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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uruvuru Feb 25. 2017

자칫하면 동인지가 될 수 있다

원작 훼손의 정당성이란

인종이 뒤바뀐다. 동양인이 서양인으로, 서양인이 동양인으로. 영화 <페이스 오프> 같은 황당무계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건 캐스팅의 이야기다. 원작 속 등장인물의 배경과 설정을 싸그리 뒤집는 요즘 영화들의 이야기다. 새로운 설정을 포개는 등장인물의 진일보적인 면면은 시대의 흐름 혹은 새로운 해석 같지만 원작의 저해로도 이어질지 모르는 이 선택은 조금 위험해 보인다.


우선 이를 문제 삼기 전에 원작과 제2 창작물의 관계에 대해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가령 어떤 원작에서 모티브를 받아 새로운 창작물을 만드는 경우, 새로운 해석은 정당하게 보인다. 비슷하기는 할지라도 같은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사를 침범하지 않고 그렇다고 외전 격으로 치부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다른 작품이기에 성질은 유사할 수 있으나 본질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동명의 이름을 내걸 때 발생한다. “내 OO은 이렇지 않아”와 같은 불만은 이런 문제로부터 출발하는 비아냥이다.

영화 <공각기동대> 주인공 쿠사나기 모토코 역으로 스칼렛 요한슨이 캐스팅되었다.

머지않아 개봉을 앞두고 예고 영상이 공개된 SF영화 <공각기동대>는 아무래도 이런 문제가 전면으로 드러난 작품이다. 만화책이 원작 그리고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진 바 있는 <공각기동대>는 주인공이 동양인이다. 작품의 출처와 배경이 일본이라는 사실관계를 떠나 이 작품에서 분명한 건 만화와 애니메이션 속의 주인공이 동양인으로 묘사된다는 사실이다. 이름마저 ‘쿠사나기 모토코’ 일본 이름이다. 하지만 영화 <공각기동대>는 쿠사나기 모토코의 역으로 동양인을 캐스팅하지 않았다. 제작진의 선택은 배우 스칼렛 요한슨이었다. 그리고 원작의 이름을 버리고 ‘한나’라는 서양식 이름을 차용했다. 과연 이 선택은 어떤 의도를 담고 있을까.


또 하나의 비슷한 예시가 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다. 이 영화에서도 어김없이 이 문제가 떠오른다. <닥터 스트레인지>의 원작에서 등장하는 주요 인물인 에인션트 원은 동양인이다. 하지만 영화는 서양인을 캐스팅했다. 배우 틸다 스윈튼이다. 작중 티베트 족 그리고 남성이라는 설정이 있었지만 영화로 넘어오며 에인션트 원은 서양인이 되어 켈트족이라는 설정을 부여받았고 여성이 되었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동양의 컬트적인 느낌에서 출발하는 신비로운 힘을 축으로 시작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배경이 깔려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스 캐스팅을 해가면서까지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원작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좀처럼 괴리를 지워낼 수 없는 부분이다.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본래 원작에서 에인션트 원은 동양인에 남성으로 나오나 영화에서는 틸다 스윈튼을 캐스팅했다.

두 작품의 미스 캐스팅을 두고 ‘화이트 워시’가 이뤄졌다고 이야기한다. 변경된 캐릭터가 모두 백인이었기에 이 사안은 더 큰 문제로 번졌다. 분명 인종차별을 겨냥하고 백인 우월주의를 문제 삼아 지적하는 말이다. 어찌 됐든 그렇게 여겨지고 생각되는 건 충분히 이해 간다. 캐스팅에 논란을 일으키고 원작을 저해시키면서까지 이런 선택을 강행하는 건 모종의 이유와 의도가 있다고 추정할 수밖에 없다.


화이트 워시의 논란만큼 두 작품 모두 해명에 힘쓰는 중이다. 두 영화의 입장은 이렇다. 세계시장을 거점으로 영화를 판매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아직은 할리우드 전면에 큰 입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동양 배우를 메인으로 캐스팅하는 것보다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저명한 배우들을 선택하는 건 별 수 없는 선택지라는 뜻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두 영화의 캐스팅인 스칼렛 요한슨이나 틸다 스윈튼의 선택은 당연해 보인다. 영화에서 상업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끝으로 수렴하는 선택지는 상업이다. 막대한 제작비와 초호화 캐스팅으로 이목을 끌고 흥행을 예고하는 시스템이 만연한 요즘 영화계에서 잘 만든 영화란, 이런 부분들에서 성공을 거두는 영화들이다. 그렇기에 원작을 쉽게 무시하고 새로운 시도를 더한다. 원작의 인기를 등에 업고 다양한 변화를 시도해 새로운 이해를 얻겠다는 전략은 정말이지 그럴듯한 시도다. 하지만 진정한 문제는 이 영화들이 추후에 기억되는 함의에 있다.

좋은 영화가 아니라는 이유가 화이트 워시와 같은 인종차별적 캐스팅의 문제만 있는 건 아니겠지만 이로 인해 원작과의 괴리가 생기고 원작이 지닌 굴지의 강점이 무시당해 훼손된다면 이것만큼 잘못된 해석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불거지는 문제들을 불식시킬 정도로 극찬을 이끌어낸다면 그 공은 자연스레 파격적인 캐스팅으로 돌아갈 공산이 크다. 흥망의 갈림길에 캐스팅 문제가 자리한다. 결코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이건 중요한 문제다.

영화 <니나> 주인공 니나 시몬으로 캐스팅된 조 샐다나는 덜 검다는 이유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전설의 재즈 뮤지션 ‘니나 시몬’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니나> 역시 캐스팅으로 인해 문제가 불거진 영화다. 인종이 뒤바뀐 건 아니지만 대신 색깔론으로 문제가 일었다. 주인공인 니나 시몬의 역에 덜 흑인인 사람이 캐스팅됐다는 이유다. 덜 검고 더 하얗다는 명암으로 불거진 문제의식이 영화의 만듦새까지 문제를 제기했다. 니나 시몬은 실재하는 인물이다. 그것도 많은 사람들의 좋은 기억 속에 남은 인물이며 사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앞선 사례들과는 다르게 주목해볼 만하다. 만약 <공각기동대>나 <닥터 스트레인지>가 픽션이 아닌 논픽션이라면, 등장인물이 실존하는 인물이라면 캐스팅으로 불거진 논란은 배로 가중되지 않았을까?


종종 이런 문제가 별 것 아닌 듯하다가 큰 문제로 전락한다. 희화화나 농을 따먹기 위한 풍자와는 다르게 영화는 시대를 반영하는 큰 지표가 된다. 영화 하나로 얻어가는 수많은 교훈과 배움 그리고 당대의 문제의식이 있다. 그렇기에 이 문제는 중요하다. 영화가 상업적인 성공에만 치중하는 나머지 크게 이탈하는 맥락들이 있다. 두고두고 회자되는 훌륭한 영화들은 자칫 사소한 문제처럼 보일지도 모르는 이런 부분들까지도 세세하게 신경 쓰고 놓치지 않는다. 만듦새의 기저에 폭넓고 상세한 이해들이 존재한다. 결코 가볍게 넘기는 법이 없다. 가볍게 생각하는 순간 그 영화는 졸작으로 기억될 공산이 크다. 그러니까 캐스팅은 중요하다. 가벼운 동인지와 원작을 초월하는 작품 반열에 오르는 갈림길은 바로 이런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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