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루> / 조선호 감독
※ 영화 <하루> 시사회 후기 - 브런치 제공
상영시간의 기준은 무엇일까. 최근 영화들의 동향을 살펴보면 상영시간은 대략적으로 2시간 전후대로 구성된다. 2시간이란 시간은 짧다고 생각하면 짧다. 한편 길다고 생각하면 무척 길게도 느껴지는 시간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 시간이 결코 집중하기에 적절하거나 알맞은 시간은 아니란 점이다. 2시간 동안 제 아무리 스크린에 휩쓸려보아도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전개가 어느정도에 이르렀는지 예측할 수 있다. 또 집중을 잃는 순간마다 잠시 딴 생각을 하기도 한다.
김명민, 변요한 주연의 영화 <하루>는 상영시간이 90분이다. 최근 영화들의 상영시간과는 상당히 반대되는 시간이다. 같은 영화표를 주고 누구는 2시간을 훌쩍 넘도록 영화를 볼 수 있다면, 이와 반대로 <하루>를 보는 관객들은 보다 짧은 시간에 극장을 나와야만 한다. 현실을 잠깐 잊기 위해 영화로 빠져드는 로맨틱한 관객들은 이 같은 영화를 보면 그렇게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평범하게 영화를 즐기러 온 일반 관객 역시 <하루>의 길지 않은 시간이 그 자체로 부담스럽지 않을 수는 있어도 못내 아쉬움이 들게 분명하다.
<하루>의 조선호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영화 <하루>는 ‘지옥 같은 하루’라는 테마에서 영감을 받고, 이를 테마로 반복되는 연출을 기획하게 됐다고 한다. 때문에 반복에서 오는 지루함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러닝타임이 길어지면 아무래도 반복 재생되는 비슷한 연출과 상황들이 지루하게 다가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90분이라는 짧은 상영시간은 그렇기에 한 번에 달려가기 위해 의도적으로 연출된 시간인 셈이다. 늘어지지 않기 위한 의도를 반영한 시간.
그렇다면 역시 문제는 편집이었다. <하루>는 살점을 뜯어가는 아픔으로 편집을 한계까지 채근한 흔적이 보인다. 90분이라는 초압축 된 시간이 명백한 그 증거다. 또 오프닝도 없이 준영 역을 맡은 김명민이 잠에서 깨자마자 이야기가 진행되는 건 그럴만한 의도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 어찌보면 너무 급박한 전개가 아닌 건지 되려 의문이 들기도 하는데, 오히려 속도감있는 시작 덕분에 몰입감은 상당하다.
그리고 이 영화의 관객은 이미 포스터와 제목을 통해 예상되는 영화 속 사실들에 대해 이미 학습된 상태다. 관객은 <하루>에서 하루가 돌아간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구심점을 정확히 알고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루>의 뒷 전개가 궁금하다. 그 하루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궁금한 것이다. 요컨대 반복되는 하루 그 자체에 관해선 전혀 알려진게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의문과 갈증은 영화의 초반부까지 제법 잘 먹힌다. 몇 번이고 딸을 구하는데 실패하는 준영의 애처로움과 부족할 정도로 짧게 할당받은 무력한 시간은 그 이유를 알 수 없고, 상황이 각박한 나머지, 제법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만든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에 있다. 이 영화 속 제2의 주요인물의 등장과 함께 서서히 나타난다. 민철역의 변요한의 등장부터다.
민철이라는 인물 그 자체가 영화의 저해요소가 절대 아니다. 그가 등장한 이후의 영화 속 스펙트럼이 문제다. 민철이 등장한 이후에는 영화에서 첫 번째 목적이었던 딸의 구제가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되기 시작한다. 하루가 돌아가는 근본적인 이유와 알고 보니 그 안에서 얽혀있던 복잡한 상관관계가 비로소 함께 부상하기 때문이다. 제법 그럴듯한 각 인물들의 이해관계와 저마다의 목적을 위해 취해왔던 과거의 나날들. 처음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사실들이 몇 번이고 구제하지 못했던 전반부의 시간과 나란히 정돈되지 않고 헛돈다. 마치 후반부의 거대한 시작을 알리는 듯 포문을 여는데, 빠른 템포를 가진 영화라는 걸 미루어보면 알맞은 선택이긴 해도 그 자체들의 요소가 결코 깊지 못하다.
준영과 민철 그리고 하루를 돌게 만드는 주범의 상관관계는 영화에서 충분히 묘사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턱없이 부족하다. 그야말로 90분이기 때문이다. 전부 담기엔 어려울뿐더러 담아내더라도 살포시 비추고 바로 다음 씬으로 넘어가야만 한다. 제법 몰입감을 갖춰 집중력이 동반되는 영화지만, 막상 드라마부분으로 빠져들면 상당히 진부하고 지루하다. 반복에서 오는 지루함을 의식한 편집 강박이 불러일으킨 구멍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다만, 그 외의 것들을 들여다보면 이 영화의 재미있는 점은 확실하다. 계속해서 반복 활용되는 뱅크샷은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뱅크샷을 활용한 이유를 들여다보면 <하루>의 묘미가 있다. 하루는 순차적으로 찍은 영화가 아닌 한 장소에서 다른 상황의 여러 씬을 찍은 영화다. 이를테면 기내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깨어난 준영과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고 악몽을 꾼 마냥 일어난 준영 그리고 이제는 지칠 대로 지쳐 깨달음을 얻게 된 준영은 모두 스토리의 산물이 아니라 섹터를 구분한 시나리오의 산물이다. 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고정된 로케이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상상해보라. 스토리를 눈으로 좇은 우리는 배우들의 격정적인 연기에 감복할 수 있다. 그러나 배우들의 그러한 연기가 스토리를 따라오면서 점층적으로 쌓아 올려진 것이 아닌 단편적인 설정에서 오는 연기라는 건 <하루>가 편집과 이야기 속 상황에 대한 이해가 높은 수준이라는 걸 반증한다.
최근 시간여행 장르의 트렌드를 보면 <하루>역시 그 선상에 있다. 과거를 바꾸고, 미래를 고치는, 환상적인 설정만큼 이 장르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갖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영화들이 이 같이 장르에서 오는 보편적인 달콤함에 기대었지만, 되려 그 장르에 크게 발목을 잡혀왔다. 배우 변요한의 경우에는 소설가 기욤 뮈소의 원작 소설로 만들어진 영화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의 흥행 참패에 뒤이어 <하루> 역시 아쉬운 필모그래피를 남기고 말았다. 겨우 두 작품의 나란한 저조로 볼 수 있지만, 이는 전반적으로 시간여행에 관한 이해와 관찰이 조금 더 절실할 필요가 있다는 걸 반증한다. 그렇지만 비록 <하루>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조선호 감독이 말하는 '지옥같은 하루'라는 그 자체 테마는 확실히 유효타를 먹였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런 하루가 반복된다면 정말로 아찔하지 않은가. <하루>에서 본 하루는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