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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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해머 프렌차이즈에서 끊임없이 강조되는 내용 중 하나가 신이 존재한 이래에 지성체가 존재한 것이 아닌 지성체의 감정과 믿음이 모여 신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신과 비슷한 무언가로 승천을 시킨다. 나는 이것이 현실에도 분명히 적용가능하다고 믿는다.
종교인들에게는 민감할 수 있는 사안이지만 예수는 살아생전 우상화를 경계하고 금지했다. 그렇지 않은 것을 그렇게 만들어 숭배하는 행위를 금하기 위해 스스로 우상이 되었다. 우상을 경계하라고 말하는 우상. 결국 믿음이란 것은 어떻게든 피어날 것을 알았기에.
우리는 수많은 정보들 사이에서 무엇을 믿을지 끝없이 공부하고 고민한다. 교과서의 모든 내용이 진리인 적이 없고 해를 거듭해 수정하고 고쳐진다. 살아오며 어디서 어떻게 자라왔는지에 따라 기본적인 믿음이 달라진다. 가족의 믿음을 따라가는 경우가 많아 종교도 세습되는 경우가 많다. 내가 가장 가깝고 믿는 이의 믿음이 곧 나의 믿음이 되는 것이다. 전염되듯 커져가는 믿음은 결국 무언가를 이뤄내고 만다. 마치 기적과 같은 무언가를.
수많은 사람들이 한가지 사실을 믿는다면 그렇지 않은 것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삼인성호라 하였던가. 신이 있다고 믿는 이들이 모여 신을 만든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의 뜻이 되고 죽음 이후로부터 전해지지 않을 메아리를 바탕으로 사후세계를 믿는다. 보이지 않을 것들에 더욱 강력한 효과를 가져온다. 나를 믿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내가 하는 모든 말들이 진실이 된다. 그것이 '진리'라는 좀 더 높은 단계로 도약해 '말씀'이 되어 기록되고 전해진다. 무조건적인 믿음은 곧 행동이 되어 말이 진실이 되도록 한다. 종교적인 무력행위가 곧 그런 것이다. 책에 쓰여져 있다는 이유로. 그런 해석이 되었단 이유로 그러지 않은 이들을 무력으로 강제하려 든다. 믿음이란 것이 때론 이 세상의 이치와 이성보다 강한 것이기에 합리적이지 않은 선에서 말도 안되는 파괴력을 만들기도 한다. 그것이 죽음을 불사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논리적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며 하나쯤은 갖추게 될 가치관이나 방향성의 합치를 이루면 자연스럽게 그것과 연결된 모든 것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된다. 이웃을 사랑하란 말과 예수, 그리고 성경에 대한 믿음. 그런 믿음을 주는 이들이 잘못한 것은 아니다. 다만 믿음도 끝없이 의심하고 다시 확인해야한다. 예수가 그리 말했던 것처럼.
내가 믿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것인지. 있는 그대로 해석해선 아니되고 시대적 상황과 맥락에 따라 받아들이고 행해야 한다. 과도한 맹신은 말 그대로 사람을 맹인으로 만든다. 판단의 위임과 자기파괴적 헌신은 마치 고혈을 빨아먹는 기계처럼 생명력을 비롯한 수많은 것들을 앗아갈 수 있다. 피신뢰자의 욕심에 따라 비극까지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권력이란 것이 주어지면 휘둘러지는 것처럼 믿음도 그렇게 행해질 수 있다. 심지어 그 행하는 자가 자신의 오판을 굳건히 믿는 사람이라면. 잘못된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없이 틀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미 그런 사례는 역사에 수도 없이 쓰였고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기적은 신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맹목적 믿음으로 뭉친 사념들이 행하는 것이다.
종교는 필연적이다. 믿음이 그만한 힘을 가진다면 그 믿음의 대상이 올바르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끝없이 떠드는 교과서의 이야기들보다 자신이 믿고 따르는 형님의 말씀을 더 잘 이행하는 것처럼. 믿음의 힘은 그 어떤 것보다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모두에게 이롭다면 상관없다. 다만 그것은 믿지 않은 이들에게 강한 반발감을 줄 수 있다. 믿음으로 똘똘뭉친 이들에게 불신이란 단어는 마치 같은 극의 자석처럼 절대로 붙을 수 없다. 서로를 이해 할 수 없는 요소가 생긴 그 순간부터 모든 것들이 친절함을 잃게 된다. 그것조차 포용할 줄 알아야 하지만 맹목적인 믿음은 그런 여지조차 주지 않는다. 그러니 의심해야한다. 때론 나 자신도 의심해야 한다. 나조차 틀릴 수 있음을 안다는 것은 많은 준비를 하게 해준다.
살아가며 믿을 것 하나 없는 이는 어떤 것에 기대어 살아갈 것인가. 가히 외로운 그들에게 종교는 차라리 한줄기 구원과도 같다. 같은 믿음을 가졌단 이유로 가족으로 받아들여지고 친절이 이루어지는 곳. 그런 포용은 누군가를 믿음으로 이끌기 너무도 쉬운 미끼이다.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 믿겠다는 선택지가 생기게 된다. 그래서 태어나고 자란 집단, 나라에 따라서 크게 갈리게 되는 것이다. 내가 믿는 것을 누군가가 또 믿는다면, 서로가 이해자가 될 수 있다면.
어쩌면 그런 믿음이 바뀌어가는 그 순간이 가장 괴롭지 않겠는가. 끊임없이 고민해야하고 답안지 없는 문제를 붙잡고 수많은 검산을 이어가야 한다. 내가 맞는지 틀린지 조차 알 수 없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다. 내가 스스로 판단하고 지켜가야 한다. 내가 나를 믿어야만 반드시 도달할 수 있는 어딘가가 있다. 자신감은 그냥 허투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를 믿을 수 있을만한 근거를 쌓아가다보면 하나의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 그럼에도 나 스스로를 의심해야 하니. 그것을 잘하는 이가 메타인지를 잘하는 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때론 가장 자신을 잘 믿는 사람이 가장 거절을 잘하는 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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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흐리듯 맺히는 성에가 하얀 이유는 차가운 공기의 발자국이 하얗기 때문이다. 빨갛게 물든 손가락과 귀 끝에 감각이 무뎌질 때쯤, 심장과 먼 곳부터 천천히 죽어감을 깨닫는다. 가장 멀지만 가장 적극적으로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손과 발. 아픔보단 무력감이 더 무서워 끊임없이 열기를 내뿜는 손으로 가져간다. 겨울에 구슬프게 우는 입김이 하얀 이유는 뜨거운 공기의 손길이 하얗기 때문이다. 마주하기 어려운 겨울이 올때면 늘 무언가 나를 찾아온다. 받아들임과 평정은 다르다. 잘 쓰여진 희곡은 아찔하게 삶을 빗겨간다. 애초부터 잘못 조준된 활시위처럼 갈리 없는 허공을 가르며 힘없이 고꾸라진다. 그것이 때로는 비극이고 희극이다. 빨갛던 것이 다시 하얗게 흐려지면 무언가를 쥐고 있기 조차 힘들어진다. 추위는 그런 것이다. 아무리 장갑을 껴도 꺼지지 않던 하얀 불꽃을 참지 못해 끝내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말 것이다. 그제서야 볼 수 있는 검정 하늘 속 별자리가 하얀 이유는 하늘이란 마음에 새겨진 기억이 하얗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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