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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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배우는 필수 교육과정 속에서의 교과서는 생각보다 역사가 짧다. 몇년이 지나면 개정되고 바뀌기 바쁘며 생겼다가 사라지는 내용이 수도 없이 많다. 그렇게 많은 내용을 배우지만 정작 사회에 내던져지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한참이나 많다. 금융이나 경제적인 전반에 대한 내용은 기본이고 당연하듯 대학에서 배울 걸 상정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대학에 대한 교두보로써 작동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대학은 교양이란 이름 하에 기본적인 인문학과 윤리를 가르치고 생각을 가다듬게 하며 자유선택으로 필요에 따른 공부를 하도록 한다. 물론 그런 도구를 제대로 활용하는 경우는 드물며 더군다나 교양은 가급적 듣지 않거나 최대한 결석을 이용하는 수업이 되어버린다. 우리가 그만큼 얼마나 기본적인 인문학적 수준이 미달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학문적으로 뛰어나나 인간으로써 뭔가 모자란 그런 부류. 학문의 양과 질이 인성과 비례하지 않는. 간혹 공부만 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이가 되어버리는 그런 사례가 허다하다.
어른들이 가르쳐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경제적 부양을 위해선 필연적으로 집을 비우고 아이를 일정 시간 이상 보육기관이나 학원 등에 교육을 위임해야 하며 집에 돌아와선 그런 체력이 남아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갈수록 아이의 교육을 직접하지 않게 되는 요즘 현대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에 대한 교육이 모자라게 되는 것 아닌가 생각들기 시작한다.
어렸을 적 태권도에서 배웠던 기본적인 예절과 예의. 올바름이란 말이 때론 편견이 될 수 있다지만 적어도 어긋남은 막아줄 수 있던 그런 2차 교육기관이 꽤나 효과적이었다. 그와 비슷하게 역할을 할 수 있는 학교 외의 교육기관이 사실 종교가 아닐까 생각한다. 종교란 기본적으로 왜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아무런 목적도 방향성도 없던 과거의 이들에게 한줄기 기준이 되어주던 매우 강력한 철책이었다. 비록 약자의 도덕이란 이름 하에 공격당하기도 하였지만 절대 다수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어느정도 이로운 작용을 한 것은 사실이며 그 가르침들이 서로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가기에 종교에 임하지 않더라도 가르침을 배우는 것 정도는 꽤나 도움이 되는 편이다. 비록 그렇지 않은 종교도 있다만.
AI덕에 좀 더 수월한 검색이 가능해진 덕분에 이런 말들을 쉽게 엮어서 가져오게 하고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 말들을 다시 해석해달라고 하진 않고 직접 들고와 손질하고 조리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한다. 모든 가르침은 시대와 상황, 맥락에 맞게 해석할 필요가 있기에.
질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되게 특이한 불교적 가르침을 알려줄래?"
단순히 받아들이기보다 생각을 해볼만한 것들이 필요했고 그럴려면 평소에 접해보지 않은 것이어야 했다. 그리고 아래의 내용들은 출력받은 결과물들이며 그에 대한 나의 해석이다.
-“깨달음은 수행의 결과가 아니다”
불교는 보통 속세를 떠나 수행을 한다고 한다. 열반을 얻고 진리를 깨닫기 위함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말은 곧 결과에 집착하지 말란 말과 같다. 목표를 두고 그 목표를 향할수록 아이러니하게 목표와 멀어짐을 말한다. 깨달아야 한다는 집념이 깨달음과 멀어지게 된다면 결과보단 과정에 집중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모든 삶의 과정들은 늘 예상하던 것과 다른 결과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고 틀어진 강물을 억지로 비트는 것보다 도달한 그곳에서 얻는 것을 즐기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늘 내가 두려워하고 싫어하던 선택지에서도 행복과 얻어가는 것은 있었다. 실망과 절망을 안겨다 줄 집착보단 조금 더 내려 놓는 것이 좋은 것이다.
-"번뇌가 곧 보리다” (煩惱卽菩提)
여기서 보리는 깨달음과 같은 것으로 번뇌가 잘못된 것이 아님을 말한다. 단순히 분노에 대한 잘못됨을 따지기보단 그 분노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가끔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슨 감정이고 왜 이런 감정이 느껴지는지 명확히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때가 있다. 나 자신을 알려면 그 문장을 구사하기까지 고민하고 끝없이 탐구해야하는 것처럼 번뇌도 그런 연유로 시작부터 그 흐름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먼저란 것이다.
