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적 생각 해보기

Wasted nights - One ok rock

by 노예올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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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부정적으로 생각해본다. 모든 것이 최악으로 흘러갔을 때 나에겐 도대체 무엇이 남을까. 어디까지가 내가 감내할 수 있는 마지노선인가. 내 모든 선택이 감히 최악이라 불리울만한 행동들만 불러왔다고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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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사방이 낙엽이다. 신발 너머로 느끼지 못할 그 바스라짐이 이어폰 너머로 넘어오지 못한다. 나에겐 이 계절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시기보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가가 더 중요한 순간이다. 끝없이 순행하는 시간을 거스르지 못하니 내가 있을 곳을 끝없이 옮긴다. 세상은 가느다란 통로가 아니기에 갈 곳은 무궁무진하고 경우의 수는 비가산하다. 사실 무언가를 예측해본다는 것은 오만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늘 뜻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고 제대로 되는 척조차 하지 못했다. 기대란 계단 끝엔 늘 실망의 미끄럼틀이고 바닥에 내려온 난 다시 오르기가 너무도 싫었다. 감정에 원망이란 감정을 느끼며 가끔은 사이코패스가 부러웠다. 수치심이란 삶에서 가장 무거운 짐이며 그것이 싫어 반대로 움직이려 한다. 슬픔과 공포보다 무서운 부끄러움은 해야함보단 하지말아야 함에 집착하게 만들고 그렇기에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곳에서 진정한 평화를 느낀다.


일을 한다는 것이 힘든 게 아니라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함이 힘들고 그럴 능력이 없는 나를 마주할 때마다 괴롭다. 나태랑 싸워 이기는 날은 손에 꼽고 늘 약속에 힘들어하지만 나 스스로를 칼로 찌리는 일이란 것을 잘 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존재는 결국 나고 스트레스를 주는 존재도 나다. 절벽에 오르지 않은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때보다 더 높은 산에서 땀을 흘리며 살아가는 것 같다. 속절없이 꺾여버린 내 마음은 아무 것도 안하기를 선택하였고 그 결과는 곧 글쓰기로 이어진다. 그렇게 습관이 된지 오래다.


일어나지 못한다고 누운채로 괴로워하며 앉을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후회는 없지만 늘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생각이 많다는 것은 내게 내려진 가장 큰 저주다. 분명 도움도 많이 되었지만 삶에서 늘 힘들 때 곁에 있던 것은 생각이다. 그렇기에 도망친다. 생각으로부터 도망칠 것들을 찾는다. 가끔 그렇게 하나 둘 못하던 시기의 나를 떠올리면 참으로 불쌍하단 말이지. 가끔 잠에 들지 못할 때면 스위치를 끄듯 생각을 멈추는 상상을 한다. 눈을 감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것처럼 그만 생각하고 싶단 생각에 무한하게 빠져들면 무척이나 괴롭다. 생각이 많은 것은 난 분명히 저주라 생각한다. 단순하게 살아라 제발.


어렸을 적 탈이나면 온종일 배를 붙잡고 뒹굴거렸다. 유달리 크고 선명했던 그 고통은 성인이 되어가면서 잠잠해졌다. 복통쯤은 당연히 익숙해졌고 그렇게 사소한 고통엔 무감각해져 갔다. 선천적인 발의 특수함에 오래 못 걷던 내 발도 고통쯤은 익숙하다. 스쿼트만 하면 찝히던 골반도 그러려니 한다. 원인을 알 수 없으니 해결보단 받아들임이 더 쉬웠고 가끔은 이 무던함이 독이 되어 모든 것들을 그냥 바라보고만 있다. 초점없는 내 눈, 사진 속 그 눈이 참 싫더라.


오래된 사진을 지우다보면 추억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속의 내가 싫어 지우고 있단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가 보기 싫으니까. 특히 사진 속 내가. 나는 평생 내 얼굴 안보며 살고 싶다.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나에게 가장 객관적이지 못하기에.


