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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uruvuru Mar 03. 2017

계속해서 걷다보면..

영화 <싱글라이더>

영화 <싱글라이더>는 예고편의 분위기만큼 적막하고 담백한 영화였다. 주인공인 이병헌의 경직된 표정이 일관되는 이 영화는 그의 딱딱한 주름 사이로 서늘하고 무거운 찬 공기가 흘렀다. 잔잔하고 서정적인 배경이 영화를 끌어당기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주인공을 둘러싼 극적인 균열은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랗고 묵직했다. 소중한 무언가가 보이지 않는 틈새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극적인 균열에서 좀처럼 시선을 거두지 못한 채, <싱글라이더>는 어느새 클라이막스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 영화는 이병헌으로 기록될 영화다. 주인공 강재훈(이병헌)에 의해 건조되고, 그에 의해 주물러져 어떤 형상을 빚는다. <싱글라이더>의 힘은 어디까지나 이병헌에 있다. 온전히 그의 연기로만 구축되며, 그의 힘으로만 해체할 수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영화기도 하다. <싱글라이더>를 연출한 이주영 감독은 이 작품이 데뷔작이다. 배우에게 영화의 선편을 죄다 떠맡기는 그녀의 방식은 조금 위험한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찌보면 감독 그녀가 이병헌이라는 배우를 잘 이해하고 있기에 <싱글라이더>가 준수한 작품이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스터>에서 다소 아쉬운 필모그래피를 남긴 이병헌은 <싱글라이더>를 통해 전에 없던 신선한 필모를 기록한다. 이 영화는 이병헌의 새로운 연기인생의 시작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직업적 실패로 무너진 주인공 강재훈(이병헌)

주인공 강재훈은 잘 나가는 증권회사의 지점장이었다. 한남동 제2 지부장을 맡고있는 그의 주된 업무는 고객에게 채권을 발행해 파는 일이다. 고객들은 그가 보여주는 실적을 바탕으로 그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 그리고 그 어떤 의심도 없이 채권을 사간다. 그러나 갑작스레 그의 회사가 파산하게 된다. 영화의 시작은 이 시점부터다. 그간 발행해온 채권 전부가 백지수표로 전락한다. 이에 분노한 고객들은 그를 규탄한다. 무릎꿇어 사과하는 그에게 폭언을 하고 뺨까지 때린다. 영화의 초반부, 우리는 주인공 강재훈의 실패를 눈앞에서 통감한다.   


예상치도 못한 직업적 실패로 넋이나간 그가 발견한 건 멀리 호주에 유학을 간 어린 아들이 보낸 그의 생일 축하카드다. 왠지모르게 구슬픈 생일 축하 기계음이 적막하게 그의 주위를 맴돈다. 이를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본 그는 거의 2년여만에 호주에 떨어져 살고있는 아내와 아들을 만나러 갈 결심을 한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더 암울하다. 실패로 무너진 강재훈을 위한 위로가 좀처럼 섞여있지 않다. 이미 한 번 추락한 그는 먼 호주까지 갔지만 여기서도 계속해서 추락한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은 낯설기만 하다. 2년여간 등한시 하면서 아내와 아들에게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이 생겨났다. 그가 알던 가족은 알게모르게 변한 것이다. 아내 옆에는 새로운 남자가 생겼고, 같이 살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아내의 삶의 생기를 목격한다. 잘 이해하고 있다고 여겼던 대상이 실은 전혀 잘 알지 못하는 대상으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이 순간 아내는 그에게 있어 그 어떤 대상보다 낯선 존재가 된다. 그는 낯선 땅에서 홀로 고립된다. 

수동적 자세를 탈피해 자주적으로 변모하는 강재훈의 아내 이수진(공효진)

또 그 이후의 전개는 워킹홀리데이를 하다가 사기를 당한 가엾은 여학생(안소희)과의 만남과 아내에게 새로 생긴 낯선 남자의 뒤를 쫓는 것으로부터 강재훈이 어떤 진실에 관해서 눈치를 채는 과정이다. 그리고 배신감을 느꼈던 아내의 진의를 어렴풋이나마 통감하고나서부터 이 영화의 전개는 급 선회된다. 


배신으로 한가득 모멸감을 느꼈을 그가, 아내의 진의는 정작 자신이 생각한 배신이 아니란 걸 한장의 종이를 통해 깨닫게 된다. 한껏 부풀어왔던 부정적인 감정과 기운들이 오해를 푸는 계기를 통해 단번에 해소된다. 말로 할 수 없었던 고통과 아픔을 그는 처절한 눈물로 쏟아낸다. 그는 난간에 걸터앉아 엉엉 운다. 뜻하지 않은 실패와 불행에 내몰렸던 그도 마지막으로 향할 수 있었던 최후의 안식처가 있었다. 그건 가족이었다. 


<싱글라이더>는 대사가 그렇게 많은 작품이 아니다. 이 영화는 대체로 관찰이 가득하다. 고즈넉한 배경 뒤로 한 인물의 쓸쓸한 고독감과 불안함 그리고 상실을 대사없이 묘사한다. 줌 인과 줌 아웃을 반복하며 구슬픈 표정 그리고 황망한 배경 속 홀로 서있는 주인공을 담은 장면만이 주로 오간다. 그 장면을 계속해서 바라보는 우리는 주인공 강재훈의 심정에 점점 동화된다. 말로는 다하지 못하는 슬픔이 고요한 시간 속에서 어떤 형태를 이루면서 차곡차곡 쌓인다. 그리고 이는 걷는 걸 통해서 표현된다. 복잡한 생각을 날리듯이, 머리로는 하기 힘든 의지를 행동으로 대신해서 표현한다. 계속 걷고 또 걸으면서 말이다. 

영화 <싱글라이더> 속 한 장면

이 영화는 어찌보면 로드무비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걷게 되며 깨닫는 사실과 그로인해 변화하는 격정이 이 영화의 힘이기 때문이다. 강재훈은 낯선 호주를 이리저리 쏘아다니면서 가족의 이면과 몰랐던 진의를 확인하게 된다. <싱글라이더>라는 제목은 이 순간 꽤 노골적으로 다가온다. 그를 따라 쉼없이 걷다보면, 어느새 뒤엉켰던 실타래가 사르르 풀려있다. 그게 때로는 우울하고 덧없어 보이며 화가나기도 하지만 멈추지 않고 걷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그가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는 삶에 지쳐 절박함이 간절했던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어 돌아온다. 


이주영 감독이 이 작품 <싱글라이더>를 통해 전하는 메시지를 나는 ‘뒤늦은 후회의 환기’라는 점으로 보았다. 삶을 다시 개조할 수 있을거라는 낙관적인 희망으로 가득한 우리에게 그녀가 전하는 메시지는 의미 깊다. 우리는 잘못된 선택을 뒤늦게나마 바로 잡고자 노력한다. 그렇지만 뒤늦게 실수를 고칠 수 있었다는 일말의 안도는 우리가 그리 나쁘거나 잘못된 지경에 다다르지 않았다는 자기 위로에 가깝다. 이는 어디까지나 타협이다. 나중에라도 과오를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은 위험하고 게으른 행동이다. 우리는 현재를 통해서만 선택을 강요당한다. 그 선택은 현실에 충실해야만 비로소 적확한 지침이 된다. 실수와 낙관이 겹겹이 쌓인다면 우리는 <싱글라이더>의 어느 한 장면을 우리 삶에 끼워맞춰야 될지도 모른다. 그건 꽤나 구슬픈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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