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너의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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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은 시련이 능선을 이뤘다. 재난은 눈 앞으로 다가왔다. 영화 <너의 이름은>의 결말은 분명 극복과 치유라는 의미에서 그 어떤 영화보다 강렬했다. 왜곡된 시간과 재해가 가져오는 거대한 운명적 단위를 극복하고, 현실에서 못다만진 상처들을 또 다른 현실로 보드담을 때, 우리는 이 영화가 제시하는 결말이 뭉클하고 따쓰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다만, 이 영화는 행복한 결말을 뒤로하고 간과해서는 안될 또 다른 메시지가 들어있다. 그건 감독 자신의 과거와 이별을 알리는 말이다. 오로지 결말부를 통해서만 온전하게 전달되는 이 메시지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데뷔작 <별의 목소리>로 수렴된다.
2002년 신카이 마코토의 데뷔 작 <별의 목소리>는 2017년(한국 기준) 작품인 <너의 이름은>과 작화부터 시작해서 길어진 상영시간까지 다방면으로 차이를 보인다. 대략 15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른만큼 기술은 정교해졌고 감독은 노련해졌다. 하지만 긴 시간의 갭을 두고도 두 작품은 곳곳에 흡사한 면들이 포착된다. 이를테면 설정부터다. 두 남녀 주인공의 관계로만 집중되는 전형적인 이야기 플롯이나 작중 두 사람의 관계를 방해하는 거시적 운명의 단위가 포함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두 사람의 의사가 전달되는 수단이 오로지 텍스트에 불과하다는 점이 그렇다.
영화 <별의 목소리>를 살펴보자. <별의 목소리>의 두 주인공 남녀가 서로에게 전하고자 하는 말들은 애석하게도 휴대폰 문자를 통해서만 이뤄진다. 작중 여주인공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주 저편으로 로봇을 타고 떠나는 설정 때문이다. 이로인해 두 남녀 사이는 물리적인 거리가 점점 멀어짐에 따라 둘 사이에 놓였던 시계추가 점점 어긋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둘이 주고받던 문자라는 단 한가지의 수단은 시간이 왜곡 됨에 따라 길게 늘어지고 아주 더디게 전송된다. 결국 문자를 실질적으로 주고 받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면서 문자는 의미없는 텍스트로 전락하고 만다.
이와 같은 설정과 장면들을 마치 <너의 이름은>에서 주인공 타키와 미츠하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황들과 맥락이 비슷하다. 몸이 뒤바뀌는 어처구니 없는 설정과 이로인해 별 수 없이 서로의 휴대폰을 통해 메모를 남기거나, 몸에 할말을 남기는 것으로만 소통이 가능하다는 설정. 또한 둘 사이의 시간이 알고보니 현재와 현재로 이어져있던 것이 아닌 과거와 미래가 연결되어 시간에 오차가 존재한다는 점까지. 두 작품은 이래저래 꽤나 흡사한 점들이 많은 걸 확인할 수 있다.
두 작품의 공통된 부분은 하나의 장르로 수렴한다. <별의 목소리>는 1990년대 후반을 주름잡던 일본 애니메이션의 주된 장르인 ‘세카이물’에 기초한다. 세카이물의 정의는 여러가지로 나뉘는데 큰 맥락으로는 두 가지정도로 좁힐 수 있다. 첫 번째는 두 남녀의 운명이 세상의 운명을 좌우하는 ‘키’로 작용한다는 점. 두 번째는 세상의 운명이 흔들리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시선이 결코 두 사람의 관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을 공통적으로 가지는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에반게리온>이나 <최종병기 그녀>가 있다. 두 작품 역시 공통적으로 세상의 위기와 더불어 그 위기의 중심이나 핵심이 될 수 있는 인물이 등장한다. 또한 세상에 닥친 거대한 운명적 단위가 눈에 보여도 계속 초점을 두는 건 두 남녀의 관계뿐이다. 예를 들자면 TV판<에반게리온>이 결말부에서 그 어떤 설명도 없이 신지의 내면에만 초점을 맞춘다는 점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겠다.
