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t Stop till you get enough

Vol.2

by 노예올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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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장소를 찾아 떠나는 발걸음. 설렘보다 두려움이 더 강한 그 짧은 여행은 늘 변화와 뒤따르는 아쉬움이 동반한다. 그 때의 기억과는 다르게 바뀌어버린 풍경의 모습은 시간을 실감케 한다. 멈춰버린 것은 기억 속에 남겨진 그림이며 나도 흐르고 그 장소도 흐르고 모두가 흐른다. 무심한듯 아무런 일 없었던 그 장소가 되어 또다른 누군가의 추억이 되리라. 가루처럼 흩어지던 것들 사이에 나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을까. 그렇게 두 눈으로 보고나면 더 후련히 보내줄 수 있다. 마치 보정을 지워내는 과정처럼 이쁘게 포장된 추억의 민낯을 봄으로써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 아름다운 완성을 맞이하는 것이다.


눈물을 쥐어짜는 법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눈물 연기를 위해 횡경막을 이용하는 법. 감정과 더불어 그 벅차는 감정을 재현함으로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방법. 온종일 따라해도 흐르지 않는다. 모든 감정을 휘몰아치듯 흔들어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바람이 휘몰아쳐서야 흔들리던 것이 사람이 쥐고 흔든다고 달라지겠는가. 눈물 연기는 어렵다.


후회는 선택을 하기 전 섣부른 판단의 댓가일까. 선택을 하고 난 뒤 찾아올 후유증의 고통이 너무도 큰 까닭일까. 무언가를 놓친 것이 아쉬워 허공에 손질해봐도 잡히지 않을텐데 그냥 스스로를 괴롭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았다고 반드시 반대의 것을 잡게 되는 것이 아닌데. 선택에 대한 책임이 곧 후회를 부르고 무겁고 많은 책임을 져볼수록 수월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무표정으로 참을 수 있는 것은 그에대한 증명과 같은 것일까.


때론 바보가 되는 것이 행복하다. 아무런 효율과 상관없이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그 기분 그대로 행동하는 것. 그런 순간의 쾌락은 삶을 썩 괜찮게 살아가게 해주는 것 같다. 꽉 잡혀 살다보면 숨 쉬기가 힘드니까.


고기를 먹고나면 나는 그 냄새가 지독해 옷을 널어둔다. 분자 단위로 공기 속으로 흩어지는 냄새가 옅어질 때까지. 내가 즐거운 식사를 마쳤다는 증거와 같은 깃발이 보기 좋게 걸려있다. 늘 누군가와 함께한단 그 사실. 고기의 따뜻함은 나누는 것이다. 이런 추운 겨울일수록.


생뚱맞은 사람과 연락이 닿으면 당황과 반가움이 섞여 이상한 반응이 튀어 나오게 된다. 이름조차 어렴풋이 떠올리게 되던 그 사람이 갑작스럽게 내 인생에 튀어나오면 누구나 놀라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그 반가움도 잠시 이제는 내 인생 앞마당에 누군가를 추가하기엔 고민이 많이 필요하다. 잠시 들이기엔 내가 들여야 하는 정성과 시간이 아쉽고 그렇다고 오랫동안 들이기엔 이제 그 마당에 자리가 별로 남지 않는다. 분명히 반갑지만 반갑지 않은 그런 사람. 갈수록 늘어나는 것 같다.


들쭉날쭉하는 체중이 달갑진 않지만 빠지기만 하는게 아니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유없이 체중이 급락하면 아픈 것이 아닐까하고 쓸데없는 걱정부터 들어서는 정신상태에겐 어떤 변수도 주지 않는 것이 가장 맘 편한 백신이다. 몸도 늘 컨디션이 좋아야 하고 주변 물건은 늘 고장나지 않는 상태여야 하고 도로는 늘 사고가 나지 않아야 한다. 돌발상황만큼 지독시리 짜증나는 것이 없지만 그 모든 것을 대비하며 살아갈 수 없는 노릇. 대비해야 할 것과 대응해야할 것에 대한 구분이 매우 중요하다.


가끔 취미를 어느정도 이상으로 파고드는 것이 좋지 않을까란 생각이 늘 든다. 가볍게 끝내는 것이 아니라 작정하고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 심도깊게 파고들어 전문가 못지 않은 전문성이나 정보력을 가져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든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어떤 분야에서든 뇌를 쉬지 않고 굴리기에 좋을 것이고 그리 된다면 꽤나 멋지지 않겠는가. 그럴만한 취미부터 정해보자.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생각보다 필수가 아닌 경우가 많다. 없어봐야 없이 살 줄 아는 것이고 있어보기만 했다면 의존성이 짙어진다. 사소한 물건과 습관에 의존하는 것부터 내려 놓는 것이 결국 자유로워 지는 것이다. 반드시란 말이 다리를 붙잡는 족쇄가 된다는 것을 분명히 명심한다. 강해진다는 것은 나의 힘보다도 나의 짐을 덜어내는 방법을 아는 것.


가끔은 나의 결함처럼 여겨지는 것들을 뒤늦게 발견하기도 한다. 아무런 문제 없었던 것 같던 내 모습이 누군가의 시선에서는 문제로 받아들여진다. 반대로 나도 그런 행위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문제없이 지내던 중에 내게서 그것은 고치는 것이 좋다는 조언을 듣게 된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처음엔 차를 가져오면 죄다 고치고 난 뒤에 타야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정비사들의 입장은 달랐다. 대부분이 고장나면 그때 끌고와서 고치라고 말씀하셨다. 대비보단 대응. 그런거 같다. 가끔 문제들이 휘몰아 닥칠 것 같으면 그저 좀 기다렸다가 내 앞에 떨어진 것부터 해치우는 것이 차라리 나으려나. 생각이란 연소반응이 과도하게 나를 소모하고 괴롭히는 것 같으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해야하는데 그 연습이 너무도 어렵다. 생각을 적당히 하고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한데 그것이 너무도 쉽지 않다.


가끔은 내 페르소나가 어땠는지 생각해본다. 다른 누군가처럼 굴었던 과거가 어땠는지. 내가 나이지 못했던 그런 시절에 나는 어떤 나를 연기 했었던가. 사실 아직도 완전하지 않는 나를 위해 완전한 연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다만 그저 그런 나도 나라는 것을 받아들였을뿐. 무수한 페르소나도 결국 나다. 내가 아닌 것은 없다. 그러고 싶은 나의 모습도 내가 하는 행동이니 나일뿐. 그것이 내가 아닌 무언가일리가 없다.


정성스레 빗어내는 것도 일이다. 나르시스트의 친절한 척도, 소시오패스의 위하는 척도, 다 알고 있는데 모르는 척 하는 것도 모두 정성이다. 숨쉬듯 몸에 베어 있어도 결국 공을 들여서 연기해야 하는 것이다. 내 근처에 있는 나와 결이 맞지 않는 사람들의 그런 모습들이 마냥 싫은 것은 아니다. 다 그러고 싶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 그러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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