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에서 배워보기 - 기독교편

나는 무교다

by 노예올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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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중 어느 순간에서 종교를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특히나 오랜생활 수감된 죄수가 회개하며 독실한 신자가 되는 것은 영화 속 클리셰로도 통용된다. 어긋난 길을 걸었던 이들이 올바른 궤도로 돌아올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보듬어주는 곳이 종교의 역할로 많이 강조된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같은 교회에 오는 누군가가 소년범이었단 이유로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의 글을 접한 적이 있다. 과연 그들은 교회의 역할이 뭐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번 편은 전을 이어서 기독교편이다. 동일한 방식의 질문으로 7가지를 받았고 마찬가지로 정리해보겠다.


-"인간은 고쳐쓰는 존재가 아니라, 죽어야 할 존재다."

꽤나 적나라하다. 여기서부터 막혔다. 저 뜻을 도저히 온전히 해석할 자신이 없어 급하게나마 지피티를 통해 해석을 요청했다. 성경을 온전히 정독해본 적이 없어 앞 뒤 맥락없이 해석하기엔 너무 리스크가 컸기에. 여기서부턴 지피티가 알려준 내용을 정리함과 동시에 나의 생각을 적어보겠다. 직접적으로 내용 지적을 하겠다면 겸허히 받아들이겠다.


기본적으로 기독교의 인간관에서 인간이 지닌 문제는 무지가 아니라 자기 주권을 가진 것이라 한다. 즉 도덕적 실패가 아니라 통치권 탈취다.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혀 죽은 인간의 옛자아는 내 인생의 최종 결정권을 지닌 나를 말한다. 그렇기에 기독교에서 회개는 도덕적 반성이 아니라 사고의 전환, 통치권을 하느님에게 넘기는 것. 믿음은 불안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불안을 견디는 것. 구원은 결국 내가 나의 왕이기를 그만두는 것이라 한다. 내 삶의 기준을 내가 직접 정하는 오만한 행동,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이 문제고 인간의 과도한 자기 확신에 대해 경계한다.


그렇다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진 않는다. 다만 자유에 의한 선택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것인가 라는 물음을 던지고 실제로는 무언가에 끌려가는 상태라 말한다.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는 모든 선택에 대한 자유라기보단 내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선택하는 것이라 한다. 즉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 남을지 그것을 내려놓을지 선택할 수 있음을 부정하진 않는다. 그렇기에 심판은 죄를 벌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삼는 상태를 확정하고 그것을 '영원히' 존중하는 것이라 한다.


인간의 자유란 진정한 자유라기보단 욕망에 의해 이끌리며 살아가며 외력에 의한 선택이 아니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분명히 욕망의 노예가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모든 결정을 내가 하고 그에 대한 책임, 감당을 하며 동시에 의미를 부여해야할 때에 가장 불안해진다고 한다. 결국 진정한 자유의지는 무엇에 나를 맡길지 선택하는 것이라 말한다.


자아 자체를 부정하는 불교에선 그 과정에 집중하라 한다. 선택을 하게 될 방향을 가르쳐 줄 주인이 아니라 내가 그런 선택을 하게 되는 과정을 살피며 조건화 된 반응이라 한다. 이는 어찌보면 둘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자유롭다 여긴 선택이 진정으로 자유로운가, 라고 묻는다면 결국 살아오며 경험하고 느낀 부분들이 원인이 되어 나를 이끈다는 것. 이전에도 지겹도록 글에 써넣은 나는 나 자체보다 내 기억이 나를 정의한다는 것과 비슷하다.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종교인의 선택 자유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말하며 동시에 인간은 원래 어쩔 수 없는 것처럼 서술한다. 이전에 예수와 관련된 자료를 접하며 그곳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알기에 언젠가는 일어날 신격화를 경계했다고 하는 말이 생각난다. 그렇기에 여러 상징보단 자기 스스로가 유일한 상징이 되어 그에 따른 말을 따르도록 한다는 말이 생각나는 것처럼 전체적으로 인간의 본성은 고쳐쓸 수 없는 것이란 것을 강조한다. 그렇기에 주인(가르침,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줄)을 선택하라고 얘기하는 것이고 심판이며 구원이며 그를 중심으로 돈다.


이 내용을 읽어보면 위의 질문을 해석이 된다. 인간은 원래 그렇기에 존재 방식-자기 주인 선택-에 대해 부정하는 것이다.


-"회개는 반성이 아니라 세계관 붕괴다."

위의 내용에서부터 정리하자면 마음이 완전히 바뀌는 것. 내 삶의 주인이 나라는 것을 내려 놓음에 대한 것이지 반성이 아니다.


-"믿음은 안정 장치가 아니라, 안전망 제거다."

믿음은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맡기는 것이다. 이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늘 그렇지만 믿음과 이해는 다르다. 절대적으로 눈에 명확히 나타나는 진실이 아니기에 믿음이라 하는 것이다. 이해를 해도 믿지 않을 수 있고 믿으나 이해를 한 것이 아닐수도 있다. 다만 늘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생각해야 하는 것은 맞다. 설명되지 않은 공백을 견디는 것. 내가 불안하여 둔 안정망을 제거하며 몸을 맡기는 것이란 뜻이다.


-"은혜는 공정하지 않다."

이는 사실 살면서 많이 느끼게 된다. 인간이 만든 도덕은 생각보다 완벽하지 않음을 공격한다고 보여진다. 평등을 얘기하지만 누군가는 늘 조금 더 평등하며 그런 사실에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럴거란 믿음을 내려놓는 것도 나쁘지 않다.


-"자기를 부인하란 것은 자기 혐오가 아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란 것을 받아들이란 것으로 위에 서술된 것과 이어진다.


-"하느님은 설명을 주진 않는다."

이는 이유를 물으려 하는 태도 자체가 인간중심적이라고 한다. 마치 절대적으로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일어난 일에 원망해서 의미가 없다는 말같다. 반대로 이유를 묻지 말고 받아들이란 말. 현실을 부정하지 말처럼 들린다.


-"구원은 변화의 시작이지 완성이 아니다."

늘 또다시 흔들릴 수 있기에, 넘어질 수 있지만 다시 붙잡는 것이 핵심이라 한다.


지극히 무교인 사람의 관점에서 해석해보자면 종교의 신이란 것은 결국 주인에 대한 숭배를 위함보다는 그것은 도구로 이용해 쓰여진 가르침을 따를 수 있도록 사람의 본성을 '이용'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하느님은 곧 우리가 살면서 알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한 대명사이며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집착하기보단 내려 놓으며 받아들일 수 있도록 신이란 자를 세워둔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굉장히 인간에 대한 이해가 뛰어난 예수의 철저한 설계로도 볼 수 있겠다. 인간의 그런 부분을 철저히 파해쳐서 이해하고 해탈하라는 불교는 쉽게 닿을 수 없는 경지이지만 그에 비해 조금 무지하더라도, 어리석더라도 자연스럽게 따를 수 있도록 장치된 기독교가 확실히 더 많은 이들을 품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독교는 배우면 배울수록 어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말 치밀하게 사람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과연 인간의 창조주란 것이 있지 않을까란 경외심까지 들게 만드는 그런 것이 있다. 결국 기독교도 불교도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깨달음이 동반된 삶의 지침서로써 완벽히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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