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회로> / 구로사와 기요시
구로사와 기요시의 <회로>는 그의 작품들 가운데서 가장 큰 규모의 세계관을 자랑한다. 얼추 보기엔 한 집단의 미스터리한 관계와 사건을 묘사하는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회로>는 난데없이 규모를 국가단위로 확장시키고, 나아가 세계로까지 확장시킨다. <회로>가 개봉한 2001년. 애니메이션 업계를 주름잡은 주류 장르인 ‘세카이물’을 영화에 구현한 것이다. 전작인 <큐어>가 옴진리교 사건과 시간대를 나란히 했던 것처럼, 구로사와 기요시는 <회로>역시 당대의 화제와 문제들을 영화로 구현해 대중과 눈을 맞추고 싶어했다.
의도는 좋다. <큐어>를 통해 그의 커리어가 방점을 찍은 이유는 <큐어> 그 자체가 만듦새가 훌륭해서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현실문제를 관객으로 하여금 재환원시키고, 새로운 해석과 논지들을 덧붙이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가 이해를 바랄 수 없는 옴진리교 사건을 사람들은 기요시의 <큐어>를 통해 좀 더 다각도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는 대중을 위한 등대인 동시에 위로로 작용하기도 했다.
<회로>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 역시 <큐어>를 만든 의도와는 별반 차이가 없다. <주온>이나 <사다코>같이 괴스러운 장면에만 집중해서 관객을 공포로 몰아넣는 건 구로사와 기요시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는 구태여 장르를 한정시킬 마음이 없었다. 그는 영화에는 여러 사실관계들과 이해들이 복잡하게 얽히길 바라는 사람이다.
세카이물은 비교적 작은 단위의 소집단적인 문제나 외부적인 상황과의 갈등을 초점으로 서서히 외형을 확장해나가는 장르다. 이를테면 외부의 적과 개인의 대치를 쟁점으로 묘사한 <에반게리온>이나 <최종병기 그녀>와 같은 애니메이션이다. 이같은 애니들은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다. 앞서 말한 이야기의 서술구조는 물론이고, 설명의 부재다. 맥락에 구멍을 만들어 작품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은 일본의 경제 대공황과 옴진리교를 비롯한 여러 비논리적인 사회현상들에 끊임없이 괴롭힘 당하던 시기다. 사실논리에 입각한 경제논리는 일본의 경제를 정확하게 논파하지 못했다. 또 자꾸만 사이비 종교적인 맥락으로밖에 설명되지 않는 사회문제는 사람들을 불안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들은 해석에 목말라했다. 무엇이든 좋으니까 적당한 이유와 그럴듯한 사실들이 뒤따르길 바랬다. 만일 그것마저 불가능하다면 그들은 그 어떤 의견이든 좋으니, 마구잡이로 해석되길 바랬다. 이 같은 바램은 곧 미디어 시장을 가격했다. 가장 먼저 구현된 건 일본의 거대 시장인 애니메이션 시장이었다. 세카이물이 주류 장르로 굳혀진 건 이런 이유다.
세카이물은 기본적으로 해석이 필요한 장르다. 정확히는 해석에 여지를 남기는 작품이다. 하나같이 베일에 가려져있기 때문이다. 도대체가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꼭 이유가 필요한 것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모든 걸 보는이들의 해석과 추측에 떠넘긴다. 애시당초 설명할 생각이 없는 거다. 제작 기획 단계에서부터 맥락에 구멍을 뚫기로 상정한 것이다. 기요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구태여 설명하지 않았다. 이유를 감췄다. 공포가 무지에서 입각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그에게 있어 어찌보면 더할나위 없는 장르였고 알맞은 시기이기도 했다.
<회로>는 설명을 통채로 날린 영화다. 마지막에 가서야 그나마 <회로>가 말하고자 하는 본질에 다가갈 수 있지만 어찌됐든 불친절한 건 매한가지다. 공포영화라는 게 대체로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지만 마냥 오컬트에 기대어 액소시즘으로 무마시키는 건 관객으로선 석연치 않다. 그렇다고 <회로>가 기존의 오컬트 작품과 거리가 가까운 것도 아니다. 여러모로 방향성이 참 아쉽기도 하다.
사람들이 자꾸만 이상해져가는 일련의 상황을 컴퓨터와 컴퓨팅 언어 그리고 이와 연결되는 네트워크 세계에 영감받아 표현한 건 신선한 시도였다. 영화의 장면마다 연출되는 컴퓨터의 미스테리한 반응과 귀신들의 괴스러운 행동은 굉장히 섬뜩했다. 연출 하나는 대단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쉬운 건 방대한 설정이 계속해서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구태여 공간을 확장시키고 사건을 크게 부풀려서 <회로>는 괜찮은 연출을 B급 영화 연출로 탈바꿈 시킨다. CG가 엉망이니까 배우들의 연기도 어설퍼 보인다. 점점 집중력을 잃게 된다.
또 하나 이 영화의 아쉬운 부분은 정작 ‘드라마’를 간과한 점이다. 세카이물은 점점 확장하는 외형에 반해 시선을 두는 건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다. 인물들간의 드라마로 이야기를 잘 다듬어야 비로소 튼튼한 완성도를 자랑한다. 그런데 그런 거 일절 없다. <회로>는 세계관을 확장했지만 정작 인물들간의 첨예한 갈등과 드라마틱한 요소들을 깡그리 무시해버렸다. 결국 관객과 인물들은 서로 동화되지 못했다. 철저히 분리되어 영화에 집중력을 떨어뜨리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면, 구로사와 기요시가 <회로>를 통해 넌지시 내비친 당대의 문제의식이다. 그는 이를 현실과 비현실의 구분으로 보았다. 이는 그의 전작에서 절대 볼 수 없는 해석이었다. 그의 영화는 하나같이 현실 속에서 비현실적인 일들을 묘사했지만 어찌됐든 현실에서 파생된 비현실적인 현상들이었다. 그러나 <회로>는 다르다. 애시당초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해두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무너졌기 때문에 이런 사단이 났다고 주장한다. 이는 영화의 제목인 ‘회로’를 통해 상징화되어 표현된다. 빨간 테이프로 칭칭 짜여진 일종의 결계 마크는 현실과 비현실간의 출구를 상징한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다른 거 다 제껴두고 이것만은 확실하게 설명했다. 그가 말하고 싶은 건 현실이 아닌 비현실의 존재다. 허무맹랑한 이야기지만 그것이 당시 일본인들이 겪고 있던 사회의 단층을 포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제시점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비슷한 시기에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통해 현실과 비현실을 번갈아 묘사하며 두 절단된 세계의 간극과 접점을 생경하게 풀어냈다. <회로>와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두 작품은 여러모로 유사하다. 표현만 다를 뿐, 함의는 비슷하다. <회로>를 통한 기요시의 세상에 대한 해석은 비교적 적확하다. 그러나 그의 역량에 비해 만듦새가 아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