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큐어> / 구로사와 기요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큐어>는 시작부터 알맹이를 드러낸다. 주인공의 아내가 등장해 정신과 의사로 보이는 양반에게 푸른색 책 한 권을 건넨다. 책의 제목은 <푸른 수염>. 프랑스 작가 샤를르 페로가 17세기 무렵에 쓴 책인 <푸른 수염>은 압축해서 말하자면 절대로 열지 말아야 할 문을 열었을 때 마주하는 진실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책이다. 이 책의 내용과 관련해서 다양한 해석과 논지들이 오가지만 요는 이렇다. ‘주어진 일상을 전복시키지 말 것’, 만약 이를 어길 시엔 또 다른 진실을 마주할 것이라는 경고다.
경고라는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내리깔고 출발하는 <큐어>는 이 책에서 경고하는 바와 다를 바 없는 유사한 맥락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외양은 범죄를 밝혀내는 지극히 형사물 다운 출발이지만 그 끝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이 영화에는 반전이 있다.
미스테리한 사건이 연속해서 일어난다. 살인 사건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별개의 살인 사건이지만 죽은 피해자들에게서 한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피해자 모두 가슴팍에 X자 상처가 크게 새겨져 있다. 경찰은 범인들을 잡아 이에 대해 취조하지만 이렇다 할 접점이 발견되지 않는다. 발견되는 것이라고는 이들 모두 동기가 없고, 다소 얼빠진 얼굴로 사람을 죽인 것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다는 의문스러운 언사만 계속 되풀이한다는 점이다.
주인공인 형사 타카베(야쿠쇼 코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보통의 사건과는 다르다는 걸 짐작한다. 가해자들의 수상한 태도와 범행 내용 그리고 모두 하나같이 동기가 없는 점이 그 이유다. 감이 좋은 그는 보통 수사와는 다른 방법으로 수사를 진행한다. 친구인 정신 심리학 교수에게도 자문을 구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다 할 진전은 없다.
수사가 늘어지는 순간,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장르를 전복시킨다. 살인사건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미스테리가 영화 전반을 주무른다. 그는 재빠르게 범인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범인으로 등장하는 마미야(하기와라 마사토)는 자신에 대해서 기억이 일절 없다.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고 자신이 왜 이곳에 서있는지 조차 모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가 할 줄 아는 거라곤 의미 없는 말들을 계속해서 되풀이하는 것뿐이다. 그건 때론 혼잣말이고 때론 누군가에게 건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말은 단순한 자모들로 나열된 말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묵직하다. “당신은 누구야?”,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지?”. 정체성과 지금 이 순간에 대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그의 끝없는 반문은 처음 들었을 땐 무시할 수 있다. 그러나 지겨운 반문은 계속해서 반복될수록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의미를 갖게 된다.
마미야의 질문은 사회적 제도와 규율에 묶여 사는 보통 사람들의 정체성 근간을 뒤흔든다.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질문의 집요함에는 우리 사회가 정해놓은 규칙들이 얼마나 제멋대로의 생각이고 허구적인지 깨닫는 계기를 마련한다. 자유를 외치면서도 규율에 속박당해야만 하는 모순된 현실 사회의 이면을 꼬집는 질문이기도 하다.
인간은 본래가 동물이다. 거부할 수 없는 충동적인 본능이 이성 밑에 깔려있다. 그 안에는 파괴와 같은 다소 과격하고 지극히 짐승적인 본능이 도사린다. 마미야는 지금껏 만나온 사람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바탕으로 최면을 걸었다. 그는 직접 살인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그는 사람들의 내면에 있는 반 사회적이고, 본능에 충실할 수 있는 또 다른 그들 자신을 만날 기회를 부여한다. 최면에 걸린 가해자들은 자신의 내면 속 동물적인 감각과 파괴 의식에 사로잡힌다. 그렇기에 그들은 인간의 그 어떤 윤리의식과 동조 그리고 혼동 없이 자연스럽게 사람을 죽인다.
타카베는 마미야의 뒤를 캐면서 그의 방식과 수법에 대해 깨닫는다. 그는 형사로서 그에게 현혹되지 않고 정확하게 취조하여 그를 엄벌해야 한다. 하지만 포부와는 다르게 그 역시 마미야의 최면에 서서히 사로잡힌다. 타카베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일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를 그때그때 해소하지 못했다. 불우하게도 그의 아내는 정신 질환자다. 일련의 미스테리한 사건으로 인해 받는 정신적 스트레스는 안식처인 집에서도 여전했다. 그의 아내 역시 논리로는 도저히 설명하기 힘든 이상한 행동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그가 집에 돌아오면 비어있는 세탁기가 열심히 돌아가고 있다. 정신병인 아내의 짓이다. 그는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사소한 피로들로 점점 지쳐간다.
