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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uruvuru Feb 06. 2017

태풍이 허락한 시간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

태풍으로 잠깐이나마 눈 감아볼 수 있었다. 지나간 기억과 눈에 맺힌 아쉬움을. 사사로운 감정들은 거세게 몰아치는 태풍 앞에선 정작 별 볼일 없는 것이었다. 때마침 쏟아진 마법같은 폭풍우에 그저 모든 걸 잊어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만이 당연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태풍은 한치의 양보도 없다. 매섭게 그리고 가차없이 몰아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과연 태풍이 지니는 어떤 면에 주목한걸까. 그가 영화의 전반적인 테마로 자연현상을 대입한 건 이례적이다. 또한 전개의 전환점으로서 태풍이라는 고착된 개념을 대입한 건 객관적인 의미에서 뻔하고 식상한 선택처럼 보인다. 하지만 <태풍이 지나가고>에서 태풍은 영화의 어떤 전환점을 이룰 거창한 의미로 둔갑되기 보다 그저 잠깐의 시간을 허락해준다는 우연한 매개임에 지나지않는 걸 알았을 때, 거세고 모질게만 느껴졌던 태풍의 고유한 속성은 조금 다르게 희석된다.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에서 태풍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어쩌면 그건 시간이고 여유이며 긴장이기도 하다. 가족이란 단위에서 이런 삼박자를 잊고 살아가던 주인공 료타의 가족에게 태풍은 아주 잠시동안의 시간을 쥐어주기 때문이다. 이 시간은 헤어진 가족에게 있어 조금 어색하다. 하지만 그들은 점점 익숙함에 무너지게 된다. ‘한 때는 가족이었지’가 아닌 ‘원래 가족이었어’와 같은 현재와 뒤바뀐 맥락이 지난 과거를 슬며시 들춰낸다. 가족은 잠깐이나마 모든 걸 잊고 지난 시절로 돌아가는 경험을 갖게 된다.


주인공 료타는 흥신소에서 일하는 소설 작가다. 글을 제법 잘 쓰지만 좀처럼 결과물이 나오지 않아 소설 테마의 취재 차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서 흥신소에서 일한다. 학생을 협박해 돈을 뜯거나 남의 뒤를 쫓아 돈이 될 만한 일에 필사적으로 붙는다. 또한 경마와 파칭코에 빠져 사는 그를 통해 우리는 료타가 왜 이혼을 한 것인지와 가정의 불화가 어떻게 퍼져 나왔을지에 대해 유추해볼 수 있다. 그는 영화 속에서 가장 못난 가장의 적나라한 예시로 묘사된다. 

하지만 그런 못난 그에게도 가족에 대한 미련은 여전하다. 누구보다 혈육인 아들을 사랑하며, 헤어진 아내에게도 겉잡을 수 없는 애정을 품고있다. 그저 표현을 다하지 못할 뿐. 그리고 가족이 와해된 것의 잘못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뉘우쳤을 뿐이다. 결국 후회에 막급한 그는 어떤 계획을 세운다. 어설프지만 다소 위험한 계획. 달에 한 번 만나는 아들을 위해 그리고 전처럼 가족간의 시간을 조금이나마 갖기 위해 아들을 친정으로 데리고 간다. 눈치 빠른 그의 어머니(키키 키린)는 아들의 의도를 짐작하고 이에 능청맞게 계획을 동조한다. 계획같지도 않게 무작정에 노골적이지만 우연히 몰아치는 태풍 덕에 그와 가족은 잊고 살았던 지난 날의 소중한 시간을 다시금 경험한다. 