-“자비심은 타인을 위하지 않는다”
이전에도 다뤄본 적 있는 말이다. 이타적이란 이기심. 자비란 남을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것을 말한다. 누군가를 가엾게 여기는 것부터가 자기중심적 생각이 기저에 깔린 표현이다. 누군가를 도와주어야겠다는 오만함이 선행된다면 그것은 이타심이 아니다. 이타심이란 탈을 쓴 이기심에 비롯된 것이다. 누군가를 도움으로써 그런 선택을 하는 나에게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 이타적 이기주의다. 불교에서 말하는 진짜 이타심은 그런 고민이 아닌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행동을 말한다. 생각을 거치지 않은 도움. 계산적이지 않은 것. 가장 순수할 때에 비로소 이타심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순수하지 않음이 나쁘단 것은 아니다. 어찌 되었건 그 결과가 누군가를 위한다는 것 자체가 적어도 받는 이에겐 달라지지 않는 사실이기에.
-“업(業)은 운명이 아니라 습관이다”
업은 생각, 말, 행동으로 지은 원인이라 한다. 초기불교적 관점에서 업은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현재 지금으로 나오는 것 그 자체라고 설명이 덧붙여 있었다. 기본적으로 업보란 과거의 일로 일어난 영향이 현재에 미치는 것을 말하지만 불교에선 업을 현재 그 자체로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업이라고 한다. 화가 날때마다 반복되는 행동은 업이 쌓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업 그 자체가 작동되고 있는 것으로 본다고 하였다. 이는 모두 업 자체를 운명이 아니라 자유의지, 선택으로 보기에 이뤄지는 것으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하라는 말이라고 보여진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선업을 행하란 말이 아닐까.
-“공(空)은 허무가 아니라, 책임의 극대화다”
허무주의 관점에서는 이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고 받아들이지만 낙관적 허무주의에서는 그렇기에 삶의 주인인 내가 목적을 정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그와 더불어 내가 선택한 목적이라면 모두 다 내 책임이 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늘 말하는 모든 것이 공하고 고정되어 있지 않다 말한다. 관계로 정의되는 것이기에 내가 어떤 식으로 선택하고 살아가는지가 무척이나 중요하다. 모든 것은 불변일 것 같지만 결국 변하고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관계 맺는지가 중요하다. 그 속에서 한가운데 있기에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 삶에 책임이 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 삶은 내가 책임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올바르게 살으란 뜻이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상당히 쇼킹한 말이다. 아마 맨 위의 깨달음이 결과가 아니란 것처럼 부처가 이상적인 목표가 되어선 안된다는 것 같다. 결과가 부처로 정의되는 순간 집착이 된다는 것이다. 그 밑에 추가 설명글이 되게 마음에 들었는데 그 내용은 '진리는 의지처가 되는 순간,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윤회에서 벗어나려는 욕망도 윤회의 일부다”
다소 조금 어려울 수 있는 말이다. 윤회는 기본적으로 삶의 바퀴같은 순환을 나타내는 것으로 전생의 업과 번뇌로 인해 무한히 삶을 반복한다는 것으로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야만 그 윤회를 끝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욕망도 윤회의 일부란 것 또한 위의 목표지향적인 성향을 경계하려는 기본적인 불교의 말과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추가 설명에 있던 '해탈을 내려놓는 순간, 해탈이 드러난다.'고 말하는 것처럼 무언가를 좇는 것이 아니라 하다보니 얻어진다는 늬앙스의 말이 많다.
불교는 전체적으로 내려놓음이 굉장히 중요하게 비춰진다. 번뇌와 욕심같은 것을 내려놓고 좀 더 자유로워지는 것. 나를 괴롭게 만드는 것은 나라고 한 것처럼 욕심이 집착이 되고 그 집착으로부터 괴로움이 나온다는 것을 늘 강조한다. 살아가며 맞는 많은 괴로움과 슬픔들은 늘 기대를 동반한 뒤 찾아온다. 어떤 것에 대한 기대가 실망이 된다. 타인에게 거는 기대는 그렇지 않아도 될 미움이 생겨나게 되고 그 원인은 또한 나 스스로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아무 것도 고정되지 않았기에 그 모든 것이 덧없다 하지만 삶의 의미를 더욱이 부여하게 된다. 서양의 허무주의와는 다르다. 그렇기에 불교의 인자함이 나타나는 것이다.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 나이고 책임을 다하며 삶의 의미를 다잡을 것. 나는 성경도 가볍게나마 접해보고 다른 종교도 조금씩 들여다 봤었지만 늘 그 중심은 불교로 돌아온다. 모든 것이 나의 삶에 끌어들일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조금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 배워서 써먹는 정도로는 더할나위 없게 좋은 가르침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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