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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uruvuru May 04. 2017

언론의 '정의'란, 영화 <스포트라이트>

영화 <스포트라이트> /  토마스 맥카시

“도대체 언제쯤 이 사실을 공표할 겁니까” 남자는 절박한 어조로 물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기자가 대답했다. “저번에도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남자가 일갈했다. 기자는 잠시 말이 없다. “이번에는 정말..” 기자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이게 벌써 몇 년째인지 아세요?” 남자가 글썽이기 시작했다. 


영화 <스포트라이트>의 한 대목이다. 남자가 말하는 ‘사실’이란 성폭력 사건을 뜻한다. 남자는 어릴 적 교회의 신부에게 성폭력을 당했다. 그것도 여럿차례나. 그로부터 한참이 지났지만 지울 수 없는 끔찍한 기억에 시달리다 남자는 결국 용기를 내어 언론사를 찾았다. 교회와 신부를 고발하는 증언과 사실 내용을 모아 그들에게 전달했다. 그게 벌써 몇 년째다. 그러나 한 참이 지났는데도 딱히 이렇다 할 고발 기사가 나오지 않았다. 기자들은 이 사건이 중대한 사실임을 일찍부터 알았으나, 너무 민감한 사안이라거나, 당장 보도로 만들기에는 자료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번번이 외면했다. 남자는 돌아버리기 직전이다. 그는 기어코 눈물까지 글썽인다. 

영화 속 해당 장면은 언론의 역할을 재고하게 만든다. 나아가 언론의 현 위치와 기자들의 직업의식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든다. 예나 지금이나 언론은 자본에 숭상할 수밖에 없는 철저한 ‘어웨이’다. 그들의 취재와 보도는 세상을 밝히는 횃불이지만, 정작 횃불의 재료는 그들(언론)이 먹이로 삼는 자본을 통해 제공된다. 무심코 꼬리를 물었더니 자기 몸뚱아리였던 셈이다. 우로보로스의 역설이다. 언론의 위치는 이렇다. 


기자들도 괴롭다. 그들 역시 피해자들의 이야기에 적극 귀 기울이고 싶다. 가능하면 그들의 바램처럼 고발하고 싶다. 그러나 그들은 그럴 수 없다. 기자이기 때문이다. 과연 종교에 맞서 싸울 수 있을까? 그들은 그들 자신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다. 그들이 믿지 못하는 건 몸 담은 매체의 힘이다. 개인이야 어찌 됐든 개인의 의지만으로도 굴러갈 수 있다. 그러나 매체는 그렇지 않다. 돈과 거대한 힘이 있어야만 힘차게 굴러갈 수 있다. 매체의 동력은 현대사회의 자본력과 직결된다. 종교를 고발한다는 건, 그들이 몸 담은 매체와 사회의 연결고리를 하나 둘 끊어가겠다는 신호탄이다. 매체의 밥줄 그리고 스스로의 밥줄까지 끊겠다는 이야기다. 

기자들의 가치관을 다루는 천칭에는 두 가지 가치가 오고 간다. 하나는 그들의 직업윤리. 또 하나는 그들의 직업적 영속 가능성이다. 자칫하다 기사 하나 잘 못 써서 영영 업계에 발을 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 더구나 종교라는 거대한 단체를 상대로 고소라도 먹었을 땐,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기자들은 여러모로 난처하다. 소신은 다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하고, 당장의 밥벌이가 중요하기도 하다. 그들은 몇 번이고 양측의 무게를 가늠한다. 그리고 선택한다. 현안에 눈을 감고, 다른 사건으로 눈을 돌리기로. 


어느 날, 워싱턴포스트에 새로운 편집장이 취임한다. 그는 새로운 인사만큼 조직의 구조적 병폐를 짐작한다. 그는 서서히 개혁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새로운 편집장의 단행, 별 거 없다. 그간 외면했거나, 놓쳐서 일정 부분 타협했던 사실들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자는 원론적인 지침을 주문할 뿐이다. 다만, 강단 있다. 특종팀에게 한 때 취재를 전면적으로 덮었던 신부들과 관련된 성폭행을 다시 취재하도록 지시한다. 회사의 안위와 더불어 몸을 사렸던 기자들은 툴툴대기도 하지만 편집장의 대찬 지휘 아래 얼떨떨하게 수긍하고 자성한다. 그렇게 특종팀은 멈췄던 수사에 적극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이 뒤의 이야기는 사건에 점점 다가가는 기자들의 취재 열기를 시간순으로 담아냈다. 비슷한 작품이라면 어디서나 볼법한 기자들의 평범한 취재 장면이지만 일련의 장면은 우리를 각성시킨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심각할 정도로 결여된 기자들의 직업의식이 그들에게는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밤낮없이 일에 몰두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프로의 면모를 발견한다. 기자와 언론이 환멸의 대상으로 전락해서 더욱 그렇게 보이는 것도 있다. <스포트라이트>는 한 때 책임을 회피했던 기자들의 직업의식의 공백을 서서히 메워가면서 언론의 본질과 언론이 정의의 창으로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생동감 있게 전달한다. 


보도에 대한 그들의 열의는 이윽고 완성된 보도로 정립된다. 기자들의 악착같은 집요함이 만들어낸 결실이다. 이제 기사를 통해 고발할 일만 남았다. 그러나 그전에, 그들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성찰이다. 그들은 이전부터 이 사안의 경중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상자를 열지 않았다. 무섭다고 방치해두었다. 상자 속에는 일찍이 신부들의 성폭력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지옥도를 그리고 있었다. 피해자들의 고통은 결국 기사화되었지만, 이들이 견뎌온 시간의 무게는 기자들이 함부로 함구할 정도로 결코 가벼운 사안이 아니었다. 그들은 직업의식을 잊고 타협한 스스로를 규탄한다. 제일 먼저 데스크가 고백한다. 모든 것은 자신의 탓이라고 고백한다. 사실 그 만의 잘못은 아니다. 언론의 잘못이다. 나아가 언론을 옥죄는 사회 구조의 잘못이기도 하다. 

신문으로 완성된 보도는 새벽 일찍 각지로 배부되기 시작한다. 기자들은 이를 숨죽여 지켜본다. 그들의 기사는 세상을 바꿔 놓을 것이다. 그들의 기사는 민감한 단어와 사실들로 가득한 만큼, 힘이 분명하다. 전례 없는 스캔들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판도라를 연 것일지도 모른다. 기사를 통해 바뀔 세상은 상자의 깊이만큼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다. 하지만 결코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얼굴이 말한다. 그들은 소명을 다했다고 믿는다. 한 때, 눈 감고 귀를 닫기 바쁘던 그들은 그제야 비로소 살아있음을 실감한다. 


언론이 제 역할을 다하는 순간이 영화의 마지막에 있었다. 사회를 바로잡는 정의의 창이 구현되는 순간이었다. 정의의 창이라는 교과서적인 말은 여전히 딱딱하기만 하다. 그러나 결코 멀리 있는 말은 아니었다. 늘 곁에 있는 말이었다. 다만, 외면했을 뿐이다. 특종팀은 이를 바로잡았다. 그들은 한 걸음 나아갔다.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은 어쩌면 생각 외로 간단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려울지도 모른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 경계 속에서 우리는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고민한 것처럼 말이다.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 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거기에 정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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