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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uruvuru Apr 19. 2017

가벼운 신뢰와 묵직한 분노

영화 <분노> / 이상일 

관계를 풍성하게 만드는 말이 있다. ‘우리’라는 말이다. 남사스럽지만 보다 좋은 말을 꼽는다면 ‘사랑’이란 말도 있다. 그런데 사랑은 왠지 모르게 노골적이면서 부담스럽다. 남발하면 가증스럽기도 하고. 반면 우리는 그렇지 않다. 사랑과 다르게 객체 지향적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주체를 확장시키는 말이라 말하기 수월하다. 더구나 이 말은 공동체 의식을 함양한다. 사랑이란 말보다는 다소 간접적일지 몰라도 관계를 규정하는 데 있어 이 말은 더할나위 없이 강력하다.  


떠올려 본다. 나는 이 말의 편리함과 강력함에 기대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상처주고, 상처 입었을까. 우리란 말은 전제가 강력하다. 이 안에는 나와 타인 사이를 규정하고 구성하는 다양한 층위의 이해관계들을 싸그리 묶을 수 있는 전제가 내포된다. 이는 신뢰라는 강력한 믿음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신뢰할 때, 비로소 괜찮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 동료가 되기도 하고 친구가 되기도 한다. 연인이나 가족이 되는 경우도 있다. 믿음이 바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간혹 사람들은 믿음보다는 사랑이라며, 사랑이 있기에 믿음이 뒤이어 결속된다고 이야기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보다 확실한 건 믿음이 먼저고 그 다음이 사랑이라는 점이다. 타인을 믿는 마음이 선행되어야 그 믿음을 초월하는 애틋한 감정인 사랑으로 발전된다. 

<분노>는 믿음과 사랑 사이의 우선 순위를 확실하게 지적하는 영화다. 믿음이 바탕되지 않으면 사랑이 뒤따를 수 없다는 사실을 이야기를 통해 적극 환기한다. 


각기 다른 3편의 이야기로 구성된 이 영화는 주인공들이 어떤 살인 사건의 용의자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으로 출발한다. 이렇다 할 공통점이 없는 3명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밝혀지는 용의자와 유사한 면면들과 그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분노>의 이상일 감독은 관객에게 계속해서 이미 상정된 의문의 용의자와 용의 선상에 오른 3명의 주인공을 대상으로 번갈아가며 메타포를 던진다. 사실 영화를 보면 이들 중 정확히 누가 범인인지 예측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아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이는 감독의 의도다. 그는 애시당초 관객에게 범인을 찾아낼 수 있는 탁월한 감식안을 요구하지 않는다. 관객이 범인을 추리해내려고 힘쓰는 동안, 의문스러운 장면들을 곳곳에 끼워두고 되려 이들의 드라마를 적극 연출하여 관객의 눈을 교란시킨다. 장르를 빌린 함정인 것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흠이라면, ‘내가 범인’이라는 식의 의도적 연출이 과도한 점이다. 범인의 실마리를 찾지 못해 영화를 끝까지 봐야만 결말이 나는 관성은 그 자체로 흡입력있지만 힌트와 함정으로 연출된 일련의 장면들이 너무 많고 지루한 나머지, 범인이 특정되는 순간은 다소 맥이 빠지기도 한다. 여러모로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어찌됐든 <분노>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범인을 찾아서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려는 시도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영화는 의심으로 무너진 관계를 적극적으로 조명할 뿐이다. 관계의 회복 그리고 그 간의 신뢰가 흔적없이 무너지는 순간을 농밀하게 표현한다. 믿음 없이 사랑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또한 이를 통해 우리가 신뢰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얼마나 허망하게 함몰될 수 있는지를 경고한다. 타인에 대한 신뢰의 척도 역시 과연 어느 정도 간격이 바람직한 것인지도 <분노>가 관객에게 끈질기게 반문하는 바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의심만큼 자주 연출되는 장면은 서로의 신뢰를 확인하려는 장면이다. 이는 신뢰의 말을 통해 전달된다. ‘나는 너를 믿어’와 같이 직접적인 언사거나, 에둘러 표현하는 어수룩한 말까지, 다양하다. 다만, 의심으로 해소되지 못하는 부분을 신뢰로 포장된 말을 통해 애써 외면하려는 한쪽의 애처로운 접근은 때에 따라 따뜻한 행동양식으로 보이지만 좀처럼 표면적이고 가볍다는 의식을 지워내기 어렵다. 

이들의 채워지지 않는 밑 빠진 관계는 서로의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이상, 채워질리 없다. 끝없는 갈증일 뿐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마법의 말에 손을 댄다. ‘우리’라는 듣기 좋은 말과 ‘우리’라는 온정 어린 의식이다. 타인의 온도를 자신의 온도로 지펴내려는 그들은 다소 허울좋은 말로 저마다의 절박함을 표현한다. 


영화의 제목인 분노는 그들이 만들려 한 끈끈한 관계가 모종의 사실로 철저히 부숴졌을 때, 그들의 감정을 빌어 적시한 제목이다. 보통 우리가 느끼는 분노는 의심과 배신으로 발생되는 분노다. 이는 타인에 대한 분노다. 하지만 영화는 또 다른 분노를 묘사한다. 타인을 향하는 분노가 아니다. 믿음을 상실한 자신에게 느끼는 자조적인 분노다. <분노>는 두 가지 분노를 묘사한다. 하나는 아주 보편적이고, 다른 하나는 조금 생소하다. 하지만 생소한 것 치고는 이 감정은 우리에게 여실하다. 우리는 언제나 베일로 감싸진 어렴풋한 관계 속을 끝없이 허덕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관계란, 가볍게 믿음을 운운해 표현하는 순간, 이 세상 가장 가벼운 관계로 변질되는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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