돈에 무감각하지만 돈에 묶여 살아간다. 늘 하고 싶은 것과 사고 싶은 것은 많지만 돈을 버는 것에는 큰 집착이 없다. 배는 늘 고프지만 특별히 뭘 먹고 싶진 않다. 언제나 변함없고 한결같은 그 마음은 새로운 선택과 도전으로부터 받을 스트레스나 손실도 싫어 늘 먹던 맛의 아이스크림을 꺼내든다. 그럼에도 늘 새롭게 하고 싶은 것들은 생겨난다. 그렇게 쌓아두고 살아왔지만 시간이 해결해주진 않았다. 흥미는 잠시 안보일 뿐 늘 그곳에서 언제든 굶주려 있고 어떻게 해서든 맛을 보고 만다. 여전히 난 무언가에 배고프고 그 마음이 끝나지 않을 것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살아감의 방식은 지구에 존재하는 생명의 수 만큼이나 다양하고 그에 따른 가치관은 여태 태어나고 죽어나간 인간만큼이나 많다. 지금 내 인생이 인류사의 시작도 아니고 끝도 아닐뿐더러 무언가 중요한 변곡점에 서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나의 선택이 지구적 사건에 얼마만큼 영향이 있을지도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다. 옛날엔 그 사실이 아쉽고 때론 서러웠는데 무수한 선택과 이어지는 책임들 속에서 이제는 차라리 다행이다라는 생각뿐이다.


별거 아닌 일들이 사실 별거처럼 느껴지기 시작하고 중요하다 여겼던 것들이 뒷전이 되면 내가 미쳐가고 있구나 자각한다. 추위에 땀을 흘리고 하지도 않은 운동에 근육통을 느끼며 나는 죽어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그러다가 이내 다시 눈을 뜨면 별거 아니란듯 다 지나간다. 그렇다는 것을 알기에 아무렇지 않아진다. 어차피 다 지나갈 것이기에. 고통, 슬픔, 분노 심지어 행복마저도 그저 순간이다. 아무렇지 않은 지금이 디폴트다. 흔들리는 건 내 눈동자일뿐 마음이 아니다.


누구보다 바빠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다가도 이 순간을 만끽하고 싶다. 아무 것도 아닌 지금 이 순간. 이 시간에 난 그저 아무 것도 아닌 먼지다. 가끔은 아무도 날 찾지 않음에 괴로웠던 과거를 생각한다. 기억되지 않을만한 그런 삶인가 생각하던 그 시절에 나는 어렸다. 이제는 그런 외로움이란 단어를 부정의 바구니에서 긍정의 바구니로 옮겨 담는다. 나는 가끔 그 고독을 즐긴다. 아무와도 연결되지 않은 그 순간. 그래 이 순간이 영원하진 않을테니까. 내일은 또 누군가와 얘기하며 내 삶의 증거를 뿌려댈테니.


돈은 생각보다 나를 괴롭히지 않지만 날 놓아주지도 않는다. 언제든 나를 꽉 붙잡고 있다. 하긴 뭐 주어진 환경을 뒤엎을 힘이 없다면 순응하며 사는 것이 맞다. 누군가의 손해를 통해 돈을 벌지만 않는다면 어떻게 해서든 살아가면 된다. 일용직을 하던 패스트푸드점 매니저를 하던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지금 하던 일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 하여도 나는 괜찮다. 아니 지금 그렇게 생각하는거지만 그 상황에 내가 온다면 나는 부러지지 않을까? 부러지지 않겠다고 마음을 편히 먹는 지금 이 마음이 가장 절박하고 고대한다는 증거일까? 가끔 나도 이런 나를 모르겠다. 부러지면 어떻게 될까. 나도 끝없는 부정에 갇히게 될까.


스쳐간 얼굴과 이름의 연결고리가 끊어져 세글자 중 두글자 떠올리기가 힘들어질 때가 되면 내 삶의 용량이 모자라 과거를 지우고 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든다. 그래 어차피 들고가지 못할 기억들인데 왜 내가 쓸데없이 투자해야하는가 란 생각도 듦과 동시에 후회아닌 참회도 돌아온다. 반성과 이어지는 내려놓음. 나를 안다는 것은 어쩌면 내 주제를 알게 되는 것. 더이상 까불지 않게 된다는 것. 배짱과 깡은 모름에서 오는 것이고 그렇기에 그것은 젊음에 국한된다. 나는 이제 슬슬 돌아가기 힘든 강을 건너고 있지 않을까.


