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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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이 되면 배가 고픈건지 아닌지 분간이 어렵다. 무언가를 넣고 싶지만 넣고 싶지 않아지는 시간이다. 집에 무엇이 있는지 생각한다. 이내 그만둔다. 내게 점심 저녁 그리고 프로틴 한잔의 여유면 충분하다. 극단적인 절약은 생각보다 재밌다. 무소유의 정신으로 살아본다는 것은 꽤나 나쁘지 않은 경험이다.
지난 차주가 갈았어야 할 모든 액체류, 필터류를 교체했다. 아마 차에 관심이 타이어말곤 없지 않았을까. 트렁크에 있는 지렁이 세트와 갈아끼워진 미쉐린을 제외하곤 그 어떤 부분에서도 신경을 쓴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직접 교체하기 위에 뜯은 에어컨 필터에서는 시기를 알 수 없는 나뭇가지들이 한가득이었다. 매번 이런 낙엽들은 어디서 어떻게 유입되는지 너무도 궁금하다. 살아가다보면 느끼지만 정말 궁금한 것은 많고 해소되어야 할 호기심은 끝이 없는데 배움의 수준에는 한계가 있다.
근래에 재미를 붙인 정비 영상, 제이특공대를 끝없이 틀어놓는다. 이해가 온전히 가지 않아도 자동차를 얼추 이해할 수 있다. 타이밍 체인과 텐셔너, 그 구조와 존재 이유, 저압터보와 고압터보, 오일 세퍼레이터와 흡기 매니폴드, 진공라인, egr밸브 등등 그리고 고장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원인을 진단하고 예방까지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 이건 정비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국산차가 아니라 수입차인점이 아쉽지만 그 작업 내용을 보고 있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난 저런 꼼꼼함은 어렵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곤 한다. 사람은 타고난 선천적 성향에 맞춰서 일해야 한다.
다시 시작한 천국의 계단. 늘 유산소는 이겨내야 함이 너무 힘들다. 유산소는 체력적 한계보다 정신적 한계가 먼저 찾아온다. 내가 그만하고 싶단 마음이 신체의 한계보다 먼저 온다는 것이다. 무산소는 실패지점이 있기에 그 끝을 어느정도 가늠할 수 있다만 유산소의 실패지점? 넘어지는 것인가? 내 마음이 먼저 지쳐버리기에 쉽사리 늘지 않는다. 1000칸을 13분 내로 끊던 나는 어디로 가고 오랜만에 탔다고 750칸에 만족한다. 나약해지는 것은 내 육체가 아니라 정신이다.
추위는 그닥 치명적이지 않다. 그렇게 계단을 타고 나오면 영하 언저리도 2분정도는 반팔로 버틸 수 있다. 땀나는 게 더 싫다. 후끈해진 몸을 한시라도 빨리 식히고 싶다. 여름에는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해도 열기가 남아 땀이 삐질 흐르는 경우가 있다. 확실히 그거에 비하면 겨울이 낫다. 부산에 있을 땐 반바지로도 다녔는데 20분 거리를 반바지로 하기엔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차라리 가는 거리를 러닝으로 떼워버릴까.
건강을 챙기는 것은 무조건 다이어트를 하고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행복한 살집이 있는 것이 오히려 건강이다. 육체적인 최소치만 만족되면 정신건강이 더 중요한 세상이다. 몸이 건강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던 시대를 넘어서 정신이 버티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니 즐겁게 살아야 한다. 늘 우울하고 늘 힘들면 버티기 힘들다. 다행히도 난 운동이 즐겁다. 육체와 정신을 어느정도 병행하며 챙길 수 있음은 행운이 아닐까.
하루의 가장 큰 평화는 샤워에서 찾아온다. 운동을 한 뒤가 되었든 아침 잠을 깨기 위해 들어간 욕실이던 나가기 전 단장을 위한 씻기가 되었든 늘 좋다. 개운하게 씻으러 들어가 적당히 뜨거운 물에 멍때리는 것. 온 몸의 체온이 조금 올라가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 좋다. 피로가 가시는 느낌과 더불어 내가 좀 그래도 인간처럼 사는구나를 씻으며 자각한다. 면도를 하고 트리트먼트를 하며 듣는 노래들은 비록 물소리에 흐려지지만 그럼에도 좋다. 그 평화가 좋다. 내가 처음으로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도 샤워와 관련된 내용이었단 사실을 아는가?