고레에다 감독의 특징은 다분히 일상적인 이야기 안에서도 중요한 의미들을 곳곳에 포진시킨다는 점이다. 그는 숨겨진 함의를 통해 영화를 적극 환기시키는 감독이다. 하지만 그에겐 아쉬운점이 있었다. 그가 영화속에서 남기는 메시지와 의도가 좀처럼 읽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감독의 최고작으로 평가되는 <걸어도 걸어도>는 가족이 보내는 어떤 하루를 초점하지만 그 안에는 가족의 과거부터 서로 다른 가치관까지 복잡하고 미묘하게 얽혀있다. 한 번 보고는 이들 모두의 이야기와 의도를 파악하기 어렵다. 또한 배두나가 주연을 맡은 <공기 인형>은 설정 자체부터가 공상적이고 기괴하다. 그의 영화가 어렵고 다소 불친절해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비난은 이 때문이었다. 


반면 최근의 그는 조금 다른 행보를 보인다. <그래도 아버지가 된다>와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경우에는 이해를 위한 눈높이가 낮은 편이다. 설정이 파격적이고 흔한 건 아니지만 두 작품에는 공통적으로 의미있는 복선이나 눙치면서 둘러대는 불확실한 말들이 거의 없다. 그저 인물의 시선에 뒤따라가며 영화를 보기만해도 충분하다. 


이는 <태풍이 지나가고>에서 더 명확해졌다. 제목부터가 그렇다(원제는 <海よりもまだ深く> ‘바다보다 더 깊게’지만 공식 영제 그리고 한국 제목은 <After the storm>, <태풍이 지나가고>다). 태풍이라는 의도자체가 제목에 드러난 건 어쩌면 노골적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제목을 보고 개요를 훑어보면 이 영화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에 관해 대강 짐작해 볼 수 있다. 태풍이 불어 닥치는 어떤 장면을 통해 영화가 분기점을 맞이할 지도 모른다는 사실. 그리고 태풍이 오기 전 이야기 속에서 계속해서 태풍이 올거라는 소식을 접할 수 있는데 이는 때가 다가온 걸 알려주며 점층적인 구조를 십분 활용하겠다는 의도에 가깝다. 

결국 제목에서 짐작한 바와 같이 보기좋게 태풍과 의도가 겹쳐진다. 료타는 헤어진 아내 쿄코와 아들 싱고와 나란히 하루를 맞는다. 누구에게는 평범하지만 이들에게는 특별한 날이 되는 그런 하루. 익숙하지만 어색하고 이건 좀 아닌 것 같지만 당연해보이는 듯한 하루. 이들 가족은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바라보게 될 까. 영화는 태풍이 오고가는 저녁 밤을 통해 감정의 총량을 쏟아낸다. 


가족 셋이서 거센 비바람을 맞아가며 행복의 종이(복권)를 찾는 장면은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바가 가장 큰 장면이다. 혼자서는 그리고 서로의 노력으로도 해결하기 어렵던 이들을 짓누르던 감정의 무게가 매섭게 몰아치는 폭풍우를 통해 별 것 아니라는 듯 씻겨 내려간다. 오로지 비를 맞을 동안에만 온전히 이뤄지는 가족간의 행복한 시간. 잠시 동안 과거를 다녀온 듯한 마법같은 경험은 한 여름밤의 꿈처럼 우연하게 불어닥친 태풍에 의해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태풍이 지나가고 말끔해진 청명한 하늘 아래, 가족은 햇살의 따쓰한 기운을 맞으며 집을 나온다. 위에서 배웅하는 어머니와 그에 웃음지어 보이는 가족들. 태풍이 지나가면 맑은 하늘이 온다는 당연한 이치처럼 이들 가족이 밎이할 다음 날은 조금 더 따쓰할 것만 같아보인다. 

고레에다 감독은 극명한 분기점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대폭 전환시켰다. 태풍이란 매개는 상황만이 아닌 감정까지 전복시켰다. 노골적이지만 확실한 수단이었다. 영화를 다 본 우리 역시 이런 분기점에서 헤어나올수 없다. 태풍이 지나가고나서의 이야기를 자연스레 상상하게 된다. 이들 가족이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 그리고 이런 예측이 희망적일지에 관해서 말이다. 뒷 이야기는 알 수 없지만 맑게 갠 하늘과 웃으며 헤어진 가족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어떤 희망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희망은 매서운 바람을 타고 기분좋게 우리 주위를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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