자라지 않는 무릎 높이의 나무를 하루종일 보고 있다. 내가 쳐다본다고 달라질 것도 아니고 물을 더 줘봤자 썩기만 한다. 그렇게 내다 버린 나무가 여럿. 이제 생각해보니 그 나무들. 내가 본다고 햇빛에 가려진 시간만큼이나 지체되었고 썩어가고 죽어갔다. 식물 키우는데에 참으로 소질 없음을 식물로부터 관심을 끄면서 깨달았다. 그리고 어쩌면 몇 나무들은 그 높이가 끝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관계란 그런 것이다.


아직 살면서 내가 밉다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 내가 싫다는 사람도. 나를 괴롭히는 사람도. 그렇기에 두려웠다.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게 될 가능성이. 날 싫어하게 될 가능성이. 물론 티를 안내고 조용히 있는 걸수도 있겠지만 그럴 용기가 아직 없다. 아니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른다는 것이 맞겠지. 나는 못날 자신조차 없다. 내가 어느정도로 못난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나타난다면 나는 어떤 멍청이가 되어버릴까.


뇌는 소모적이다. 끝없이 연료를 태우고 멈추지 않으려 달린다. 이는 심장과 동일하나 다만 심장은 자율적이지 않다. 허나 가끔은 뇌가 진짜로 자율적일까란 생각이 들곤 한다. 내가 내리는 선택의 근거가 이미 내 뇌에 들어찬 생각들로 가득한 것인데 태어날 때부터 있던 기질들과 살아오며 환경으로부터 습득한 것들의 결과가 선택으로 나타나는 것일텐데 이것이 자율성인걸까 아니면 그렇게 짜여진 프로그램대로 정해진 답변을 출력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이 들게 된 것은 이미 굳어버린 사고에 의해 고칠 의지도 생각도 노력도 않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과연 인간인가 감정을 학습한 기계인가 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나도 결국 저리 될까.


초등학교 시절 같은 반 누군가의 아버지가 자던 중 조용히 돌아가신 일이 있었다. 아직 부모의 죽음의 고통과 상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나이에 그저 그렇게 넘겼다만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 아니겠는가. 그 친구는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죽음이란 그런 것이다. 고통없이 가고자 하는 바램. 잠을 자던 중 조용히 끝이 나길 모두가 바란다. 하지만 진짜로 내가 오늘 잠들고 다음 날이 없으리라 희망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렇게 죽은 이는 죽는다는 자각조차 없이 영원과도 같은 우주의 시간을 찰나처럼 느끼리라. 사후세계 따윈 믿지않고 차갑게 자연으로 환원되는 우리의 의식임을 알기에 더욱 소중하고 고유하다고 여겨진다. 그런 생각을 가진 이후로 절대, 사소하게라도 절대 죽음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가끔 도피를 꿈꾸는 자들과 얘기를 나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아무도 없는 무인도로 넘어가 먹고 자는 것에 걱정없는 말 그대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바란다. 사실 사람들은 사회의 진화에 비해 너무 뒤쳐져 아직도 본능적으로 수렵생활을 꿈꾸는 것이 아닐까. 마땅히 하고픈 일이 없고 그러나 먹고 살기 위해선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을 하며 생전 연관 없으리라 여겼던 누군가의 듣고 싶지도 않은 말들과 지시를 들어가며 때론 인간적인 대우조차 받지 못하며 살아간다. 신세는 여기서 더 나아지기 힘들 것 같고 이 고통은 끝이 없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일을 2개씩 해야 겨우 돈을 모을 수 있고 사회의 미래는 어둡단 말에 어깨에 힘은 끝없이 빠진다. 차라리 이럴 바에 자연으로 들어가겠단 마인드다. 나도 부러지면 그렇게 되겠지.


생각이 많으면 괴롭지만 끝없이 기름을 부어본다. 한바탕 쏟아내면 한결 났다. 불안을 잠재우려면 끝없이 시뮬레이션 돌려보듯 부정적인 것들을 끝없이 돌려가며 내 불안을 잠재운다. 괴로운 생각이나 떠나지 않는 것들이 있다면 질릴 때까지 되뇌인다. 생각의 저주를 역이용해 공략해버린다. 이러질 않으면 괴로운 건 나다. 모든 고통은 결국 나로 인해서이며 내가 괴롭다 여기니 괴로워지는 것이다. 내가 나를 잘 알고 잘 다루면 아픔도 슬픔도 없다. 내가 지금 어떤 것인지 잘 알면 나 자신과 솔직한 대화를 나누면 편안해진다. 스트레스는 모든 죄악의 시작이자 끝이기에 이렇게나마 해방되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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