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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uruvuru May 08. 2017

실사화의 대표적 오류, 영화 <공각기동대>

영화 <공각기동대> / 루퍼스 샌더스

제목은 같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 영화 <공각기동대>의 이야기다. 동명 원작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지극히 헐리우드 다운 방식으로 채색됐다. <공각기동대 Ghost In The Shell>(1995)이 자국인 일본의 입장에서 바라본 근미래 ‘네오도쿄’를 세세하고 정밀한 풍광으로 재현했다면, 영화 <공각기동대>는 서양권에서 바라본 동양권의 경외가 곳곳에 투영한다. 유독 강조하는 듯한 서양권의 동경코드인 ‘사무라이’, 즉 와풍으로 대표되는 일본문화를 세련스레 풀어냈다. 정작 애니메이션은 이러한 코드를 철저히 배제하고 음울한 디스토피아에 의존했다면, 영화는 이와 정반대의 노선을 탄 것이다. 하지만 유독 으스대는 듯한 문화 고증은 헐리우드의 강점을 드러내나 전작과의 괴리를 지울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헐리우드식 해석은 배경묘사에 그치지 않았다. 연출부분에서도 적극 드러났다. 영화 속 재현된 몇몇 장면들은 제작진이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분명해 보인다. 실사화로 무대를 옮겨가며 팬들의 근심을 자아냈던 애니메이션 속 극사실주의 연출을 그대로 모사한 건 합격점을 줄만하다. 원작 재현 수준이 상상이상으로 상향되었음을 증명하는 바다.

그러나 영화는 헐리우드 공정을 거치면서 정작 <공각기동대>를 대표하는 코드를 계승하지 못했다. 이는 일본인 특유의 정서에 기반한 ‘오타쿠 정신’ 결여라고 말할 수 있다. 정확히는 오타쿠 정신이라는 일본인 특유의 집념과 작품에 대한 고찰이 영화에 없다. 일본이 전세계적인 미디어 시장을 구축해나가면서 이야기의 외연과 상상력을 확장해나갈 때, 그들은 그들의 확장과 더불어 작품의 깊이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버릇이 있었다. 대중성을 고려하면 상대적으로 전연령대에 걸맞는 엔터테인먼트식의 작품을 양산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당시 그들은 그걸 바라지 않았다. 대중적으로 지평을 연 것은 보다 나중의 일이다. 90년대의 그들은 하나의 작품을 만들더라도 그에 대한 철학적인 고민과 더불어 이야기와 사회를 결부시키길 바랬다. 그것을 가장 큰 가치로 여겼다. 그들의 ‘모노즈쿠리 정신’이 미디어 시장에 분명하던 때다.


<공각기동대 Ghost In The Shell>(1995)은 그런 당대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작품 중 하나로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작품 중 하나다. 아날로그 시대정신이 디지털 시대로 점점 흡입되던 때라 시기적으로도 잘 맞아 떨어졌다. 기존의 애니메이션을 상회하는 그들의 연출력도 한 몫을 했다. 그러나 루퍼스 샌더스가 제작한 영화 <공각기동대>는 시대정신이 결여된 작품이다. 깊이가 일절 없는 작품이 만들어졌다. 오로지 엔터테인먼트로서 작동되도록 만들었다. <공각기동대>라는 이름을 빌렸지만 흥행에 처참히 실패하고 말았다.

원작에 대한 이해도가 현저하게 떨어지지만 그럼에도 영화는 나름 고민한 흔적이 있어 보인다. 주인공 쿠사나기 모토코 역으로 스칼렛 요한슨을 캐스팅한 것을 두고 영화계는 ‘화이트 워시’ 논란을 제기했다. 캐스팅이 윤리적인 문제로서 점점 커지자 영화는 이를 두고 시나리오를 각색하여 합리점을 찾았다. 결국 이는 원작과 전혀 다른 오리지널 스토리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했다. 문제를 두고 대처하는 그들의 기민한 처사는 칭찬할만 하다. 그러나 영화는 이 때문에 1차원적인 이야기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주인공(쿠사나기 모토코 역) ‘메이저’는 몸은 로봇, 정신은 인간이다. 그녀는 사고를 당해 뇌를 제외한 모든 몸을 잃었다. 그녀가 살기 위해선 로봇에 뇌를 이식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그녀는 죽지 않았다. 그러나 살아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녀는 이도저도 아닌 자신의 존재에 의문을 품는다. 주어진 임무는 생각을 잊게 만들지만 한편으로 점점 느끼는 어떤 기시감은 그녀를 더욱 의문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또 공안 9과의 팀원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녀는 인간적으로 접근해야 할지 혹은 로봇으로서 접근해야할지 갈피를 못잡는다. 그녀는 그저 가슴 한 켠으로 거대한 의문을 품은 채, 그녀를 만든 기업 ‘한카(작중 등장하는 기업 이름)’의 생명유지 약을 처방받으며 하루하루 연명해간다.  