내일이 되고 모레가 되어 한해가 바뀌어도 내 삶의 드라마틱한 변화가 없다는 것이 갈수록 느껴진다. 어렸을 땐 학년이 바뀌고 친구가 바뀌고 선생님이 바뀌며 내 세상이 바뀌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새로워지고 배울 것이 많아지고 잊는 것이 생겨난다. 그게 나에겐 새해였는데 학교와 관계가 없는 첫 해를 맞이하며 느꼈다. 1년이 지나고 나이를 먹는 모든 행위는 큰 의미가 없다. 그렇게 늘어간 내 몸의 나이테는 노련함과 지혜를 상징하면 좋겠다.
숨을 쉬면 늘 그 공간의 냄새를 확인하게 된다. 예민한 코로 인해 어떤 곳이든 냄새가 난다는 그 사실 자체가 그리 달갑진 않다. 내가 거주하는 공간은 최대한 별 냄새가 안나야하며 적어도 과도한 자극적 냄새를 몸에 두르는 행위는 자제하는 편이다. 그래서 선호하는 향도 우디, 비, 바다 같은 자연의 느낌을 베이스로 한다. 언제나 늘 자연에서 나는 그런 냄새가 좋지 인조적인 냄새가 너무 싫다. 차량의 방향제는 멀미를 부르고 새집, 새물건 냄새는 두통을 유발한다. 아 그래도 맛있는 냄새는 즐긴다. 나도 사람인지라.
이성적인 사고방식은 꽤나 삶을 헤쳐나가는데 도움이 된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완전한 파악이 되기 전까진 감정이 앞서지 않도록 한다. 그래야만 뭔가 정리가 되는 느낌이다. 감정이 먼저 나서는 건 내게 좀 두려운 일이다. 근거를 통한 완전한 판단 이전에 감정에 앞서 결정을 내리고 판단을 해버리면 그 뒤가 너무 어려워진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중립에 서는 것 같은 모양새가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다보면 이미 난 중립에 선 사람이 되었고 판단이 다 끝나 한쪽 의견으로 기울어도 쉽게 내 의견을 내세우지 못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늘 판단하고 주장하기보단 지켜보고 분석하는 위치가 되었다. 좀 느슨한 사람처럼 보일지라도 스트레스는 덜하다.
예전엔 가끔 오던 정강이 통증이 근래에 안오기 시작했다. 한번 오면 하루는 온통 절뚝이며 걸어야 하는데 언제부턴가 그러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찾아온 간헐적 두통. 오른쪽 뒤통수를 세로로 가로지르는 뾰족한 편두통이 생겨났다. 가끔 어떤 분명한 이유없이 찾아와 2시간정도 나를 괴롭힌다. 그리 심각한 수준의 군발성 두통은 아니지만 충분히 거슬리긴 마찬가지다.
이렇게 보면 사람은 참 어렵다.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없음에도 지장이 갈 정도의 고통이 발생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기야 그리 복잡한 자동차, 컴퓨터도 에러가 발생하는데 그보다 훨씬 복잡한 진화의 산물인 사람이 에러를 뱉지 않으리란 법이 있는가. 다만 디버깅을 통한 해결이 어렵다는게 문제다.
중고를 산다는 것은 늘 즐겁다. 누군가의 사용감을 댓가로 싼값에 모셔올 수 있단 그 사실만이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기능을 누리도록 한다. 차를 봐도 그렇다. 차는 굴러가고 잘 서면 된다. 내가 원하는 곳에 나를 안전히 이동시킬 수만 있으면 차로써 할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인 목표는 수행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굳이 비싼 차를 살 이유가 없는 것이다. 불편하고 편하고는 전혀 다른 얘기다.
그럼에도 사람은 늘 신품보다 중고품이 선호된다. 사람은 사용할수록 숙련되기 때문에. 그 어떤 제품보다도 길들이기가 효과적이다. 반대로 너무너무 오래된 물건이면 오히려 골동품으로써의 가치가 생기는 물건들과는 다르게 인간은 내팽겨쳐진다. 공산품과 거꾸로 가는 인간. 참으로 재밌다. 두 가치 모두 인간이 부여하고 소비하는 것일텐데 말이다.
