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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uruvuru Mar 02. 2017

도쿄 타워 그리고 어머니

영화 <도쿄 타워>

모성애라는 말은 입에서 기분 좋게 맴돈다. 분명 그 말이 우리에게 있어 익숙해서다. 반면 부성애라는 말은 왠지 모르게 어색하기만 하다. 아버지가 쏟는 애정이 부족해서? 혹은 아버지란 존재 그 자체가 애정과는 제법 거리가 있어서? 어찌 보면 일부 맞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자식과 부모의 애정관계가 아무래도 어머니라는 존재에 더 일방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자식을 그 누구보다 가까이서 품어주고, 먹여주고, 키워주고, 보드 담아주는 어머니라는 커다란 존재가 우리에게 있어 지극히 당연하고 더 친숙하게 다가오기 때문에.


어머니라는 이름을 불렀을 때, 괜시리 가슴 한편이 아려오는 뭉클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자식을 향하는 어머니의 진정성은 우리가 이 세상에 날 때부터 느껴오던 것이기에, 어머니를 향한 애정은 감정마저 초월해서 뼛속 깊은 골수까지 가득 차 있는 걸 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머니라는 말에 스스럼없이 무너진다.  

영화 <도쿄 타워>에서는 우리들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친근한 어머니의 모습이 자연스레 상기될 정도로 애틋하게 묘사됐다. 평범하고 단순한 모자 관계를 바탕으로 이야기하지만 그 여느 관계보다 <도쿄 타워>의 모자는 극진하게 표현된다. 자식을 아끼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의 애정에 감사할 줄 아는 착한 아들을 통해서 말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치 넉살 좋은 덕담이 오가는 관계다. 올곧은 애정만이 서로를 향해 부딪히며 그 틈 사이로 어떤 불화도 개입되지 않는다. 다소 극적인 전개가 부족한 것이 흠이지만 이 영화는 그저 두 사람의 애틋함을 번갈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내면 속에 잠들어있던 모성애를 다시 마주하게 된다. 


<도쿄 타워>는 15년이라는 시간을 기점으로 만남과 헤어짐을 나열한다. 아들이 15살이 되어 어머니와 떨어지게 되는 가슴 아픈 이별을 조명하고, 30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와 도쿄에서 다시 살게끔 되면서 극적인 만남을 조명한다. 아들은 떨어져 지낸 동안 어머니를 향한 애정에 한결같다. 그렇기에 15년이 지나고 성인이 되어 경제적으로 안정되자 어머니와 같이 살고자 한다. 하지만 둘을 갈라놓았던 15년이라는 시간은 그 자체로 경직된 시간이 아니었다. 이 시간은 짐작하기도 전에 삶의 안쪽으로부터 무섭게 파고들고 있었다.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간 것이다. 

결국 다시 재회한 모자는 시간에 의해 무너지게 된다. 15년이라는 지난 세월에 가늠할 수 조차 없을 정도로 짧은 시간만이 그들의 온전한 추억으로 남는다. 앞선 시간을 바로 잡을 새도 없이 그저 담담하게 어머니의 병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지독한 시간과 조우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어머니를 떠나보내게 된다. 

결말로서 빈번하고 흔한 이별의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도쿄 타워>는 결말의 방향만큼은 조금 다르다. 우리가 보아오던 많은 영화들이 암담한 마지막으로 나아가는 한편, <도쿄 타워>는 죽은 이를 추도하는 모습에서 암담하고 슬픈 기운을 몰고 오기보다 되려 유쾌한 면을 보인다. 분명 영화에서는 주인공 오다기리 죠가 오열하는 장면부터 눈물이 앞을 가르는 슬픈 장면이 계속해서 나열되지만 그의 어머니(키키 키린)를 떠올리면 그런 부정적인 기운에 쉽게 사로잡히지 않는다. 


영화의 주인공 어머니는 우리가 가장 쉽게 볼 수 있지만 동시에 가장 보기 어려운 어머니 상을 연기한다. 억압적인 사회에서, 여성이 결코 자주적일 수 없었던 혹독한 현실에서, 꿋꿋이 그리고 결코 웃음을 잃지 않으며 버텨온 어머니. 현실에서는 누구나 그 이면에서 아파하고 힘들어하며 때로는 좌초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늘 웃음으로 일관하고 낙관적이며 희망을 가지고 행동하는 그의 어머니는 한없이 밝고 눈부신 캐릭터다. 그렇기에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그녀의 죽음에 가슴 아파하고 슬퍼하는 기분에 사로잡히기보다 되려 그녀를 한번 더 떠올리며 활짝 웃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빠진다.


이런 아이러니한 대목은 결말부에서 선명하다. 아들이 죽은 어머니의 곁을 지키다가 갑작스레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고 나서부터다. 일과 관련된 마감 독촉 전화였다. 그는 마감을 독촉하는 매정한 담당자에게 버럭 화를 낸다. “당신이라면 죽은 어머니를 곁에 두고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반박하고 다시 어머니의 옆을 지킨다. 하지만 그는 돌연 어머니의 환영과 조우하고 과거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엄마는 네가 일하는 모습이 가장 좋아”. 이 말을 듣고, 그는 죽은 어머니 옆에서 필사적으로 일에 집중한다. 이 장면은 조금 우스꽝스럽다. 그렇지만 <도쿄 타워>가 드러내는 진정한 의미는 이 장면에서 여실하게 드러난다. 어머니는 죽어서도 지대했다. 

영화의 제목은 <도쿄 타워>다. 제목만큼이나 영화 속에서 도쿄 타워의 모습은 자주 포착된다. 하지만 정작 도쿄 타워라는 거대한 건축물이 이들 모자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대목은 그다지 없다. 다만 상징에 관해 이야기한다면 다르다. 도쿄 타워는 그 자체로 어떤 거대한 상징이다. 높게 솟은 이 탑은 어디에도 가지 않고 그곳에서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서있는데, 이는 마치 언제든지 자식을 지키는 어머니의 모습 같다. 거대한 상징 아래 우리가 왠지 모를 위압감과 동시에 편안함을 느끼듯이, 자식 역시 어머니라는 거대한 상징 아래에서 언제나 철부지 자식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비록 어머니라는 존재를 떠나보내게 될지라도 늘 그녀의 품 안에서 벗어 날 수 없다. 어찌 보면 이별은 표면적일지도 모른다. 죽어서도 어머니는 어머니다. 그 관계는 결코 뗄 수 없다. 불가분의 관계란 건 이런 관계를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도쿄 타워>의 원작은 작가이자 배우인 릴리 프랭키의 자전 소설이다. 도쿄에 상경한 이래, 릴리 프랭키는 자신의 젊은 시절 방랑과 잘못을 도쿄 타워를 보면서 뉘우쳤다고 한다. 원작자의 생경한 추억이 이야기 안에 그대로 담긴 것이다. 도쿄 타워는 그에게 커다란 어머니를 의미했다. 어수룩한 도시의 상징이자 어엿한 본보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필시 그만이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도쿄를 바라보는 많은 이들의 기분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의 <도쿄 타워>를 보면서 괜시리 감정에 벅차오른다. 형형하게 빛나는 도쿄 타워의 불빛을 떠올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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