체의 존재 유무를 두고 아직 이렇다 할 명확한 근거와 현상들이 발견되지 않은 가운데, 앞선 영화들과 나란히 격을 둔다는 건 꽤나 무리수 있는 생각이다. 더구나 외계인이라니. 하지만 우리는 <컨텍트>가 어디까지나 학문적인 근거와 과학과 비과학의 규명되지 않은 불분명한 경계를 꽤나 논리적으로 다루는 형상들을 통해서 이 영화를 결코 가벼운 SF로만 생각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가 묘사하는 일리 있지만 생경한 근미래적 모습이 언뜻 관찰될 때, 인류의 상상력의 끝을 의심하게 이른다. <컨텍트>는 한편으로 무섭게 사실 같은 영화다.
이 영화에서는 기존 장르의 기본적인 풀이 방식을 기대하기 어렵다. 외계인들의 등장이 가장 첫 장면과 문제로서 부상하지만 어디까지나 영화 속 외계인들은 수동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최우선적 전제는 전쟁이 아닌 접촉과 대화다.
언어학자가 주인공인 것으로부터 이 영화의 선택은 신선한 측면이 있다. 외계인과의 대치를 통해 국면을 자주적으로 돌파해야 되는 상황에서 종용하는 캐릭터의 대부분은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이거나 군인 등, 어느 정도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캐릭터였다. 하지만 <컨텍트>는 언어학자와 그에 힘을 보탤 물리학자만을 전면에 내세운다. 무력적인 방식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지적으로 문제를 풀어내겠다는 의지다.
대화가 그렇게 쉽게 이뤄질리는 만무하다. 외계의 언어를 지구단위의 데이터에 근거해서 풀어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가설을 세우고 증명하고 수정하는 번거로운 절차를 진득하게 쌓아가야만 얼핏 대화에 가까워진다. 그렇지만 그것 마저도 부족한 상황이 계속된다. 영화 속에서 이 장면은 루이스 박사의 해석인 ‘무기와 도구’의 언급에서 드러난다. 무기와 도구를 구분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녀의 의견은 단순히 ‘무기’라는 한 단어에 무력해진다. 전례 없는 상황에 공포가 무겁게 당착 하기 때문이다. 이때 언어는 그 어떤 기재보다 폭력적으로 변모한다. 각 국가는 동요하게 된다.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듯했지만 그 안에서 외계인을 대처하는 방식에 대해 입장이 나뉘기 시작한다. 같은 인간으로도, 비슷한 언어로도,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난처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외계인들은 루이스에게 힌트를 준다. 루이스가 계속해서 꾸는 어떤 꿈의 기시감을 통해서다. 그녀는 알게 모르게 그들의 언어에 접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소통이라는 방식이 아니라 꿈을 통한 경험으로 펼쳐진다. 누군지도 모르는 꿈속의 어떤 여자아이의 존재가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고, 실은 이것이 그들의 언어의 일부임을 깨닫게 만든다.
그들의 언어는 선형적인 언어가 아니었다. 뱉은 직후 주워 담을 수 없는 우리들의 직선적인 말과는 달랐다. 우리가 뱉어내는 말은 현재에서 미래로 향한다.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미지의 세계를 통해 온 그들의 언어는 지금 있는 과학적인 현상으로 해석할 수 없는, 비가시적이고 몽환적인 언어였다. 그들의 언어는 유독 원형으로 구부러져 있는데, 그것이 힌트였다. 그리고 힌트는 꿈을 통해 시간을 엮는 어떤 나선에 가깝다고 어렴풋이 암시한다.
루이스가 꾸던 꿈이 그녀의 미래였고, 꿈속에 등장하는 의문의 소녀가 자신의 딸임을 알게 되고, 그 딸이 결국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는 비극적인 과정이 외계에서 건너온 그들과의 대화임을 깨닫게 된다. 그들의 말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한데 묶는다. 현상이 아닌 개념에 가까운 언어다. 쉽게 말하자면 앞을 전혀 알 수 없는 미래까지 구축해서 언어로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것을 과거와 현재까지 같이 묶어내어 어떤 맥락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루이스는 그들의 언어에 할 말을 잃는다.
이들의 언어가 증명하는 바는 희망적이지 않다. 그 안에는 운명의 당연한 굴레가 있는 것이다. 발버둥 치거나 헤어 나올 수 없는 일방적인 길이다. 그렇지만 루이스는 이에 낙담하지 않는다. 그녀는 되려 암담한 미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결국은 비극적으로 죽는데도 말이다. 그녀는 어떤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래의 그녀가 딸에게 하는 말을 통해서다. “그 병은 막을 수가 없어. 네 수영실력이나 글 솜씨 같은 모든 놀라운 재능처럼 난 막을 수 없어”.
이 말은 미래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무기력한 의지와는 조금 다르다. 정확히는 운명의 이치를 왜곡하기보다 미래의 딸과 만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만남과 이별이 각각 처음과 끝을 장식하듯 그녀는 결국 비극으로 나아가더라도 딸과의 축복 같은 만남을 원하는 것이다. 그녀의 선택은 안타깝지만 경이롭다. 우리는 언제나 과거와 미래를 조작하기를 원했다. 과오를 청산하고 미래를 더 보기 좋게 바꾸고 싶어 했다. 그것이 마치 본래의 운명인 것처럼. 하지만 운명은 그런 게 아닐지도 모른다. 바꾸고, 청산하고, 되고 쳐서 마련하는 안식 같은 미래엔 정작 삶의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처럼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간다. 삶에 있는 힘껏 부딪혀야 하는 방향은 과거가 아닌 미래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재에 필사적이 된다. 루이스의 선택은 인류의 위대한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