시나리오 아이디어가 가끔 불현듯 떠오를 때가 있다. 어떤 장면이 될수도 있고 소재가 될수도 있지만 가끔 그렇게 불쑥 튀어나온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 하나를 구현하기 위해 영화가 되기에 필요한 살들을 하나씩 붙인다. 그렇게 영화를 써본다. 마치 우리 삶같지 않은가? 생각해보면 재밌다. 목표란 이름의 단편적 욕구들 위해 그 과정과 부수적인 목표들이 생긴다. 그리고 살아가다보면 그 목표 자체보다도 그 과정에서의 선택과 경험이 너무도 중요하단 것을 느낀다. 잘빠진 명장면이나 소재, 세계관보다도 그 사이를 채울 것들이 중요한 영화처럼. 삶은 영화가 아닐까? 어떤 엔딩이 될지도 모르고 클리셰란 의미가 통하지 않는.
운명이 정해진다면 어떤 느낌일까. 몇광년 너머의 그 사람이 보기엔 내 삶은 그 년수만큼 과거가 보일 것이다. 이런 과학적 상식이 없는 사람의 눈에 그 과거의 사건들이 모두 다 이미 정해진 테잎대로 흘러가는 것으로 느껴질까? 지금 내 모습은 이미 정해져있으니까. 반대로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 느끼는 세상도 사실 모두 과거의 일이다. 각 감각 수용체가 뇌로 정보를 전달하기까진 분명히 전기적 신호의 한계가 존재한다. 그 장벽을 넘을 수 있는 것은 양자 얽힘뿐일 것이다. 우리는 과거를 읽으며 사는 것일까?
구경한다는 것은 호기심을 해소하는 행위다. 변화가 알고 싶고 그 사건을 이해하고 싶어한다. 고속도로 사고현장을 구경하기 위해 반대차선도 정체가 형성되는 것처럼. 인간이 된 이상 호기심을 해소하고자 하는 요구를 거스르기 쉽지 않을 것이다. 호기심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허용해야 할까.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처럼 가끔은 모르는게 나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알고 싶은 것. 그것이 인간 아니겠는가. 친구의 비밀을 캐묻지 않지만 옆옆집에 찾아온 경찰이 궁금해 다른 구경나온 사람에겐 물어볼 수 있는 것처럼. 가끔 그 호기심이 과해 무엇이든 알려하고 비밀이 없는 친구들이 있다. 비밀은 비밀로 두어야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 당사자는 비밀이 깨어지면 내 가치가 훼손되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가끔 새벽에 달리던 동래의 풍경이 생각난다. 혼자 바람을 느끼며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누우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나아가던 그 순간이 가끔 생각난다. 멈춰서서 바라보는 야경과 밤하늘이 어찌나 이뻤던지.
눈이 오면 오는 것이고 비가 오면 오는 것이다. 거스를 수 없으니 어쩌겠는가. 내게 불편함을 가져다주면 주는 것이고 나를 속이려들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고 싶다는데 내가 무슨 수가 있겠는가. 그러고 싶다는데 내가 뭘 어쩌겠는가. 나에게 피해를 주고 싶다는데 내가 그 의도와 마음을 어떻게 독심술로 알아채겠는가. 늘 그렇지 않은 사람만 상처받고 힘들어한다. 무딘 사람도 배신감을 느끼지 않는게 아니고 아쉽지 않은게 아니다. 기대란 것을 배우고 할 줄 아는 인간에게서 저 둘을 느끼지 않고 살기란 쉽지 않다. 가끔은 내가 당했던 것들을 복기 해본다. 얼마나 그러고 싶었으면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그러겠나 란 생각이 든다. 측은함이 들면 용서가 된다. 용서는 때로는 동정이기도 한 것 같다. 용서할만한 일이 더이상 남지 않게 되면 나도 자유로워진다. 가끔은 내 발목을 잡는 일들이 내가 놓아주지 못한 것들일 확률이 높다. 내가 나를 잡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스친다. 늘 걷던 그 거리에 익숙한 얼굴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보다 우리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과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쑤셔져 살아간다. 항상 달라지는 그 얼굴들을 하나하나 외우지 않았기에 더 그럴 수도 있지만 무수한 사람들 사이에 뒤엉켜 내가 나라는 자각조차 불투명한 삶을 살아간다. 작다고 생각한 것은 생각보다 다 컸고 크다 생각했던 것들은 생각보다 다 작았다. 뭐든지 다 데포르메 해버린 것마냥 내가 세상을 더 과장되게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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