마미야는 타카베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그는 자신을 취조하려는 그에게 보다 지독한 최면을 건다. 타카베는 최면을 당하지 않으려고 정신을 바짝 차리지만 그럼에도 마미야의 최면에 조금씩 홀리게 된다.
결국 타카베는 마미야의 의도에 농락당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결국 극단적인 상황을 연출한다. 일부러 마미야를 놓아준다. 마미야는 감옥에서 탈출해 도주한다. 그리고 타카베는 자신의 의도에 따라 마미야와 대치하게 이른다. 마미야 역시 타카베의 의도를 알고 있다. 하지만 타카베는 마미야가 깨달은 의도를 뛰어넘는다. 그는 총을 꺼내어 마미야를 그 자리에서 죽인다.
이 순간, 타카베는 자신을 부정한 셈이 된다. 형사라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포기한 행동이다. 총을 꺼내고 주저 없이 마미야를 향해 쏘는 그의 모습은 흡사 영화의 첫 도입부, 마미야가 최면을 건 어떤 남자의 자연스러운 살인과 별 다를 바 없다. 달라진 건 죽은 시체에 X자 상처를 남기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결국 마미야는 그에 의해 산화되었지만 그가 남긴 주술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타카베에게 전해진 셈이다.
마미야를 죽이고 난 후, 타카베는 마미야의 방에서 어떤 음성 기록을 듣는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들이 되풀이되는 음성 기록에는 인간을 죽이고 칼로 사람을 치유하라는 등 괴상한 말들이 기록되어 있다. 타카베는 벙찐 표정으로 음성 메모를 듣는다. 그 다음 장면, 우리는 타카베가 전에 들린 적이 있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끝마치고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앞선 장면에서 스트레스로 인해 한 숨을 푹 쉬어가며 식사를 다 마치지 못하고 반납한 그의 행동과는 사뭇 달라진 그를 볼 수 있다. 사건이 해결됐기 때문일까?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타카베를 맞이했던 종업원의 거동이 수상하다. 그녀는 갑자기 칼을 들고 무서운 발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한다.
‘큐어’의 뜻은 ‘치료하다’라는 뜻이다.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치료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은 앞서 관찰한 <푸른 수염>의 진실과 밀접하다. 마지막 장면부의 음성 기록은 인간의 또 다른 진실을 마주하라는 의미에 가깝다. 사회적으로 속박한 인간이 아닌 본능과 감각에 충실한 인간을 맞이하라는 의미다. 그 의미에서의 치료가 <큐어>의 마지막에서 들을 수 있는 “칼로 사람을 치유하라”와 같은 말이다. 한 때 마미야에게 현혹된 타카베는 스스로를 최면에서 끊어냈다. 그를 죽임으로써 모든 게 해결된 것 같았다. 하지만 음성 기록을 들은 그는 또다시 최면에 사로잡힌다. 라이터의 불로 최면을 거는 마미야와 담배에 불을 붙여 식당 종업원에게 최면을 거는 그는 같은 사람이다. 타카베는 또 다른 마미야가 된 것이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히트작인 <큐어>는 이후의 그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끼쳐왔다. <절규>나 <회로> 등 전작 모두 <큐어>와 밀접한 작품들이다. 그는 공포라는 외양을 빌려와 인간의 내면에 집중적으로 파고든다. 일상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감춰진 내면세계를 그는 스크린을 통해 감각적으로 그렸다. 그리고 경각심 있는 어조를 담아 관객들을 향해 분명하게 전달한다. 우리는 우리를 잘 알고 있지 못하다고.
우리는 자신의 극히 일부만을 이해한다. 이성적인 사고는 정작 그와는 정반대인 인간 그 자체의 동물적인 본능에는 소홀하다. 이는 필시 지성을 가진 인간의 합의 아래 건조된 사회라는 규약이 그렇게 만드는 것일 테다. 이성이라는 말 역시 제도에 갇혀버린 편협적인 말일지도 모른다. 지성인적인 태도 또한 사회에서만 통용되는 거창한 태도일 수 있다. 우리의 내면 속에 가려진 진정한 자아를 찾는다는 건 인간이기를 버려야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큐어>의 과격한 내용을 그대로 따라 하라는 것이 감독의 의도가 아니다. <큐어>를 통해 깨달을 수 있는 바는 우리가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다소 감정에는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타카베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기만 했다. 그리고 그는 언제부턴가 자신을 잃었다. 우리가 앞서 보아온 그는 결말부의 그와 전혀 다른 사람이다. 이 순간은 놀랍게도 한순간이다. 우리는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이런 순간을 잘 견뎌낼 필요가 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 또한 어떤 사람으로 변할지 모른다. 정녕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자신일지는 몰라도 말이다. 파괴는 허무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