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의 사랑, 그리스>
영화 <나의 사랑, 그리스> 시사회 후기
세계화를 향한 열망이 주춤한다. 고도의 문명 발전이 거룩할 미래상은 분명 이런 것이 아니었다. 반이민정책이라니?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가벼운 말실수 거나 차라리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것이 현실이다. 전 세계적으로 과도한 우파 정부들이 속속 집권할 것이 유력한 가운데, 보다 명백해질 향후 전망은 어느 나라든 국가 울타리 대개조를 단단히 벼른다는 사실이다. 이전에는 지구촌 사회를 위해 너나 할 것 없이 울타리를 허물기에 바빴다면, 이제는 그와 정반대다. 울타리를 다시 재건하기에 열중이다. 세계는 전례 없는 역행을 감행하고 있는 중이다.
<나의 사랑, 그리스>는 지극히 현재의 그리스를 묘사한 영화다. 그리스라면 여러 가지가 떠오르지만, 가장 눈에 띄는 사실은 이 나라의 모습이 그야말로 암담한 상태라는 점이다. 관광업 외에는 모든 것이 열세라는, 가진 건 오로지 과거의 영광 그리고 신들의 기억이라는, 원통한 격세로 근근이 버티는 게 고작인 측은한 나라 그리스. 이 나라를 배경으로 영화는 세상 속의 첨예한 갈등들을 한데 모아 좌충우돌시킨다.
이 영화는 다양한 층위의 사실관계로 꽁꽁 감싸져 있다. 가볍게 즐기기에 좋지만 그렇다고 숨겨진 의미들을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기엔, 이 영화의 만듦새가 너무나도 아깝다. 그냥 몇 가지. 아니, 적어도 지금의 그리스가 처해진 상황을 짐작하고 간다면,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와 감독이 숨긴 어렴풋한 의도까지 명백하게 집어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사랑, 그리스>는 그럴 가치가 충분히 있는 작품이다.
<나의 사랑, 그리스>는 총 3편의 단편적인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서로 다르다. 첫 번째 이야기는 다름 아닌 그리스가 가장 고통받고 있는 일들 중 하나인 ‘난민’에 관한 이야기다. 난민은 제 나라를 벗어나 타국에 불법으로 들어와 사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삼면이 바다와 그 위가 북으로 놓인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다. 물론 비자 혹은 영주권을 갖지 않은 불법체류자들이 국내에도 계속해서 늘어가고 있는 추세지만, 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럽에선 내전과 기근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들이 난민을 자처하고 이들 국가로 유입되고 있다.
제목 <나의 사랑, 그리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사랑’이란 주제를 다룬다. 하지만 사회적 문제가 감정의 고리를 만났을 때, 이야기 속에서 찾아 헤매는 고귀한 사랑이란 가치는 현실을 구성하는 프레임과 딜레마에 꼼짝없이 갇히고 만다.
첫 번째 이야기는 ‘부메랑’이라는 부제다. 부메랑은 던져도 다시 돌아온다. 이는 ‘회기’를 의미한다. 또 원인과 결과가 명백한 동시에 이 둘의 결과값이 밀접할 것이란 점 역시 부메랑의 상징적 의미로 꼽을 수 있다. 즉, 젊은 두 남녀의 사랑이 어떤 결말 혹은 형태로 돌아올 것이란 뜬구름 같은 암시를 할 수 있다. 시리아 난민인 남자 파리스와 그리스 여성 다프네의 사랑이 이야기의 전반으로 구성되는데, 영화는 두 사람의 애정 어린 모습을 그리스 특유의 은은한 풍광으로 녹여낸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들의 사랑이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둘의 입장 차이로 언젠가는 균열이 찾아들 것이란 사실을 계속해서 예고한다. 이는 다프네의 아버지가 난민 정서에 반하는 자경단에 소속되면서부터다. 아버지는 자국과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명목 아래 난민들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그리고 이는 결국 번갈아 가며 조명되는 각각의 사연을 시간이 고조됨에 따라 기어코 접점을 만들어 비극으로 점철시킨다.
두 번째 이야기는 ‘로세프트 50mg’라는 부제다. 로세프 트는 우울증 치료제다. 2부 주인공 지오르고가 먹는 약으로, 그가 우울증 치료제 없이 살 수 없는 이유를 제시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는 아내와의 불화 그리고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살벌한 직장 분위기 속에서 약에 손대지 않고는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어느 날, 그런 그는 한 여자를 만난다. 이름은 엘리제, 스웨덴에서 온 여성으로 우연한 기회에 둘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엘리제는 알고 보니 자신 회사의 구조조정을 위해 파견 나온 상부의 일원이었고, 그는 이로 인해 다양한 갈등을 맛본다. 이 안에는 사랑과 수직적 상하관계 그리고 고용과 실직 등, 경제적 국면으로 빚어지는 비극과 감정들이 뒤섞여 있다. 여느 드라마에서 볼법한 저급한 불륜관계 혹은 직장 내 갈등이지만, 사실 일련의 상황은 그리스에선 유독 여실한 장면이다. 두 사람의 불륜은 어디까지나 이야기의 외형일 뿐이다. 잦은 구조조정과 언제 해고에 대한 공포와 긴장은 이미 그리스에 뿌리내린 정서다. 더구나 회사 내부적으로 합의되는 문제가 아닌 타국의 낯선 사람으로부터 해고를 당해야 하는 입장은 현재 그리스와 유럽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다소 낯 뜨거울 수 있는 다 큰 남녀의 사랑 이야기지만 결코 가벼운 로맨스로 치우치지 않는다. 2부 역시 1부와 동일하게 사랑과 현실의 괴리를 이야기한다.
