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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uruvuru May 16. 2017

상처를 달래는 지독한 위로

영화 <두더지> / 소노 시온

소노 시온의 영화들은 대개 겉보기엔 더럽고 치사하고 역겨운 사회의 추악한 면면만을 물망 한 집합체처럼 보인다. 그의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어떤 죄악과 환멸은 평소 관객들이 바라보는 일상, 즉 양지와는 정반대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영화가 과장이 짙은 탓도 있다. 보통 일도 그럴듯하게 부풀리는 것이 그의 장기니까. 그의 영화들이 호불호가 심히 갈리는 이유기도 하듯이.


<차가운 열대어>는 그런 소노 시온식 과장이 절정으로 치달은 작품이었다. 관객과 평론의 감상이 꽤나 갈렸다. 2시간을 훌쩍 넘는 긴 러닝타임 동안 소노 시온은 사람들 내면 속에 도사리는 ‘사이코 패스’적인 기질과 사람을 보다 추악하게 만드는 사회의 보이지 않는 힘만을 묘사했다. 사람으로 미쳐가고, 사회라는 규약에서 더욱 미쳐갈 수밖에 없는 일련의 상황을 통해, 그는 영화 속에서 기존의 인간관계를 전복시켰다. 그 안에서 ‘잔혹감’이 피어났다. 인물들은 광기에 침식당했다.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도덕과 윤리, 인간의 기본적인 정서는 무용지물이 됐다. 

소노 시온은 피 튀겨가는 장면들과 섬뜩할 정도로 매끈한 내장들로 관객들의 역겨움을 부추긴다. 관객은 이에 눈을 질끈 감는다. 보기 흉한 장면들이 곳곳에 삽입되는 건 그의 유별난 B급 정서의 집착에 가깝다. 주류 장르에서 벗어난 이상 소노 시온은 대중의 공감을 사기 어렵다. 하지만 <올드보이>풍으로 대변되는 거친 실소와 경악을 머금은 상극의 해학은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인간의 기본 정서를 크게 뒤틀게 만들기도 한다.

 

소노 시온식 이야기는 끝없이 물고 물리는 악조건이 편재한다. 영화 속 인물들은 망가지기만을 거듭한다. 전화위복 같은 좋은 이야기는 거의 없다. 저항을 하긴 하지만 저항으로 그친다. 망가지고 망가져서 다 부서진 다음에야 남는 허무함으로 결말을 달래고 그제서야 의도를 환기한다. 모든 게 끝이라는 식으로 조용히 크레딧을 내린다. 소노 시온의 공식이다. 

후루야 미노루의 원작 만화 <두더지>는 소노 시온과 여러모로 닮은꼴의 작품이었다. 후루야 미노루의 어둡고 캄캄한 그늘진 묘사는 소노 시온이 지향하는 바와 닮은꼴이었다. <두더지>는 둘의 공통점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소노 시온은 <두더지>를 만들면서 전혀 다른 노선을 탔다. 제작 과정에서 3.11 관동 대지진이 일어났다. 그는 시나리오를 수정했다. 원작 만화 <두더지>의 미스터리한 내용 일부와 결말을 대폭 수정하고 철저하게 현실 문제로 환원하는 쪽을 선택했다. 


새롭게 해석된 만큼 원작 <두더지>와 영화 <두더지>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었다. 소노 시온은 후루야 미노루를 애써 부정했다. 이는 자신마저 부정하겠다는 의미다. 물론 그의 기존 작품들과 유사한 면도 없지 않아 있다. <두더지> 역시 여느 작품처럼 주인공에게 가혹하다. 철저하게 부숴서 내몰아가는 건 여전했다. 그러나 그는 주저앉은 주인공을 어떻게든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아등바등한다. 분명한 차이다. 

주인공 스미다는 평범하게 사는 게 소원이다. 자신의 기구한 운명 때문이다. 그는 판잣집에서 보트를 빌려주는 일을 하며 근근이 살고 있다. 어디까지나 근근하게다. 그런데 어머니는 갑자기 모르는 남자와 눈 맞아서 집을 나간다. 아버지는 허구한 날 집에 와서 폭력을 휘두른다. 야쿠자는 아버지의 빚을 덜미로 집에 와서 깽판을 치기도 한다. 그는 결국 학교마저 못가는 처지로 전락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아버지의 폭언과 폭력에 못 이기고 엉겁결에 아버지를 죽이고 만다. 그는 오싹하다. 아버지를 죽였다는 책 잡힌 마음도 있다. 하지만 이보다는 더 이상 자신은 사람으로서 누릴 수 있는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평범하지 않다. 살인자 딱지가 붙는다. 아버지를 죽였다. 결코 뗄 수 없는 딱지다. 


그는 죽고 싶다. 기왕 죽을 거 세상에 남아있는 나쁜 놈 하나 잡아 죽이고 죽고 싶다. 그렇게라도 이 세상과 합의를 보고 떠나고 싶다. 그런데 쉽지 않다. 소노 시온이 설정한 난관이 그의 발목을 붙잡는다. 

스미다의 옆에는 늘 사람들이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없었지만 남인 그들은 있었다. 갈 곳 잃은 부랑민이다. 지진으로 갈 곳을 잃은 그들은 이전에 스미다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들은 그 어떤 계산도 없이 손을 건네준 스미다를 보며 희망을 떠올렸다. 저주할만한 현실에 일찍이 절망한 스미다를 보고 있으면 그들의 마음은 저릿하다. 마치 자기 일인 것 마냥 아프다. 그들은 어떻게든 스미다에게 희망이란 걸 도로 되찾아주고 싶다. 스미다는 그들에게 있어 아직 앞날이 밝은 희망이자 미래다. 


스미다가 기울어갈 때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붙잡고 다시 일으켜 세운다. 억지로라도 그의 엇나간 균형을 맞춘다. 스미다는 이게 조금 석연치 않다. 불편해 죽겠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눈물 나게 미안하고 고맙다. 부모에게 받아본 적 없는 따뜻함이다. 닭똥 같은 눈물이 그의 뺨 위를 슬며시 타고 흐른다. 그는 한참을 생각한다. 그리고 결심한다. 저 멀리 묻혀있던 어떤 선택지에 다가간다. 힘들어도 다시 살아가겠다는 선택지다. 

새벽 동이 틀 무렵, 그는 무턱대고 달리기 시작한다. 옆에서 늘 그를 도와주던 동급생 치자와는 그에게 ‘살아라’라고 소리친다. 스미다는 그녀의 말을 들을 때마다 더욱더 힘차게 달린다. 점점 삶을 타개해 나간다. 소노 시온의 <두더지>는 이 장면만으로도 충분히 설명 가능한 작품이다. 스미다는 곧 우리다. 한 번쯤 상처 입고 좌절했던 우리를 상징한다. 스미다의 재기는 우리의 재기를 상징한다. 상처 입어 무너져도 다시 살아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소노 시온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두더지>의 결말은 낯설기만 하다. 무언가를 딛고 일어선다는 건 그의 영화에서 전무한 장면이었다. 파괴와 파괴. 끝도 없이 헐뜯는 장면을 통해 소노 시온은 늘 우리 내면의 끝에 걸린 추악함만을 물망 했다. 하지만 <두더지>는 파괴 끝에도 희망이 있음을 알려준다. 우리 모두 스미다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3.11 지진으로 아픔이 채 가시지 않은 사람들에게 <두더지>는 곡진한 위로가 되는 작품이다. 소노 시온의 해맑은 서사는 어색하지만 이런 결말은 언제나 반갑고 눈물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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