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essed in black - 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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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흰 종이에 무언가를 그리려 할 때에-대개 인물을 그리려 시도하곤 하였다- 위에서 3분의 1 지점에 점을 찍고 그 기준으로 원을 그렸다. 모든 방향의 두상에서 기초가 되어주는 가장 낮은 레이어. 그 위에 한 겹 씩 쌓아가는 선들이 모이고 모여 하나의 그림이 되어간다. 학창 시절 그려냈던 수많은 미완성의 낙서들은 마치 나 같았다. 올바로 쓰이지 못한 마침표가 외로이 저 밤을 떠돌듯 내 삶에 끝없는 반점만을 남겨두었고 그 속에서 늘어난 문장에 나는 핵심을 찾지 못하고 늘 헤매었다. 시작이란 불꽃은 이미 타오른 채 제대로 타버리지 못하고 스프링 사이에 간신히 끼어있는 작은 종이들이 내 책장에 가득했다. 그리고 그 책장은 내 마음과 같았다.
늘 타오르고 중간에 꺼져버린다. 삶이 그런 것일까. 끝까지 아름답게 타오르리라 생각한 나의 망상은 현실이란 벽에 부딪혀 넘어가는 해마저 보지 못한 채 영원의 그늘이 나를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문득 넘어보고자 했던 담이 영상이었다. 벽을 보고 좌절하지 않고 힘차게 뛰어넘을만한 추진력으로 그 위에 올라섰을 때 본 무수한 또 다른 벽들을 잊을 수 없다. 나의 해질녘은 저 수많은 벽 너머에 있으리란 생각에 아득해져 간다. 그렇다. 뭐 삶이 그런 것 아니겠는가. 배움은 끝이 없고 딱 그만큼의 교훈이 나를 가르친다. 벽을 넘어서서 알게 되는 것은 또 다른 벽이 다가오리란 사실. 그렇게 뛰어넘는 과정에서 잘못하면 다시는 뛰어넘지 못하리란 불안감도 동시에 찾아온다. 힘들면 힘든 만큼 더 힘들게 운동해야 한다. 가끔은 강해지기 위해 단련하기보단 더 큰 아픔에 무뎌지기 위해 내 몸과 마음에 맞불을 놓는 느낌이다. 삶은 그렇다.
계획대로 되는 것은 없다. 그렇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밑그림에서 다음으로 넘어갈 때, 그 모든 고민과 획 사이에 '되돌리기'는 없다. 덮어씌워진 이상 그 원본을 다시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그 선 위를 최대한 따르려 한다. 조금 벗어나더라도 다시 돌아가려 안간힘을 써봐야 한다. 그 경험이 유연함을 기르니까. 강하게 붙잡혀 본 이들이 또 다른 압박에 유연하게 형태를 비틀 수 있다. 튼튼하게 만들어진 고무줄을 쓰기 편하도록 미리 늘려보듯. 다음 동작을 위해 스트레칭을 하듯. 나는 늘 본게임에 급했다. 헬스를 하면서도 몸을 풀기보단 본 동작으로 예열을 하려 하였고 시동을 걸면 곧바로 튀어나가기 일쑤다. 그 마음에 여유가 없음이 사람을 가벼워 보이게 만들고 진정성이 투명해지게 한다. 마치 밑그림 없이 그린 낙서처럼.
무언가를 위해 철저히 준비한다는 것은 그 절실함이 묻어나는 것이다. 아무렇게나 끄적인 획이 기적을 행하리란 생각이 불순한 것이다. 낚싯대를 놓고 기다리는 사람도 물고기가 잡힐만한 장소와 시기를 두고 기다리는 것이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저 사람의 동작들이야말로 가장 준비된 이들의 노련함이었다. 과연 난 그 단편으로 오만함을 부리는 것인가. 삶이 취한 하나의 나방과 같다. 불빛을 따라 뛰어들며 무수한 나의 가루를 흩날린다. 그것이 어디로 날아가 닿는지도 모른 채. 언젠가부터 그 흩날림이 무서워 최대한 살살 나는 법을 배웠다. 그러니 이제는 멀리 뻗어가지 못한다. 날지 못하면 추락하는데 그렇다고 요란하고 싶진 않다. 중용을 찾지 못한 채 0과 1의 생각 사이에서 무수히 진동한다. 무지는 그런 것이다. 선명하지 못한 해상도처럼. 삶은 그런 것이다. 내 삶의 모니터에 픽셀을 하나하나 박아 나가는 과정. 한 풍의 내 그림이 완성될 때까지.
배가 늘 아프다. 그렇지 않았던 날이 그런 날보다 적다. 살은 끝없이 빠졌다 찌기를 반복하고 머리카락은 눈에 띄게 더 빠지기 시작한다.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식사는 급하게 해치운다. 지난해보다 지난 6개월 간의 운전이 더 많다. 다크서클은 남들이 인식할 만큼 진하게 내려오고 눈은 평소보다 더 건조하다. 나는 스트레스가 없다고 여겼지만 몸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는 듯하다. 쉬고 싶어 게임을 켜지만 그 시간조차 가끔은 일에 치이곤 한다. 운동으로 인한 것이 아닌 근육통을 겪어보고 아파본 적 없는 무릎이 아파온다. 그렇다. 모두 다 당연하게 느껴야 할 스트레스와 고통이다. 이것이 내게 비극이 아니라 그 어떤 누구도 겪을 삶의 고난이다. 언덕 같은 오르막을 오르던 학생시기를 지나 급경사를 네발로 기기 시작한다. 분명 누군가는 나보다 더 낮은 곳에서 더 가파른 경사를 오를 것이다. 이 고통은 절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보편적이고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기타를 치기 위해 굳은살이 생기고 요리를 하다 베이고 뛰다가 부상을 입듯이 누구나 겪는 그런 과정이다. 완성에 이르기 위한 과정은 늘 고통이고 가장 행복하던 시기는 밑그림을 그리며 완성본을 상상하던 그 순간이다. 그 모든 것들을 다시 생각하고 삼킨다. 내 힘듦이 특별하다고 여기는 순간 나는 떨어질 것이다. 보편적인 순간을 보편적으로 넘기고 넘어가라. 그러면 그 속엔 행복이 있다.
내 삶의 밑그림이 과연 잘못되었을까.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잘못 그리고 있었을까. 아니, 왜 완성을 정해두고 그리고 있는 것인가. 계획을 따르고자 노력함에 뒤따르는 유연함은 고유함이 추가될 텐데. 그러면 그제야 다른 이의 그림이 아니라 내 그림을 그리게 되는 것일 테고 그 그림을 보고 누군가는 내 그림을 생각하며 밑그림을 그리지 않겠는가. 난 트레이싱도 싫고 모작도 싫다. 가끔은 이상한 고집에 순수함을 추구하며 무에서 유를 행하려 한다. 그래도 오마주정도는 괜찮지 않겠는가. 위인전이 있는 이유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그 사람의 삶이란 틀에 자식을 찍어내기 위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삶을 오마주 하여 또 다른 영감을 통해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기 위한 교본과도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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