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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uruvuru Sep 13. 2017

도대체 살인자의 기억법은 뭐죠?

<살인자의 기억법> / 원신연 감독

원작 실사화에 대한 두려움을 나는 비단 코믹스에 한정된 이야기로만 여겼었다. 그랬었다. 상상이 아닌, 이미 실체가 분명한 상태에서 구태여 스크린에서까지 2차 창작을 볼 필요가 있나 생각했다. 그도 그럴게 이제까지 봐온 실사화의 사례를 훑어보면 괴리와 부끄러움은 늘 관객의 몫이었다. 이제 그만 좀 만들지? 간절해질 때도 있었다. 물론 마블의 경우 실사가 오히려 리얼리티로 다가오는 경우도 있고, 일본의 경우 간혹 실사화에 성공한 작품들이 있어 명분에 근근이 힘을 보탰다. 이를테면 <데스노트>나 <바람의 검심> 같은 경우가 그랬다. 그런데 어찌 됐든 성공한 케이스는 극소수에 그친다. 반대로 실패한 경우는 여전히도 대다수다. 균형이 좀체 맞지 않는다. 문제는 이 같은 실사화의 열망이 졸작으로의 약진이란 사실은 익히 아는 바다만, 코믹스가 아니더라도 해당하는 점이었다.


단언하건대, 김영하 작가의 원작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은 소설 원작 실사화 부분에서 역사 속에 길이 남을 실사화의 오류로 여길만 하다. 이 영화의 스탠스를 둘러싼 논란은 개봉이 얼마 지나지 않은 지금, 조금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아무래도 거센 비난과 이에 맞서는 구차한 변명의 세례가 뒤따를 것으로 예상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김영하 작가의 최근 인기와 심각할 정도로 대조차를 이루는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이고 원작을 참고할 의지조차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원신연 감독은 본 작품을 원작과 동일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김영하 작가에게 영화화에 대한 모든 권한을 위임받았대나 뭐라나. 하지만 이 영화가, 이 영화의 홍보가, 전적으로 김영하 작가의 원작 소설 실사화로 공공연한 홍보를 감행한 걸 떠올려보면, 사실 이 같은 감독의 발언은 적절하지 않다. 변명이다. 그저 비난의 화살을 원작자까지 쏠리게 하기 쉽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도 그럴게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원작의 변주도 아니고 되려 탈피를 선언한 작품이라서다.


원작 소설과 영화의 가장 큰 차이는 주인공 설경구 캐릭터의 당위다. 원작은 설경구가 맡은 김병수라는 캐릭터에 그 어떠한 사사로운 감정을 이입하는 쪽을 선택하지 않는다. 알츠하이머를 앓는 살인자라는 나름의 설정을 갖고 오로지 그것만을 사용해 기억을 잃은 살인자가 어떤 식으로 기억을 되짚고 살인자의 본 습성으로 돌아가는지를 관찰한 기록기다. 반면 영화는 알츠하이머라는 제약을 이야기의 제동장치로 삼았지만 전혀 활용한 모습을 볼 수 없다. 굳이 찾는다면 그건 영화 내내 안쓰러울 정도로 ‘틱 장애’ 연기를 선보인 설경구의 열연과 키보드에 분풀이를 하듯 일기를 쓰는 알츠하이머 환자의 비애일 뿐이다.

기억에 관한 스릴러라면 놀란의 <메멘토>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알츠하이머와 단기 기억 상실증이란 중증을 비교하는 건 분명히 무리 있어 보인다. 그러나 기억의 상실에 관해서면 두 영화는 비교의 대상이다. 여기서 두 영화가 왜 졸작과 망작으로 나뉘는지 설명 가능하다. <메멘토>는 기억을 되짚어가는 과정을 교차편집을 통해 헷갈리게 배열한 것으로 유명하다. 반면 <살인자의 기억법>은 시간 균열은 없다. 일직선으로 간다. 있다면 플래시 백 뿐이다. 그런데 이거야 뭐 어찌 됐든 기억을 되짚는 방법이 판이하다. <메멘토>는 제약을 극복하지 못한다. 아니 안 한다. 교차 편집이라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약간의 실마리로 필름과 필름을 슬며시 이어가는 느낌이다. 이 같은 부분에서 복잡하지만 나름의 반전을 꾀하게 되고 스릴러로서의 면모를 갖춘다. 반면 <살인자의 기억법>은 제약을 부수고 단순한 흐름을 정직하게 따라간다. 기억이라는 제약을 서스펜스로 활용하지도 않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극복의 대상으로 설정한다. 그리고 극복을 위한 힘의 원천은 뻔하고 진부하게도 작중 딸으로 등장하는 설현의 존재로 수렴시켜버린다.

이 영화에 묻고 싶다. 도대체 살인자의 기억법이 뭐냐고. 한쪽 눈을 찡그리고 깜박거리면 뭐가 변하냐고. 이 장면은 아무리 생각해도 설경구에게 어려운 주문을 반복해서 강요한 것으로 밖에 생각하지 못하겠다. 정작 김병수라는 알츠하이머 살인마를 이해하는데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딸에 대한 아비의 심정으로 육체적 제약을 초월하는 마지막 장면 역시 기억과 살인이라는 타이틀로 포장한 스릴러물 같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히어로물에 가깝다. 김병수라는 캐릭터에 살인 당위를 부여한 것도 그렇고 그가 또 살인을 저질러야 되는 이유를 마치 <테이큰>의 ‘나는 아빠니까’ 이런 식의 당위로만 정당화시키려는 점이 그렇다. 작중 김남길에게 숨겨진 비밀은 말도 하기 싫다.

원작은 주인공을 결코 미화시키지 않았다. 사사로운 감정을 대입하게 만들기보다는 살인마로서의 행동 심리에 주목하고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다. 기억법은 완성된 살인마에게 있어 훌륭한 제약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소설의 핵심을 제쳐두고 어디서 겉멋만 잔뜩 든 듯한 미사여구로 무장한 동인지처럼 보인다. 배우진만 화려하고 포스터만 멋있으면 뭐할까. 원작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 해도 괜한 볼거리에 대한 욕심과 편집 과정에서 분명했을 타협이 너무너무 아쉽다. 차라리 제목과 장르를 바꾼다면 그럴 대로 재미있게 볼만한 영화인데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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