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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uruvuru Jul 18. 2017

<택시운전사> 두 사람의 이야기

영화 <택시운전사> / 장훈 감독

<택시운전사> 브런치 시사회 후기


영화를 보고서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영화가 갖은 종류의 정보들을 매만지는 훌륭한 매개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이나 반드시 기억해야만 할 일들에 대해 매번 선도적인 자극제를 자처한다는 건 다소 껄끄러운 일이다. 또 최근 영화들이 상업영화의 매무새를 필연적으로 갖출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비추어보면, 소재는 역시 소재의 한정 범위 안에서 굴려질 뿐인가를 곱씹게 만든다. 물론 상업적으로도 작품적으로도 성공한 영화들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영화들도 대다수다. 이목과 관심의 집중에도 어느 한쪽의 성과도 거두지 못한 많은 작품들은 대개 탐구가 부족하거나 진정성을 결여한 채 무심히 도 스크린을 매워갔다.


장훈 감독이 연출하고 송강호가 주연한 영화 <택시운전사>는 어떨까. 헌법 전문에 광주 민주화 운동 전문을 기록하겠다고 선언한 대통령의 당찬 포부와 맞물려 등장한 듯한 이 영화는 과연?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이 작품은 상업적으로도 작품적으로도 준수한 만듦새를 갖고 있다. 또 송강호가 주연한 영화들이 대개 송강호에게 상당 부분을 의지하여 영화의 직간접적인 흥행을 그에게 위임했던 걸 고려하면, <택시운전사>는 송강호와 끊임없이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순전히 이야기를 통해 동력을 만들려는 모습이 보인다.

송강호가 연기한 택시운전사 김만섭(김사복)은 실재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동시에 실재하지 않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 말은 그의 실체는 분명할지 모르겠으나, 정작 김만섭이라는 인물은 수수께끼에 둘러싸여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부터는 영화의 주관이 개입되기 시작한다. 보통은 맥락과 흥행을 고려한 캐릭터 짜 맞추기일 것이다. 그가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쁜 빈곤층의 전형 중 하나인 택시운전사라는 점과 딸을 홀로 둔 홀아비라는 점은 일부 일치할 사실일지는 몰라도 대개는 영화의 그럴듯한 설정을 위한 설정이라는 이야기다. 김만섭이라는 인물로 비춰보는 민주화에 대한 무지 역시 영화를 통해서 목격되는 사실일 뿐, 실재하는 김만섭이라는 인물의 생각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렇기에 김만섭을 연기한 송강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이긴 하더라도 계속해서 송강호와의 거리감이 분명한 영화다.


<택시운전사>는 비슷한 여느 영화들과 같이 외형은 비슷하다. 전개부터 발단 그리고 결말까지. 친절히 감정의 이동을 읊어가며 선의 요동을 주목한다. 분노가 피어나는 지점 역시 확실하다. 그리고 그 중심에 늘 전형적인 한국적 캐릭터가 끼어있다는 점도. 다만 이 영화는 축의 중심이 하나가 아니다. 김만섭과는 정반대인 인물이 있다. 독일인 외신기자 피터(위르겐 힌츠펜터) 역을 맡은 토마스 크레취만이다.

김만섭은 진정한 자유에 대해 그 어떤 생각과 이견을 대입하기 어려운 캐릭터다. 하루살이 인생인 그에게 있어 이런 운동과 대의명분은 사치고 위악이다. 그는 눈을 뜰 여유조차 없다. 혼잣말처럼 되내이는 ‘사우디’라는 단어는 그런 그를 대표하는 수사다. 살기 좋은 대한민국의 역설이다. 반면 그와는 정반대에 위치한 캐릭터 위르겐 힌츠펜터는 이미 완성된 캐릭터다. 그는 대한민국의 철저한 타자다. 이미 거짓을 간파한 인물이다. 서로의 생각부터 시작해서 인종 그리고 말 이 모든 것이 다른 두 인물의 충돌은 당연하다. 그것도 너른 장소가 아닌 좁은 택시 안에서라는 걸 감안하면 두 사람은 물리적으로 가까울지 몰라도 거리감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하지만 두 인물을 축으로 하는 중심에서 이 영화의 탁월한 지점이 형성된다. 택시라는 작은 자동차는 둘 사이를 형성하는 작은 공간인 동시에 이미 하나의 세계다. 또 우리나라의 진정한 민주화의 시작이 광주에서 이뤄진 것을 고려하면 서울에서 광주로의 횡단은 굉장히 의미 있는 구도다. 편도가 아닌 왕복이라는 점도 마찬가지다.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오면서 민주화가 점점 완성에 가까워지는 걸 생각해보면 이 영화는 구도적으로도 절묘한 합을 갖추고 있다.  


송강호가 주연했던 영화 <변호인>은 노무현이라는 정치적인 인물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1000만 관객이라는 경이로운 숫자를 기록했다. 그것이 노무현이라는 정치적 아이콘에 대한 연민과 향수를 불러일으킨 자극제라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변호인>은 이런 요소를 넘어서는 힘이 있었다. <변호인>하면 자연스레 떠올리는 클라이맥스 부분의 ‘자전거 연출’ 및 ‘법정’에서의 연출은 단순히 반전이라는 측면을 벗어나 많은 걸 떠올리게 만드는 <변호인> 최고의 장면이었다. <택시운전사>도 이 순간이 있다. 물론 희미하다. 하지만 <변호인>에서 끝내 놓치지 않았던 치밀한 수가 이 영화에 분명히 있다.

서울에서 우연히 만나 광주로 떠난 택시운전사와 독일인 외신 기자는 분명 돈과 목적으로 이뤄진 갑과 을의 관계였다. 택시는 10만 원을 태우고 광주로 향했다. 그러나 광주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택시는 결코 10만 원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출발할 때 앞 좌석과 뒷 좌석에 따로 앉았던 둘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나란히 앞 좌석에 앉는다. 그 어떤 의도도 없이 자연스레 동지적 관계를 구축하는 이 순간은 이 영화를 대표하는 순간으로 여길만 하다. 민주화 시작의 트리거로서 막 기능하기 시작한 순간이란 점 또한 고려하면, 택시 안의 작은 세계와 그 안을 구성하는 두 가치관의 상충이 합의 접을 찾은 건 꽤나 은유적이다. 서로를 불신했던 그들의 지난 모습은 마치 세계가 전복된 듯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위르겐 힌츠펜터는 제작진과의 실제 인터뷰에서 김사복(김만섭)을 추억했다. 살아생전에 그를 만날 수 있다면 언제든지 한국으로 달려갈 것이라고 말했다. 아쉽게도 그는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김사복이 그의 앞에 나타나지 않은 이유는 알 수 없다. 영화 속 송강호의 독백과 일치할지 아닐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불과 몇 분도 채 안 되는 위르겐 힌츠펜터의 인터뷰에서 김사복을 향한 진한 울림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어렴풋이나마 스크린으로 마주하는 우리는 두 사람의 향수를 온전히 짐작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도 송강호와 토마스 크레취만 그리고 <택시운전사>가 전하는 낡고 시름 거리는 택시와 바깥세상의 좌충우돌을 통해 그 무게를 실감할 수는 있다. <설국열차>에서 끝끝내 열차 앞칸까지 가서도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송강호와 크리스 에반스의 경우와 차원이 다르다. 억지스레 옆으로 새어나가는 걸 통해 조금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던 그 둘과 김사복 그리고 위르겐 힌츠펜터의 교감은 나란히 견줄 수 없다. 실제와 허구의 깊이는 바로 이런 게 아닐까? <택시운전사>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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