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영원히 가로지르는

쇄빙선

by 노예올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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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온다. 저 멀리서부터 하얗게 바래진 하늘 너머로 눈이 내려온다. 바닥에 부딪혀 흩어지고 쪼개져 쌓인다. 온통 하얀 색으로 물들어가는 풍경과 칼날같은 추위에 녹고 얼어붙기를 계속해 세상을 얼어붙게 만든다. 바스라진 입김과 딱딱하게 굳은 소리들. 그럼에도 나아간다.


쇄빙선은 얼음을 가르며 나아간다. 두꺼운 이중 철판의 선수에 물을 빼고 선미로 물을 몰아 기울어지게 한 뒤 얼음을 올라타고 선수로 다시 물을 몰아 얼음을 쪼개며 나아간다. 추운 북극항로를 나아가며 하얀 들판을 항해한다. 지나간 얼음은 그대로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언다. 엄청난 거리를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일직선으로 가로지르며 여러가지 비용과 시간을 아낀다. 꿈에서라도 본듯 머리에 문득 떠오른 그림이다. 무한히 펼쳐진 바다가 아닌 하얀 들판을 쪼개며 나아가는 쇳덩어리.


늘 언제나 떠올려도 지나가고 있다. 영원히 닿지 않을 얼어붙은 그 항구를 향해. 기약없는 항해를 떠난다. 두꺼운 문 너머는 엔진열을 이용한 난방으로 꽤나 포근한 환경이 펼쳐진다. 매일 아침 일어나 바라볼 창밖의 풍경은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 늘 그 둥그런 창 밖의 반원은 하얀색으로 채워져 있을텐데.


지겹다 여기면 지겨워 질 것이고 괴롭다 여기면 괴로울 것이다. 영원히 멈추지 않을 심장과도 같은 엔진을 죽이는 법은 내가 직접 엔진 정지 버튼을 누르는 방법뿐이다. 나아갈 것도 나의 선택이고 멈추는 것도 나의 선택이다.


아무 것도 나를 괴롭히지 못하고 단지 내 곁에 머무는 것은 나의 잡념뿐이다.


쇄빙선, 내 머릿 속에서 떠나가지 않는 그 그림. 하얀 도화지를 가로지르는 붓처럼. 궤적처럼 남아버린 깊은 바다의 자국. 부서지는 얼음의 소리가 마치 깊은 음의 콘트라 베이스 같구나. 절대 같은 소리를 내지 않는 자연의 불규칙함은 노래라고 하기엔 너무도 마구잡이고 소음이라고 하기엔 포근한 것이었다. 책을 펼쳐두고 깨지는 소리와 바스라지는 소리를 나눠서 음표를 찍듯 기록해본다. 마치 모스부호처럼 나열되는 기호들. 그래 그것은 자연과 나의 대화이다.


삐걱거리는 소리의 바닥과 끊임없이 달그락거리는 찬장. 움직임에 익숙해지면 내 몸이 아니라 주변 사물들로 겨우 인식한다. 늘 뜨겁게 끓인 물을 컵에 받아 들고 다님에도 금방 식어버린다. 아무리 많은 뜨거운 물을 가져와도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이 닿을 수 있는 곳엔 한계가 있으리라. 이 추위에 수증기마저 얼어붙을텐데.


때로는 도착하지 않았으면 한다. 어렸을 적 아빠의 차 안에서 느꼈던 몽환적 느낌. 새벽의 어둠을 달리는 차와 대시보드를 뚫고 들어오는 엔진음. 바퀴와 바닥 간의 관계가 마치 오르골의 노트처럼 끊임없이 읽어대는 소리. 그 기억 속에 나는 영원히 집에 도달하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도착하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때의 마음이 다시금 흔들리듯 찾아온다.


쇄빙선, 그것은 강인함이자 우직함이자 둔함. 내 항로가 언제 끝날지. 그 곳엔 항구가 존재하긴 할지. 아니 어쩌면 그곳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존재할지.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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