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극장가를 찾는 관객의 수는 어마어마하다. 예매하기가 무섭게 티켓이 동나고 심야에도 영화로의 뜨거운 관심은 가실 줄 모른다. 극장은 연일 불철주야다. 그 와중에 꼭 한국영화가 한 건 해냈다는 보도가 당연하다는 듯 쏟아진다. 이를테면 ‘설 연휴 극장가를 뜨겁게 달군 영화 <OOOO>’ 이런 식. 예년과 올해, 아니 정확히는 최근 몇 년간 계속 그랬다. 연휴에 극장을 찾는 관객과 때마침 흥행하는 한국영화. 이는 마치 한국영화계의 당연한 공식이 되었다. 다만, 흥행의 비결이 독과점이라는 씁쓸한 배경으로 점철될 때, 극장가는 여전히 뜨거워도 정작 영화는 차갑게 경직됐다는 느낌을 좀처럼 지울 수 없다. 왜?
어쩌면 한국영화의 독과점 체제는 우리가 스크린 쿼터제 축소를 당면한 시점부터 예견된 결과임에 틀림없다. 축소는 많은 논란을 야기했지만 의도 자체는 순수하다. 스크린 쿼터의 치명적인 단점은 영화의 다양성과 선택권의 침해다. 이는 영화를 즐길 권리가 있는 관객들이 법의 영향 아래 그리고 배급사의 의도 아래 한정된 선택 범위 내에서만 영화를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로인해 사실상 관객은 제 권리를 잃게되며, 극장이 자유를 잃은 시점부터 영화는 제 본질을 잃는다. 그렇기에 국내 영화업계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 정책은 강행될 수 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시작은 FTA 협정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유의 대다수를 차지하지만 어디까지나 원론적인 본질역시 외면할 수 없는 노릇이다.
국내 영화계는 이를 기점으로 뒤집힐 것이 분명해보였다. 다양성이 존중된 스크린은 주류 비주류를 떠나 풍성해질 것이란 긍정적인 전망으로 가득했다. 반대로 안그래도 암담한 국내 영화계는 더욱 암담한 터널을 조우할 것이라는 부정적인 에측 또한 당연해보였다. 하지만 이는 예상과는 다르게 조금씩 빗겨 나갔다. 스크린 쿼터 축소로 인해 입지가 대폭 줄어든 국내 영화계는 이에 다른 술수를 가지고 대응했다. 독과점 시스템의 등장이다.
2017년 1월 말 기준. 설 연휴 극장가를 저격하고 나온 영화인 조인성, 정우성 주연의 <더 킹>과 유해진, 현빈 주연의 <공조>를 보면 극장가에 만연한 독과점의 행태를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두 영화는 사이좋게 관객수 400만명을 돌파했다. 손익분기점을 아득하게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아찔한 숫자다. 분명 이런 기록의 바탕에는 설 연휴라는 반짝 공세가 기분좋게 가세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단기간에 그리고 다른 작품들이 극장에 즐비한 가운데, 두 영화가 경이로운 관객수를 동시에 기록한 건 굉장히 비정상적인 일이다.
현재 상영영화 리스트로 눈을 돌려보자. 날짜에 맞춰 리스트업 되어 있는 영화가 꽤나 다양한 걸 확인할 수 있다. 이를통해 우리는 스크린 쿼터가 얼마나 제 작동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외화는 물론이고 국내 영화가 적절한 비율로 섞여있는 것을 보면서 미소 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차후 상영이 예정된 영화 리스트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다양한 극장은 꿈같은 말이다. 편협해도 이렇게 편협할 수 없다. 다양하고 적절하게 섞였다고 생각했던 리스트업 뒤에는 ‘스크린 수’라는 술수가 비겁하게 끼어있기 때문이다.
다수의 스크린을 할당받는 영화로 인해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어쩔 수 없이 선택이 한정된다. 또한 비정상적인 스크린 수와 더불어 상영시간마저 관객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를테면 주력하는 영화의 상영시간은 빼곡하게 구성되지만 그렇지 않은 작품들의 경우엔 시간대가 듬성듬성 구성되어 있다. 결국 관객들은 여건이 좋지 않아 극장에서 주력하는 영화를 볼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놓인다. 이번 설 연휴 역시 이런 행태가 여실히 드러난다. <더 킹>과 <공조> 두 영화에만 다수의 스크린이 할당되어, 관객들은 자연스레 두 영화에만 눈이 가고 자연스레 두 영화를 두고 고민에 빠지게 된 이유다. 그렇기에 <더 킹>과 <공조>는 400만이라는 사이좋은 숫자가 나온 것이다. 만약 두 작품이 경쟁구도로 굳혀지지 않고 한 작품으로 좁혀졌다면 그 작품은 천만 관객을 목전에 뒀을지도 모를 일이다. 2016년 이와 비슷한 시기에 나왔던 황정민, 강동원 주연의 <검사외전>의 관객수를 떠올리면 충분히 납득갈만 하다.
스크린 쿼터제 축소에 반대하던 국내 영화 업계의 목소리는 현재에 이르러서는 조용하다. 업계에 적신호였던 축소제도는 이상하게도 그 위력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암울한 전망은 온데간데 없고 한국영화는 되려 연일 호황을 기록중이다. 이는 분명 전에 없던 관객수이며, 그 여느때보다 스크린이 사람들로 붐빈다는 걸 증명한다. 하지만 제도가 작용한 것에 반해 이 호황은 조금 이상하다. 가볍게 호황이니 부흥기니 판단하거나 웃고 넘길일은 절대로 아니다.
축소를 강행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건 영화의 다양성이었다. 보다 많은 영화를 보다 많은 관객에게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영화라는 컨텐츠가 주는 본질적인 의미와 각각의 작품성을 관철해, 여느때보다 고양된 영화계를 만들고자 하는 좋은 의도가 분명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의도와는 별개로 제도가 가진 어느 정도의 리스크가 문제였다. 자칫하면 업계의 큰 타격으로 이어질지 몰랐던 긴박한 상황이 ‘스크린 독과점’이라는 과대포장과 더불어 영화 배급에 어떤 장애를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문제는 이런 장애가 결코 장애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독과점이 주는 피해는 명확하지만 동시에 독과점이 주는 이점은 이보다 더 강렬하다. 또한 최근 국내 영화를 중심으로 1000만 관객 작품이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는 것과 상영이 끝나기가 무섭게 계속해서 등장하는 블록버스터급 영화들의 끝도없는 나열은 그 자체로 국내 영화계가 유례없는 호황기를 누리고 있는 것으로 비춰진다. 주춤했던 투자마저 늘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 영화는 스크린 독과점이라는 술수를 발판으로 양지로 다가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결코 간과해서는 안되는 건 이 영화들에게 붙은 관객 수가 기형에 가까운 수치라는 사실과 그 수치가 절대 영화의 만듦새를 판가름지을 요소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현재 한국영화는 작품의 정당한 판단이 불가능한 여건을 마치 그럴듯한 무대를 준비해 위장시킨 뒤 판단을 흐트리게 만든다. 잘 만들어진 영화가 주목받지 못하고, 못 만든 영화가 상상이상의 관객을 동원한다. 이는 좀 잘못됐다. 관객이 영화를 흥행시키는 것이 아니라 배급사가 영화를 흥행시킨다. 앞뒤가 바뀌었다. 맥락이 반전된 우리나라 영화계는 속과 껍질이 뒤바뀐 우스운 꼴을 하고있다. 이런 오류가 기반한 시스템이 바탕한 영화계는 그 여느때보다 지루하고, 흥행에만 강박갖는 멍청한 영화들을 양산할 공산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