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uruvuru Apr 30. 2017

송강호로 보는 <밀정>

영화 <밀정> / 김지운 감독 

일본 경부 이정출(송강호)

“이대로는 안 되겠다” 송강호의 표정이 말했다. 송강호가 말한 게 아니다. 그의 표정이 말을 했다. 웃기지 않나? 표정이 말을 한다니. 그런데 그는 정말 표정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진짜 큰일임을 암시하는 송강호 특유의 표정이었다. 당혹감이 감춰지지 않는 그런 표정. 영화 <밀정>에서 송강호의 얼굴은 내내 이렇다. 그는 늘 선택의 갈림길에 있기 때문이다. 그의 출신 그리고 그의 입장 때문이다. 영화 속 상황이 그에게 참 거시기하다. <밀정>에서 송강호는 끊임없이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비운의 캐릭터를 연기했다. 


김지운 감독의 영화 <밀정>은 일제 강점기의 일본 총독부와 독립군 ‘의열단’의 항쟁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밀정>은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여기서 송강호는 친일파 경감 역 이정출을 연기했다. 이정출은 조국을 척진 ‘매국노’로 일본의 앞잡이다. 

독립투쟁의 서사를 다루는 영화들은 하나같이 선과 악의 구분이 명확하다. 독립군을 선으로 일본을 악으로 묘사한다. 피해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를 거스르거나 반박해서 양국의 위치를 반전시키는 그런 시나리오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시대는 그 어느 시대보다 피아가 확실하고 목적이 뚜렷하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반발은 물론이고 팔리지 않게 된다. 워낙 민감하기 때문이다. 


민감한 시대상을 연출하는 영화는 한없이 조심스럽고 신중하기 마련이다. 역사적 사건을 적극 환기한다는 점은 관객에게 더없이 유익하지만 영화는 사실관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과장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결여되서도 안된다. 그 자체로 역사 왜곡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리스크가 다분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를 타개할 나름의 방법은 있다. 역으로 당대의 상황을 이용하면 된다. 일제 강점기의 특수성은 사안이 민감한 만큼 카타르시스가 확실하다는 점이다. 즉, 식민의 고통을 확실하게 분출하면 된다. 이를테면 독립운동을 더욱 격렬하게 표현하거나 복수를 확실하게 하는 것 등. 이야기마다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요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끔 만드는 것이다. 

전지현 주연의 영화 <암살>  / 최동훈 감독

긴박한 서사와 이를 수놓는 짜릿한 액션 그리고 배우들의 절묘한 조화가 어우러져 <암살>은 그 여느 작품 이상으로 관객에게 재미를 주었다. 명확한 선과 악의 대립. 또 그 안의 적절한 드라마를 통해 확인하는 역사적 사실들. <암살>은 이 모든 걸 두루 갖춘 대찬 영화다. 하지만 한계가 분명한 영화기도 하다. <암살>은 추후에 기록될 작품으로서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사실 그렇게 탁월한 영화가 아니다. <암살>은 어디까지나 엔터테인먼트에 치중한 영화다. 일제 강점을 현대식으로 풀어 묘사하면서 관객에게 전에 없던 당대의 심미안을 심어주고, 재미까지 적극 보장한 건 사실이지만 이야기가 너무 직선적이며 동시에 진부하게 다가오는 건 이 영화가 좀처럼 벗지 못하는 한계다. 더구나 상업적인 부분을 과하게 의식한 나머지, 전개에 굳이 필요 없어도 될 부분을 대거 집어넣고 말았다. 여러모로 훌륭한 영화는 맞지만 기억할만한 영화라고 보기 어렵다. 


김지운 감독의 고민은 바로 이 지점이다. <암살>과 비슷한 방향을 잡을 거라면 애시당초 영화를 만들 이유가 없었다. 제목만 다르면 뭐하나. 알맹이가 같은데. 김지운 감독은 차별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도 그는 발견했다. 일제 강점이라는 딱딱한 프레임에서 어떤 ‘틈’을 발견한 것이다. 이는 ‘감정’이란 틈이다. 

