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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uruvuru Apr 22. 2017

아름다운 재난영화, <그래비티>

영화 <그래비티> /  알폰소 쿠아론

<그래비티>는 사실주의에 입각한 SF영화다. 우주의 공간적 묘사와 고도 문명의 이기가 이토록 리얼리티 하게 표현된 작품도 얼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는 둘째치고 <그래비티>에서 주목해야 할 건 이 영화가 본격적인 재난영화라는 사실이다. 영화 속 이야기는 자꾸만 모종의 사고가 원인임을 강조하지만 어찌 됐든 <그래비티>는 재난영화의 외형을 빌리고 있다. 이유는 별 거 없는데, 그건 이 영화의 배경이 우주라서다.


우리가 봐온 수많은 재난영화들은 하나같이 지구를 배경으로 한다. 우주가 배경인 재난영화? 들어본 적 없다. 그건 그냥 SF다. 공상적 디스토피아를 재난영화로 포섭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재난영화는 우리 생활권을 바탕해 이야기로 짜여진다. 그래야만 의도가 확실히 전해진다. 재난으로 발생하는 아찔한 상황 묘사와 일련의 위기상황에서 목숨을 건지는 것만이 결코 재난영화의 전부가 아닌 거다. 이야기는 우리와 밀접해야 하며 어디까지나 우리가 충분히 상상할만한 것이기도 해야 한다.

재난영화는 의도가 확실한 장르 중 하나다. 이 안에는 딱 두 가지. 자연의 위용과 인간의 반성이 들어있다. 재해는 자연의 위용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난데없이 인간의 생활권을 가격한다. 무분별한 자연파괴를 일삼은 인간에게의 엄벌이다. 인간은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이들이 떼죽음 당했을 때야 비로소 자연을 향한 인간의 반성과 성찰이 이뤄진다. 이는 재난영화의 보편적인 클리세로 자연과 인간, 양쪽의 이러한 관계는 불가분이다. 자연의 우위는 확실하고 인간은 무력하기만 하다. 영화는 늘 자연에 압도되는 인간을 고증하며 그들을 일방적인 성찰 애로 이끈다.


<그래비티>는 위성 폭발로 발생한 파편들이 산개되어 발생하는 사고와 이를 극복하는 인간의 저항을 담은 영화다. 사고의 원인이 자연 발생적인 것이 아닌지라, <그래비티>를 기존 재난영화들과 유사하게 겹쳐보는 시각은 이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고의 경위는 중요치 않다. <그래비티>의 배경이 우주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사고는 사고지만 이로 인해 발생되는 2차적인 문제들이 그 자체로 재해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영화의 제목이자, 지구와 우주를 구분 짓는 ‘중력’이다. 우주는 지상과 다르게 무중력 상태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뭐든 간에 붕붕 뜬다. 원래라면 중력에서 해방된다는 건 자유를 의미한다. 지면에서의 중력은 구속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상에서 날 수 없다. 언제든지 땅과 축을 함께 한다. 하지만 우주는 다르다. 두 가지 의미가 뒤따른다. 하나는 자유, 또 하나는 구속이다. 우주에서 중력은 이중성을 띈다. 무게를 상실하여 느끼는 해방감의 이면에는 외부적인 힘 없이 제 몸 하나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커다란 행동제약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우주에 있다는 것 자체가 재난적 상황을 상징한다.

살기 위해 아둥바둥 치는 스톤 박사(산드라 블록)는 산소가 부족하거나 연료가 없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좀처럼 타개하지 못한다. 그녀의 위기는 기계적인 결함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가 있는 우주란 공간이 그녀를 더욱 위기 속으로 몰아넣는다. 이는 무중력 상태와 공기가 없는 것. 또한 관성 없이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과학적 논리 때문이다. 중력은 결코 지구처럼 작용하지 않는다. 이는 그녀에게 있어 우주라는 미지의 공간의 가치를 대변하는 매개지만 위험에 처한 그녀에게 있어서는 큰 악재다.


재난영화는 굴복을 바탕으로 인간의 일방적인 성찰을 이끈다. 인간의 집단적인 자성은 사실 자연의 거대한 재해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는 명백한 우위, 즉 상하관계다. 마치 자연과 인간의 주종이다. 그러나 <그래비티>는 장르의 이런 보편성에 치우치지 않는다. 되려 반대로 접근한다. 기존의 우위를 전복시킨다. 압도적인 자연의 힘을 묘사하지만 그 안에서 인간을 결코 주눅 들게 묘사하지 않는다. 재앙 같은 공간에서도 인간이 삶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는다.

스톤은 자신에게 불리한 그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는다. 사실 그녀 역시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었다. 그냥 죽고 싶었다. 그런데 그럴 수 없었다. 인간 대 인간으로 결탁받은 삶을 향한 의지들이 그녀를 희망으로 몰아세웠다. 그녀는 우주에서 방황하고 방황했지만 이내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다.


가까스로 우주를 벗어나 지상으로 탈출한 그녀는 지상의 은혜에 감사한다. 땅을 밟을 수 있다는 사실과 숨을 쉴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그리고는 땅에 기대어 격렬하게 입 맞춘다. 그녀는 자연의 은혜를 깨달은 것이다. <그래비티>의 탁월함은 이 순간 드러난다. 자연과 인간의 대치가 결코 외력에 의한 순종으로 번지지 않았다. 되려 맞부딪혀가며 서로를 경외했다. 자연의 소중함과 인간의 성찰이 절실하게 표현되는 순간이다. 이는 결말과 의도로서 비슷할지 몰라도 과정만큼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기존 재난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시사다. 이야말로 진정한 깨우침이다. 이게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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