일본에서 대히트를 기록한 <에반게리온>이나 <최종병기 그녀>등 당시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이 세카이물을 주된장르로 선택한 이유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일본의 배경이 이유로 꼽히는데, 일본은 한창 지적허영으로 가득한 시대를 지나고 있던 중이었다. 단순간에 꺼진 일본의 버블경제가 경제적 국면을 넘어서 자국내의 어떤 의식에까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버블로 발생하는 사회적 악재들이 이론적으로 쉽게 설명되지 못하고 의문스런 현상으로 남으면서 일본 국민들은 사회에서 벌어지는 갖은 현상에 의심과 더불어 해석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이는 애니메이션 시장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를테면 <에반게리온>이 남긴 무수한 떡밥들에 종교 성전을 빌려 해석하거나 각종 철학서를 인용해 자신들의 의견을 덧붙이며 토론의 장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고작 애니메이션이란 단순 픽션임에도 불구하고 분석하고 또 분석해서 그 안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캐내고 싶어했다.
<별의 목소리>는 한창 그런 의식이 절정을 이룰 때 등장한 작품이다. <별의 목소리>역시 <에반게리온>처럼 무수한 떡밥을 남기는 불친절한 작품으로 설정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고 그저 이야기를 전개시키기 바쁘다. 시종일관 초점을 두는 건 오로지 떨어진 두 남녀의 애매한 관계와 독백일 뿐, 그 안에서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이나 함의들은 정작 뭉뚱그린다.
15년이 지났지만 <너의 이름은>역시 장르로 따지자면 세카이물의 집합 아래다. 예나 지금이나 인기있는 장르는 여전한 셈이다. 세상의 운명을 쥐고 있는 것이 두 남녀의 관계라는 점과 두 남녀의 관계에만 집중하는 앵글을 통해 <너의 이름은>이 세카이물의 전제를 그대로 답습하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이 영화는 조금 다르다. 이전 세카이물으로 대표하는 작품들이 불친절했던 반면 이 영화는 전혀 불친절하지 않다. 분명 이 영화 역시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더러 있지만 그런 부분은 대개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영화 속에서 큰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다. 몸이 뒤바뀌는 설정은 끝내 작중에서 의문으로 남는데, 이를 딴지 걸고 넘어갈 정도로 영화에서 큰 의미로 번지지 않는 점이 그렇다. 몸이 뒤바뀌는 건 그저 수단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유연하게 연결되어 있고 결말은 깔끔하게 마무리되고 의문스런 부분들은 그저 아주 희미한 함의만을 갖는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전하는 메시지는 이런 장르적인 일부 차이와 깔끔한 마무리에서 정확하게 드러난다. 작품에 장치적 기교를 넣어 복잡하게 부풀리기 바빴던 지적허영의 시대를 지나 이제는 그 누구든간에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해석과 분석의 자격이 있어야만 온전히 즐기는 것이 가능했던 지난날의 자격들을 덮어두고 컨텐츠 자체의 즐거움이 우선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런 시대의 흐름 속에 영화 <너의 이름은>은 감독의 지난 작품인 <별의 목소리>에 전하는 바가 분명하다.
요즘 시대를 말하자면 ‘소통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물리적 거리감이 무력해지고 소통의 방식이 셀 수 없을 정로도 다양해진 시대. 알게 모르게 존재했던 문화적 장벽이 이제는 서서히 높이를 낮추고 있다. 그렇게 소통이 바탕한 시대에서 중요한 또 한가지는 관계의 기본적인 전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서로의 이름을 묻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걸 환기하는 영화 <너의 이름은>의 내재된 함의로부터, 이 영화는 불친절한 의미로 가득했던 지난날의 시대적 배경과 의식들을 향해 결별의 메시지를 남긴다.
의문으로 가득했던 지난 날의 불친절한 작품들에서 벗어나 단순히 즐기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컨텐츠의 아주 기초적인 의미가 우선되는 사회가 되었다. 더 이상 작품 하나에 긴 시간을 할애할만큼 분석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시대는 끝났다. 그저 이야기를 나누고 그 안에서 여운을 남기거나 좋은 추억을 되새기는 아주 기본적인 감상으로도 충분하다. 소통의 방식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넘어서 이제는 컨텐츠의 영역까지 내려온 셈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향후 차기작은 이번 작품 <너의 이름은>을 바탕으로 더없이 즐기기 좋은 작품으로 되돌아올 것임에 분명하다. 해석이 필요했던 복잡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던 애니메이션 시장은 끝났다. 이제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맺은 깔끔한 마무리와 그 안을 가득 메울 사회적 문제들의 포용 그리고 즐거운 볼거리를 통해 좀 더 새로운 장르를 빚어낼 계기를 맞았다. 일본 자국내 1600만이라는 경이로운 숫자와 함께 애니메이션이 가진 힘을 증명하는 동시에 좀 더 대중적이고 친숙해진 작품들로 가득해질 것이다. 과거를 벗어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향후 애니메이션 시장은 <너의 이름은>을 기점으로 충분히 기대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