<밀정>은 감정으로 움직이는 영화다. 그 가운데 이정출이 있다. 더 깊숙이는 이정출의 감정이 있다. 이정출의 감정이 향하는 방향이 바로 <밀정>의 지향점이다. 그의 흔들림은 <밀정>을 아슬아슬하게 만들고, 그의 각 잡힌 마음은 <밀정>을 뚜렷하게 만든다. 그는 조국을 척진 일본 경찰이다. 매국노다. 그렇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마음까지 내준 적은 없었다. 이는 영화의 초반부, 그의 행동과 표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옛 벗인 독립열사 김장옥과의 대치 장면에서 이정출이란 인간의 면모가 드러난다. 김장옥을 잡는 것이 그의 일이다. 나아가 김장옥을 괴롭히고 괴롭혀서 독립군의 뿌리를 뽑는 것이 일본 경찰로서의 그의 역할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옛 벗인 김장옥에게 그 정도로 잔혹해지지 않았다. 그는 계속 김장옥을 회유한다. “나가면 살 수 있어”. 그는 옛 벗의 목숨을 유린하면서 까지 일본에 아첨하고 싶지는 않았다. 


영혼까지 넘기지 않은 이정출은 겉으로는 각 잡힌 친일파 경부를 연기하지만 알맹이만큼은 나름 섬세한 인간이다. 그렇기에 일본의 밀정을 자처했지만 의열단의 회유에 점점 무너지게 된다. 그 역시 조선인인 것이다. 여기엔 분명 김우진(공유)과 정채산(이병헌)의 공이 상당하다. 좀처럼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에게 손을 내밀고 갖은 방법을 동원해 그를 흔들어 놨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정출은 양쪽의 경계에서 정체성을 헤매는 인간임은 확실하지만 그의 행동은 전부 그의 의지에서 비롯한다는 점이다. 이는 영화 속에서 이정출의 변심과 그의 갈등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결정은 항상 그의 몫이었다. 

양국의 사이에서 자꾸 곤혹을 치르는 이정출은 표정으로 자신의 심정을 대변한다. 주름과 눈 사이의 선명한 행간이 그의 의지와 번뇌를 번갈아 묘사한다. 이 장면마다 이정출-송강호의 얼굴은 선명하게 클로즈업되곤 하는데, 그때 스크린을 향해 던지던 시선은 자꾸 거시적으로 확대된다. 되려 관객에게 반문하는 듯 곤혹을 치르는 우리의 얼굴을 겹쳐보게 만든다. 이정출의 표정은 우리의 표정을 상징한다. 거짓과 위선이 난무하는 이 사회에서 응당 해야 될 가치들의 무게에 자꾸 휘둘리는 우리들의 곤혹스러운 얼굴이 영화 속 이정출을 경유해 표현된 것이다. 


<밀정>은 정체를 잃어버린 한 인간의 스탠스를 추적한다.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묘연한 비탈길에서 고통받는 개인을 주목했다. 동시에 감정이라는 격렬한 격동에 집중하기도 했다. 이정출은 감정이 이끄는 곳으로 몸을 맡겼다. 실리로 점철된 길이 아닌 사람과 사람으로 이어지는 뜨거운 선택을 했다. 삶과 이상의 저울질 끝에 이상을 택했다. 한 때 모든 걸 팽개치고 눈과 귀를 닫았던 어리석었던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뀌었다. 이정출의 변화는 시사한다. 당대의 친일파와 독립열사 사이에서, 일본과 조국의 사이에서 살기 위해 무얼 해야만 했는지. 하지만 동시에 묻는다. 진정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무얼 해야 했는지를. 이 질문은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무얼 보고 있는가? 무얼 느끼고 있는가? 스스로의 확신에 기대어 있는가?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것만은 확실하게 알 것 같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걸. 

작가의 이전글 구로사와 기요시의 비현실 묘사, <회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