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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uruvuru Aug 07. 2017

<에이리언 : 커버넌트>, 의미있는 이야기

<에이리언 : 커버넌트> / 리들리 스콧

영화 <에이리언> 시리즈의 역사를 훑어보자. 우선 <스타워즈>를 말할 필요가 있다. 당초 <에이리언>은 <스타워즈>가 구축한 스페이스 오페라의 찬미를 힘껏 끌어모아 만들어진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에이리언>을 <스타워즈>와 동일시 생각하거나, 비슷한 류의 작품으로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에이리언>은 분명 시기적으로 <스타워즈>에 한참 뒤져있고, 일정 부분 SF요소들을 참고한 흔적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타워즈>가 미쳐하지 못했던 SF 장르로서의 근본적인 탐구에 <에이리언>은 선도적인 역할을 자처해왔다. 그건 인간을 비롯한 갖은 생명체에 대한 물음. 나아가 존재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었다.


이미 완성된 세계관에서 ‘분열’을 이야기하는 <스타워즈>는 정작 이런 식의 의문에는 인색을 표해왔다. 물론 그 방대한 이야기를 인색이란 말로 표현하기엔 적절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게 <스타워즈>는 근원에 대한 갈망을 표하는 작품이 아니다. 과거로 향하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스타워즈>는 미래로 향하는 이야기다. 정체 모를 힘인 포스와 이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제다이.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기이한 능력. 즉 ‘진화’에 대한 이야기다.

반면 <에이리언>은 그와 정반대였다. <스타워즈>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면 <에이리언>은 늘 그 반대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미래가 아닌 과거를 향한 셈이다. 그들은 근원을 찾는 여행을 떠났다. 비록 그 의도가 작중 등장인물들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했을지 몰라도 말이다.  


<에이리언>의 모든 이야기는 의도치 않은 경험에서 발생된다. 노골적이다 못해 뻔한 <에이리언>의 초반 전개는 이미 뗄 수 없는 전통적인 내러티브가 됐다. <에이리언>의 시작이 스페이스 쉽 안에서 시작된다는 것. 냉동 수면에서 눈을 뜨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 그리고 이제 막 눈을 뜬 그들이 머지않아 파국을 맞이할 것이란 걸 우리는 알고 있다. 이를테면 정체모를 누군가의 구조신호나 그들이 좀처럼 호기심을 지우지 못해 뒤이어 일어날 참상 역시 충분히 아는 바다. 그리고 이런 자연스러운 이행은 최종적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생명체인 에이리언(제노모프)을 경유해 최초의 질문지 중 하나인 ‘근원’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이다.

 

<에이리언 2>의 퀸 에이리언

그런 의미에서 리들리 스콧이 제작한 <프로메테우스>는 본인이 처음으로 제작했던 <에이리언 1>을 겨냥한 적절한 답변이었다. 사실 <에이리언 1> 이후에 나온 작품들 제임스 카메론의 <에이리언 2>와 데이비드 핀처의 <에이리언 3> 그리고 장 피에르 감독의 <에이리언 4>까지 이 모두는 분명한 후속작이지만 <에이리언>이 포괄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후속작으로 생각하기는 어렵다. 1편에서 던졌던 떡밥들이 충분히 해소되지 못했을뿐더러, 1편 이후 작품들은 <에이리언>의 인기를 의식한 나머지 SF 크리처 정도로 풀고자 한 욕심이 컸다. 그러니까 우주괴물에 집중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에이리언 2>의 퀸 에이리언과 <에이리언 3>의 도그 에이리언 그리고 <에이리언 4>의 뉴본 에이리언이 그 예다.


한편 <프로메테우스>는 작중 배경으로는 <에이리언 1>의 앞을 다루지만 <에이리언 1>이 남긴 수많은 궁금증을 일부 해소한다. 베일에 가려졌던 엔지니어의 존재가 밝혀진 것만으로도 <프로메테우스>가 시사하는 정사로서의 의미는 크다. <에이리언>의 가장 큰 궁금증인 인류 근원에 대한 비밀이 풀렸기 때문이다. 다만 <에이리언>을 SF 호러물로 기억하는 팬들에게 있어 아쉬움이 짙게 남을 뿐이다. 더구나 다른 감독도 아닌 리들리 스콧이 연출한 <에이리언>이 호러가 아닌 SF 작품이 되었으니 말이다.

<에이리언 : 커버넌트>는 그렇기에 커다란 문제작이다. <프로메테우스>까지는 봐줄 수 있었던 <에이리언>의 팬들이 이 작품까지 봐줄 용의가 없는 건 분명한 일이다. 더구나 전작과 달리 <에이리언>이란 제목까지 붙였음에도 에이리언의 취급은 미진하니 분노가 극에 달한 것이다.


하지만 <에이리언 : 커버넌트>를 그렇다 해서 졸작으로 보는 것과 리들리 스콧을 약빨 다한 영감으로 보는 건 아쉬움이 남는다. 변호를 조금 하자면 이와 같은 평가는 <에이리언>을 제노모프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나머지 발생하는 문제다. 사실 이 장대한 이야기가 인간과 괴물의 대립을 표현한 영화지만, 고작 그 정도로 한정하기엔 <에이리언>은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과 괴물 그 이상으로 <에이리언>은 이종끼리의 대립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인간과 괴물(제노모프 등등) 이에 더해 안드로이드까지 더해야 완전한 <에이리언> 시리즈인 것이다.

외계에서 온 생명체만이 이해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비록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인간과는 전혀 다른 안드로이드 역시 <에이리언> 시리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종 중 하나다. 웨이랜드 유타니나 인간들이 자신의 근원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 한편, 안드로이드인 그들 역시 이와 비슷한 의문을 갖고 호기심을 갖는 건 자연스럽다. 제 아무리 통제 가능한 대상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다만, 그들은 자신의 창조주가 눈 앞에 있기에 인간들과는 조금 더 다른 시각을 갖는다. 이를테면 창조주에 대한 환멸과 제한된 기능으로서 행동하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 나아가서 인간 그 위에 있는 창조주에 대한 더 큰 의문이다.


<에이리언 : 커버넌트>는 이 같은 질문지들이 겹겹이 쌓여 도달한 여행의 방랑기 끝쪽에 위치한다. 안드로이드인 데이비드의 광기가 이를 증명한다. 지난 <에이리언> 시리즈가 앨런 리플리를 통해 경유하는 인간으로서의 대리체험이었다면 <에이리언 : 커버넌트>를 포함한 향후 작품들은 인간이 이야기의 주체가 아닌 안드로이드 너머로 확인해야 하는 새로운 종류의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유독 종교적인 색채가 진한 것 역시 믿음 위에 기반한 인간의 정서적 움직임으로 생각하기보다 이 이야기가 새로운 시작의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닐까? <에이리언 : 커버넌트>에서 등장하는 스페이스 쉽 커버넌트 호는 노골적이게도 생명의 나무를 형상한 외형을 갖고 있다. 시간상으로 프리퀄에 속하지만 단순한 SF물의 외피를 벗어버린 셈이다. 이 장대한 이야기의 끝이 눈에 아른한 이유다. 물론 후속 편이 나왔을 때의 이야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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