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빌리려고 갔다가 서서 책만 읽고 빈손으로 도서관에서 나오는 길, 도서관 건물 외벽에 나뭇가지 그림자가 드리운 걸 봤습니다. 나뭇가지는 보이지 않았고 나뭇가지의 그림자만 보였습니다. 그림자가 흔들리는 걸 보고 나뭇가지가 흔들린다는 걸 알았습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 그림자를 보고 거기 바람이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그림자를 만질 수는 없지만 볼 수는 있습니다. 실체는 없지만 존재하는 것. 나뭇가지의 그림자를 보면 나뭇가지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같습니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나뭇가지는 바람에 흔들리고 나뭇가지의 그림자는 나뭇가지의 흔들리는 마음이 되고.
어렸을 적 그림자밟기라는 놀이를 했었습니다. 서로의 그림자를 먼저 밟으면 이기는 놀이입니다. 우린 자기의 그림자가 밟히지 않기 위해 그리고 서로의 그림자를 밟기 위해 겅중겅중 뛰어다녔습니다. 우리보다 우리의 그림자가 더 바빴습니다. 그림자가 밟히면 밟힌 그림자가 안쓰러워서 울었습니다. 우는 아이 옆에서 아이의 그림자도 같이 울었습니다. 아이들이 우는 아이의 어깨를 다독였습니다. 팔과 어깨가 이어진 아이들의 그림자는 한 그루 나무의 그림자였습니다. 울던 아이는 그게 좋아 앙실방실 웃었습니다.
벽에 손을 대지 않고 나뭇가지의 그림자를 만집니다. 무엇이 나뭇가지이고 무엇이 팔인지 분간이 안됩니다. 팔과 나뭇가지가 서로를 이어 붙입니다. 나무가 내가 되는 건지 내가 나무가 되는 건지도 분간이 안됩니다. 나뭇가지는 바람에 쓸리며 새실새실 아이들 같은 소리 냅니다. 잠깐 서서 나뭇가지 그림자를 어루만지다가 집으로 갔습니다. 나뭇가지의 그림자는 여전히 벽에 기대 있고 나의 그림자는 조용히 제 뒤를 따라옵니다. 나뭇가지 위에 조그만 손가락 하나만 남겨 놓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