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전 세계적 패션의 대잔치인 ‘패션 위크’가 각 도시별로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아니, 정확히는 아직 모든 디자이너들이 제 쇼를 끝마친 건 아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파리에서. 그러니까 이번 17F/W 루이비통(Louis Vitton) 컬렉션이 제 쇼의 파격적인 위용을 여과 없이 드러냈을 때, 사실상 올해의 이목은 그곳에서 멈춘 셈이었다. 모두가 넋을 놓고 바라본 이 컬렉션은 소비욕구를 절정으로 끌어올린 동시에 다른 컬렉션으로 시선을 돌릴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압도적인 광경에 올해 컬렉션이 허무하게 끝났다는 걸 담담하게 지켜봐야만 했다.
16년은 마르지엘라 출신 디자이너 뎀나 바질리아의 해였다. 온종일 시끄러울 정도로 패션계의 화두로 굳어진 그의 브랜드 베트멍(VETEMENTS)은 그 엄청난 파급력으로 먼 나라 동양 나라인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 그 기대에 부응한 카피의 나라인 우리나라는 베트멍의 갖은 카피를 쏟아냈고, 이에 뿔난 뎀나 바질리아는 경기도 남양주의 작은 창고에서 대한국전용 컬렉션인 ‘페이크 컬렉션’으로 한국 소비자를 기만했다. 그런데 이마저도 완판 된 상황이 벌어졌다. 일각에서는 베트멍이 제시한 개념이 패션계의 새로운 해석을 넘어서 하나의 개념으로 굳어졌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렇다면 대망의 17년은 어떨까.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컬렉션만 보고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17년은 루이비통이 그 바통을 넘겨받았다. 세계적인 패션 하우스가 정점을 탈환하는 모습은 다소 지루해 보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순수하게 루이비통일 경우의 이야기. 이번 시즌 루이비통의 선택은 조금 색달랐다.
루이비통이 컬렉션을 통해 드러낸 의도는 어찌 보면 불분명했다. 그렇지만 지난 사례들을 전제 삼았을 때, 루이비통이 의도한 바를 얼핏 예상해보는 건 가능했다. 루이비통이 이번 시즌에 전면으로 내세운 건 모델들이 입은 제 각각의 룩이 아니었다. 그들은 룩을 그저 배경으로, 혹은 병풍 정도로만 세웠다. 당황스럽게도 그들이 힘을 쏟아낸 건 슈프림(Supreme)과 자사의 콜라보레이션 악세사리들이었다.
런웨이를 통해 본 모델들이 입고 나온 룩에는 전혀 관심이 가지 않았다. 묘하게 동떨어진 강렬한 색을 대비로 ‘너희가 진정으로 주목해야 될 건 이것이야’라는 강력한 주장을 악세사리에 투영한 루이비통의 이번 컬렉션은 묘하게 파격적인 동시에 지나치게 상업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시선에 사로잡혔다.
사실 슈프림을 상업적인 수단으로 사용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슈프림은 여러 디자이너들과 많은 협업을 거쳐오며 자사의 로고가 전면에 들어간 제품들을 많이 선보였다. 어찌 보면 그것이 슈프림의 정체성이고, 순식간에 프리미엄이 붙는 슈프림의 위용은 익히 알려진 바였다. 하지만 그게 컬렉션 쇼장에 전면으로 드러난 경우는 이번이 거의 처음이다. 가히 슈프림을 위한 쇼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주객전도가 이뤄진 이번 쇼는 굉장히 이례적이다.
그래서 그런 건지 불현듯 머릿속에서 16년이 스쳐 지나갔다. 베트멍이 한창 이목을 끌었던 당시. 우리가 베트멍에서 가장 주목한 건 DHL로고가 전면에 들어간 노란색 쭉티가 아니었던가. 평범한 택배회사 로고가 패션에 녹아들었을 때,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심벌이 될 수 있다는 아이러니한 상황. 이는 분명 파격적인 브랜딩의 일환이었다. 굉장히 실험적이고 동시에 가장 상업적인 시도, 그걸 베트멍이 해냈었다. 물론 많은 찬사와 더불어 맹렬한 비판이 쏟아져 나왔지만.
나는 이번 루이비통 컬렉션이 지난 시즌 베트멍이 선보인 파격적인 시도의 연장이 아닌가 싶은 의혹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만약 루이비통이 DHL이나 혹은 패션과는 상관없는 브랜드로 컬렉션을 과시했다면 이는 노골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그게 슈프림이라서, 앞선 사례들로 넘쳐나는 슈프림이라서, 상업과 동시에 지연스레 이목을 끌 수 있는 파격적 브랜딩에 적합한 슈프림이기에 어쩌면 노골적이라는 말을 저절로 생략하게 되는 걸지도 모른다. 그저 어렴풋한 추측만 맴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온전히 추측만은 아닌 듯 보인다. 이번 시즌 디자이너들이 어찌 된 영문에 선지 속속 들어 지난해의 베트멍을 의식했다는 증거를 보이는 야릇한 결과물들을 쏟아냈다. 물론 방식은 루이비통과 비슷하나 과하지는 않을 정도로 드러냈다. 파리에서 열린 준야 와타나베(Junya Watanabe) 쇼에선 노스페이스 로고가 대문짝만 하게 들어간 옷들이 컬렉션 전체를 구성했다. 중간에 쇼장에서는 퍼포먼스의 일환으로 모델이 노스페이스 가방을 툭 던지고, 그게 마치 오브제인 마냥 냅두다가, 쇼가 끝날 무렵 다시 회수해 갔다는 후문이 들려왔다. 마찬가지로 사카이(sacai) 쇼에서는 노스페이스 로고가 들어간 옷들이 컬렉션에 세워졌다. 두 디자이너의 선택이 왜 노스페이스로 수렴되는지는 모르겠다. 기능성을 중시한 나머지 차용한 거라면 이해는 된다. 하지만 적어도 두 컬렉션은 과학적인 기능을 과시해야 온전히 의도가 전달되는 그런 쇼는 절대 아니었다. 그렇다면 답은 노골적인 상업 마케팅이 컬렉션에 슬쩍 스며들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의 컬렉션에 하나의 브랜드가 당당하게 자리를 꿰차는 시대는 이제 끝난 듯 보인다. 컬렉션 쇼는 분명 디자이너가 그리는 패션 아트의 장이고, 어디까지나 예술로서 승화되는 측면이 컸다. 그런데 아주 조금씩 컬렉션의 전체적인 무드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베트멍의 실험적인 시도가 불과 1년 사이에 그럴듯한 대세의 기류가 된 듯한 움직임이 분명 있다. 과감한 루이비통의 시작과 더불어 비슷한 움직임들이 곳곳에 피어오르는 것이 그 증거다. 이렇게 감행한 쇼들의 결단은 기존의 쇼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트렌드를 몰고 올까. 그 결과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곳곳에 끼어있는 이런 변화의 단초가 결코 진부하거나 심심하지는 않다. 되려 그 여느 때보다 설렘으로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