마지막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앞선 두 이야기가 내적으로는 사회의 단면들을 적극 나열했다면, 3부는 결코 사회문제를 콕 찝어 고발하진 않는다. 되려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와 당연한 이치에 관해 적극 꼬집는다. J,K 시몬스가 주연한 세 번째 이야기는 ‘두 번째 기회’라는 부제다. 흰머리가 지긋한 노년의 두 남녀 이야기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서서히 잃어가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 중 하나는 바로 ‘사랑’이다. 황혼기에 접어들면 정으로 근근이 살아간다는 우스갯소리처럼, 나이가 지긋한 이들에게 있어 사랑이란, 과거의 유물 혹은 풋풋했던 추억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3부의 주인공 여성 마리아는 이를 너무 잘 알고 있는 아주 보통의 노인이다. 그러던 그녀에게 어느 날, 한 남성이 찾아든다. 타국에서 건너온 낯선 이 남자 세바스찬은 자신에게 홀딱 반했는지, 낯부끄러운 말을 서슴없이 한다. 그녀에게 적극 호감을 표현하는 것이다. 눈을 보고 이야기하고, 책을 가져다주고, 작은 선물을 건네면서 그녀에게 자신의 사랑을 적극 어필한다. 여성은 살아오면서 잊고 있던 감정에 대해 다시금 깨닫는다. 이것이 사랑이구나. 잊고 있던 황홀경에 스스로가 너무 낯설고 부끄럽기도 하다.
세바스찬은 마리아에게 고백한다. "사랑해요", 마리아는 그의 고백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있다며, 그에게 잠시만 기다려 줄 것을 부탁한다. <나의 사랑, 그리스>는 이 순간, 영화 속에서 나열된 3편의 이야기가 하나의 퍼즐로 맞춰진다. 각각의 독립된 이야기는 사실 하나로 관통된 이야기였다. 큰 흐름으로 직렬 되는 순간이다. 1부의 주인공 다프네는 딸이었고, 2부의 주인공 지오르고는 아들이었으며, 3부의 주인공 마리아는 이들의 어머니였다. 이들 가족은 서로 연결된, 그러니까 그리스의 각 세대를 대표하는 구성원을 한데 묶은 나라의 축소판이었던 셈이다.
보통의 가정이지만 이들 가족에게 찾아든 비극은 그리스가 겪는 수많은 문제들을 환기시킨다. 난민 문제와 경제 문제 그리고 가정의 불화까지. 자칫 멀어 보일 수 있는 국가의 위기가 사실 한 가정에서 이렇게나 활발하게 대두되는 문제라는 점은 우리의 삶과 사회의 국면이 결코 멀지 않다는 걸 의미한다.
<나의 사랑, 그리스>의 가족은 모든 문제의 총집합으로 결국 파국이 예고되어 있다. 다만, 감독 크리스토퍼 파파칼리아티스(2부 주인공 지오르고를 연기했다)는 이를 의도했으나 영화의 답으로 결코 파국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가 내놓은 답은 새로운 시작이다. 이는 3부의 부제인 ‘두 번째 기회’와 아주 밀접하다. 1부와 2부를 구태여 사회문제로 끌고 내려와서 그리스의 위기의식을 상징적으로 묘사했다면, 3번째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바는 비극으로 점철되는 이 사회에서도 나아갈 수 있는 힘찬 미래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전제가 필요한데, 각각의 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담고 있던 주제인 사랑이다.
각각의 이야기엔 일관되게 그리스 정교회 행진 장면이 연출된다. 어두운 하늘을 수놓는 따스한 불빛의 행렬은 그 자체로 암담한 그리스 사회를 밝히는 기운의 메시지로 작용한다. 더구나 이는 사랑으로 승화되어 각각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의 애틋한 감정과 함께 병렬되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언급되는 에로스와 프시케의 관계 그리고 시작과 함께 나오는 나레이션인 “모든 것은 사랑으로부터 시작했다” 역시 <나의 사랑, 그리스>가 서로가 짊어진 상처를 사랑으로 봉합하고자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원제가 ‘World Apart’로 떨어진 세계를 의미한다. 영화 속 가족은 그리스를 상징하지만 사실 이들과 사랑을 나눈 이들은 모두 타국의 사람들이다. 그리스 그리고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보통의 가족이 겪는 사소한 일상에 그리스를 넘어서 세계가 들어있었다. 제법 거대한 상징을 또 다른 상징으로 명시한 감독의 생각과 의도가 빛을 발한 지점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면서 최근 국제 사회 정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암담한 비전이 제시된 우리 사회는 지극히 현실 같았지만 그럼에도 희망은 여전했다. 사랑, 모든 해악을 덮을 수 있는 위대한 감정은 우리의 곁에서 형형하게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