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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uruvuru Feb 23. 2017

세 편의 삶의 조각

영화 <문라이트>

※주의 영화 <문라이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린 소년 샤이론은 학교에서 이지메 당하고 있는 가엾은 소년이다. 체구가 왜소하고 매사에 소극적인 성격이라 친구도 없다. 괴롭힘 당하기에 딱 좋은 소년이다. 소년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는 괴롭힘 당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익숙하다. 더구나 자신을 칭하는 나약한 별명까지도 납득하고 있다. 하지만 갑작스레 그런 그의 일상에 낯선 한 남자가 개입하기 시작한다. 

영화 <문라이트>의 본격적인 시작은 이때부터다. 소년의 가엾은 일상에 개입한 정체모를 남자 후안의 등장 그리고 그의 연인인 테레사가 주인공 샤이론의 인생에 서서히 파고들면서부터 시작된다. 


<문라이트>는 포스터에 보이는 선명한 3색의 각기 다른 얼굴처럼 대략 3부작으로 나뉘어져 있다. 소년, 청년 그리고 성인이 되는 과정을 각기 다른 3명의 배우를 내세워 하나의 인물 샤이론을 연기하고 있다. 한편 범상치 않은 포스터와는 다르게 <문라이트>는 내용면으로는 아주 평범하다. 성장과 시간순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는 영화인데, 사실 이런 류의 영화는 지천에 널려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좀처럼 낯설고 보기 드문 영화이며 신선하게 다가오는 건 이 영화가 다루는 인종이 어디까지나 ‘흑인’이며 동성애코드를 다루기 때문이다. 

동성애라는 장르는 그 자체만으로도 어떤 이데올로기를 형성할 수 있다. 그것은 때론 성에 보수적인 사회를 향한 반박일 수도 있고, 아직은 낯설고 부끄러울 수 있는 동성애 코드의 자문자답 적인 재확인일 수도 있다. 다소 따쓰한 시각이 배제되는 퀴어 영화는 대중의 인식면에서 일부 곱지 못한 시선을 받을 수 있어도, 다양한 세상을 구축하는 영화적인 의미에서 아주 아름다운 시도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문라이트>는 이를 넘어선다. 퀴어 영화를 넘어 흑인이라는 유색인종 요소가 개입되면서, 이 영화는 젠더 이데올로기와 인종 이데올로기를 한데 혼합시킨다. 영화론적인 아름다움을 초월하여 보는이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불러 일으키며, 아직 온전히 다루지 못한 세상의 일부를 체험하게 만든다. <문라이트>는 거대한 메시지를 담아 세상에 직격하는 영화다.

소년 샤이론

1부는 소년 샤이론의 이야기다. 너무 어려서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힘든 소년의 각박한 일상에 볕과 같은 존재가 나타난다. 소년 샤이론은 좋은 어른 후안을 만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좋다는 기준은 소년에게 있어서다. 샤이론을 돕는 후안은 마약 판매상이다. 직업적으로 그는 배울게 못 되는 어른이다. 하지만 샤이론을 보면서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후안은 적어도 샤이론에게는 좋은 어른이 되고자 한다. 좋음과 훌륭함이 구별되는 순간은 이러한 시선의 차이에서 출발한다.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린 샤이론은 마냥 좋은 사람이지만은 않은 그들에게서 삶을 살아가는 지혜와 따쓰함을 배운다. 


2부는 청년 샤이론의 이야기다. 제법 큰 그는 이제 스스로 생각할 수도 있으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어릴 때와 비슷한 처지다. 괴롭힘은 여전하다. 그는 분명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배웠지만 정작 행동으로는 옮기지 못한다. 아직은 미숙하기만한 청년이다. 물론 그가 그렇게 행동할 수 없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약에 취한 어머니, 자신의 성 정체성, 자신을 지탱해주던 좋은 어른(후안)의 부재 등. 아주 다양하다. 결국 그는 매일 똑같은 일상에 녹아들 뿐이다. 어디까지나 원래있던 샤이론을 살아가면서 말이다. 그게 가장 속 편한 일인 것처럼. 

친구 케빈과 청년 샤이론

하지만 그런 그에게 2부 청년기는 극적인 전환을 맞는 시기가 된다. 오랜 벗인 케빈과의 교감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제대로 직시한 순간과 소중한 친구이자 연인이 될 수 있었던 케빈의 배신으로부터다. 그는 자신에게 찾아온 갑작스런 감정의 격변에 스스로 당황한다. 이성을 최대한 억눌러보려고 애를 쓰지만 억눌러지지 않는다. 결국 자신을 걷잡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지금껏 살아오던 자신을 부정하게 이른다. 그는 처음으로 폭력을 휘두른다. 


2부에서 한참 시간이 흘러 3부 어른 샤이론의 이야기다. 3부는 1부 그리고 2부와는 사뭇 달라진 샤이론이 등장한다. 왜소했던 체구는 사라지고 그는 다부진 몸이 되어 돌아왔다. 평생 자신이 혐오할 것만 같았던 나쁜 일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는 과연 샤이론일까. 스스로를 거울에 투영하는 장면부를 통해 샤이론이 자신의 그런 모습을 다소 낯설게 여기는 걸 영화 속 장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영화는 계속해서 샤이론의 정체성을 찾아 나선다. 성 정체성으로 시작해서 직업적으로 어긋난 선택을 감행하고 만 그의 섣부른 결정까지. 나아가서 스스로의 정체성까지도. 그런데 이와 같은 고민은 어릴 적 자신을 배신한 이후로 오랜만에 만난 친구 케빈의 스스럼없는 질문에 황당하게 무너진다. “넌 누구야? 넌 누구지 샤이론?” 수없이 자문해오던 질문이 타자에 의해 전달되는 순간, 보기보다 가볍게 여겼던 질문은 자신을 향해 무겁게 직격 한다. 그제서야 샤이론은 대답할 수 없었던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어릴 적 후안이 가르쳐준 “언젠가는 뭐가 될지 스스로 정해야 돼”라는 이 말까지도 단번에 청산되는 순간이다. 그는 뒤늦게서야 누군가에게 마음을 허락하고 오랜 시간 반문하던 자신을 직시한다. 자신이 누군지를 깨닫게 되는 첫 발을 내딛는다. 


영화 속 이 순간, 자연스레 떠올리는 건 1부에서 소년 샤이론에게 후안이 말했던 달빛의 은유다. “In the moonlight Black boys look Blue” “달빛 속에선 흑인 아이들도 파랗게 보이지”. 평등을 세련되게 이야기하는 이 문장은 <문라이트>를 관통하는 가장 큰 의미가 된다. 이는 누구나 고유하게 물들 수 있는 달빛의 관용이 성소수자 그리고 유색인종을 넘어서, 그 어떤 과오와 혼란에도 스스로를 망각하지 않도록 만들 것이라는 기분 좋은 암시다. 샤이론은 그런 순간을 그를 잊지 않은 오랜 친구 케빈의 도움으로 맞게 된다. 언뜻 상실한 것처럼 보였던 그의 달빛은 제법 가까이에 있었다. 먼 길을 돌고 돌아왔지만 마침내 자신을 마주한 것이다. 샤이론은 그제서야 샤이론이 된다. 아득히 먼 거리지만 두 손으로 잡힐 것만 같은 달빛 같은 영화 <문라이트>는 그 결말만큼 아주 선명하게 빛난다. 

“In the moonlight Black boys look Blue” <문라이트> 속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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