영화는 그녀의 고민에 적극 포커스를 맞춘다. 명확히 할 수 없는 그녀의 모순된 존재에 대해 같이 깊게 고민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실사화의 덫에 빠진 이 영화는 그런 철학적인 깊이를 좀처럼 환기하지 못하고, 자꾸만 고민을 휴머니티로 무마시키려고 한다. 이는 메이저를 만든 기업인 한카가 적으로 상정되면서 부터다. 로봇몸의 인간인 그녀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희생을 감행한 한카의 비윤리적인 행위를 고발하며 영화 속 거대악으로 분류한다. 이 다음의 이야기는 뻔하다. 거대 악으로 상정된 한카를 엄벌하면 이야기는 끝이난다. 영화가 지극히 1차원적인 구도로 무대를 옮겨온 것이다. 작중 언뜻 존재감을 드러낸 테러리스트 쿠제의 존재와 공안 9과의 조직적 이념과 의의는 전부 상실된다. 오로지 정의구현을 위해 악을 엄벌하는 것에 집중해 영화 속 모든 갈등을 무마시킨다.


영화는 이에 대한 효과적인 처방으로 메이저에게 사실 가족이 있으며, 그녀는 가련한 피해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적극 피력한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이 ‘쿠사나기 모토코’라는 걸 드러내어 화이트 워시 논란을 잠재운다. 이 같은 부연은 제작진의 선택을 합리화 시켰지만 정작 원작과는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가 되어 괴리를 느끼는 부분이기도 하다. 또 어떻게든 원작과의 접점을 만들고자 하려는 제작진의 욕심은 <공각기동대 Ghost In The Shell>(1995)의 연출과 더불어 TV 애니메이션 영역까지 뻗쳤다. 작중 등장하는 쿠제 히데오는 <공각기동대 Stand Alone Complex 2nd GIG> 애니메이션 2기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일련의 노력은 결코 영화를 평가하는 후한 요소가 안된다. 루퍼스 샌더스의 <공각기동대>는 간과한게 너무 많다. 오락으로서의 재미는 보장할지 모르지만 정작 작품으로서의 평가에 점수를 기대하면 안된다. 차라리 원작을 빌려오지 않고, 오리지널 이야기로 진행되었으면 더욱 낳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게 하더라도 이야기가 진부한 건 사실이다. 굳이 원작을 펌훼하면서까지 막대한 비용을 쏟아서 리스크를 감행한 건 너무 무모한 시도였다. 영화는 아라마키(기타노 다케시)의 일본어와 작중인물들의 영어의 어설픈 혼재처럼 머리가 아플정도로 어설프다.


이전에 토리야마 아키라의 <드래곤볼>이 헐리우드 실사화 <드래곤볼 에볼루션>으로 거듭나면서 혁신적인 퇴행을 보여준 것처럼, 영화 <공각기동대> 역시 20년의 세월을 거슬러 혁신에 가까운 퇴행을 선보였다. 실사화는 우리에게 있어 늘 기대 반과 걱정 반이 사무치는 두근거림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루퍼스 샌더스가 최악의 실패를 갱신함으로써 향후 실사화 될 작품들에 역시 영화 <공각기동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 탁월한 면면들은 또 다른 탁월한 변주들을 양산하는 영감으로 작용하지만 현실이 이래서야.. 실사화에 대한 기대는 지워야 될지도 모른다. 실패를 딛고 일어설 작품을 기대하기엔 우리는 이미 실사화의 수많은 실패에 노출되어 왔다. 이제는 정말 한계다. 팬들이 언제까지나 맹목적으로 헌신할 거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각성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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