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글자 에세이 - 여(旅)
핸드폰이 없는 여행에는 기억과 음식과 글 밖에 없다. 왕가위 영화에 푹 빠져버린 덕심과 코로나 이후 혼자서 첫 해외여행이라는 들뜬 마음으로 떠난 홍콩 여행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사진과 영상을 찍어댔지만 마지막 날 공항에서 핸드폰을 도난당하며 모든 것이 강제로 비워졌다. 미니멀리즘을 지향한다지만 이렇게까지 타의적으로 모든 것을 뺏기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다. 덕분에 눅진한 삼수이포의 골목과 반쯤 내다보이는 헐렁한 철장문이나 벌집처럼 눌러앉은 흉흉하고 낭만적인 하우스들, 이방인의 걱정을 받는 빨랫감과 첵랍콕 공항의 희미한 단내까지, 무언가를 보고 들으면 떠오르는 기억이 아니라 기억만으로 떠올릴 수 있는 기한 없는 메모리를 남겼다.
4박 5일 홍콩 준비물
여권
홍콩달러(현금) 2000 HKD
신용카드
E-SIM (5GB 7일)
멀티탭
보조배터리
필름카메라
세면도구
안경렌즈
상비약 생리컵 생리대
화장품
옷 잠옷 속옷
슬리퍼
우산
장바구니
여행 테마: 영화 빵 서점 고양이
2024.03.08 1일 차(금)
김해공항-홍콩 첵랍콕 국제공항-YHA Mei Ho House Youth Hostel-Yuan Ji Yun Jia 완탕면
목표: 홍콩 거리 만끽, 맛있는 저녁
인천이면 몰라도 부산 사람에게 홍콩이란 매일 있는 일정이 아니기에 쉽지 않은 여정이다. 홍콩익스프레스 항공으로 화, 금, 일요일 주에 세 번 하루에 한 번 항공편이 있다. 2시 10분 출발로 부지런히 도착하기 위해 점심 전부터 김해 경전철에 올라탔다. 홍콩익스프레스 항공은 e-Tiket이 따로 출력되지 않아서 따로 확인이 필요하다면 앱을 보여주면 되겠지 했지만 공항으로 가는 내내 로그인 오류가 떠서 사람 속을 타들어가게 만들었다. -이때 이 항공의 위험함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다행히 출국 수속 체크인 할 때 여권만 제출하고 별다른 문제없이 좌석 지정과 출국 수속을 밟았다. 저가 항공답게 기내수화물 7kg라는 빡빡한 규정이었지만 홍콩의 날씨는 경칩을 지난 한국보다 최저 온도가 10도는 높기 때문에 챙겨갈 옷이 가벼워 5.5kg으로 무난히 통과했다.
외국 저가항공은 처음이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탑승하고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이륙 후 이십 분 동안 멀미약을 먹었어야 했나 아니 그것보다 안전하게 도착은 할 수 있나 싶어 졌을 때 잠잠해졌고, 도착 한 시간 지연으로 허리의 고통 속에서 홍콩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숙소로 가는 버스를 대기하다 시간이 남아서 간식을 사기 위해 자판기에 옥토퍼스 카드를 테스트해봤는데 결제는 되고 과자가 나오질 않았다. 현금 자판기도 아닌데 이렇게 먹튀를 당할 수가 있냐고. 당황하는 와중에 뒤로 줄은 점점 서기 시작했고 옆에 있던 외국인이 괜찮다며 한 번 더 해보라고 도와준 덕분에 초코 킷캣을 겟 할 수 있었다. 근데 버스가 떠나가버렸다. 택시를 탈까 싶었지만 이미 퇴근시간과 겹쳐서 허망하게 킷캣을 먹으며 버스를 기다렸고, 7시가 넘어서야 카우룽 반도에 도착했다.
한국만큼이나 좁아터진 땅과 밀집된 인구덕에 홍콩의 집 값은 매우 비싸며, 그 점은 한량 관광객에게도 예외 없이 관통하기 때문에 혼자 여행하는 사람이 멀끔한 수준의 호텔에 머무르려면 상당한 경비가 깨진다. 침사추이의 어중간한 호텔을 잡았다간 바선생을 목격할 수 있기에 위생을 일 순위로 두고 게스트 하우스를 골랐다. YHA 메이호 하우스 호스텔은 화재로 집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 홍콩의 공공 주택 정책으로 지어진 호스텔이다. 침사추이에서 다섯 정거장 떨어져 있지만 조용하고 깔끔한 객실, 방에 화장실이 두 개이고 공용 주방과 식사 공간, 세탁실, 정원 공간이 있어서 여행 내내 이곳에 머물렀다. 체크인을 하자 출입 카드와 베개 커버를 받고 보증금 100 HKD를 지불했다. 영국식으로 표기된 홍콩의 건물 층수는 1층이 아닌 G층부터 시작하는데 떠나는 날까지 헷갈렸다.
저녁을 먹으러 가기 전, 애플페이로 등록해 두었던 옥토퍼스 카드에 현금을 충전하기 위해 세븐일레븐을 방문했지만 안된다는 뉘앙스의 중국어만 들려왔다. 광둥어인지 중국어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보통어 같았다. 영어로 물어봐도 자국어를 하며 내던지는 떨떠름한 시선에 기분 상했지만 '디스 이즈 홍콩'을 염불 하며 다른 편의점에서 충전했다. 예정대로라면 Man Kee Carkt Noodle에서 카트 국수를 먹어보고 싶었는데 바로 옆집도 맛집인 건지 대기 줄이 뒤엉켜서 혼란스러움이 극을 달했다. 내 사전에 배고픈 여행이란 있을 수 없기에 깔끔하게 포기하고 걷다가 유리 너머로 만두를 직접 빚고 있는 가게 발견. 손님도 거의 만석이라 들어갔다. 주문 후 새우와 게알이 들어간 완탕면과 옥수수 주스가 나왔다. 주스가 따뜻해서 내가 중국.. 아니 홍콩에 왔다는 게 실감 났다. 알고 보니 Yuan Ji Yun Jia는 홍콩에서 여섯 지점 정도 운영하고 있는 체인점이었지만 탱글한 새우살과 부들거리는 만두피가 맛있어서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였다. 주변의 마켓 거리를 구경하며 사진을 찍고 놀다가 편의점에 들러 복숭아 홍차와 두유를 샀는데 달달하지 않고 콩 본연의 맛이 났으나 비리지는 않았다. 콩 좋아 인간에게 안성맞춤 도시 홍콩.
2024.03.09 2일 차 (토)
숙소-베이크하우스-골목시장-싱흥유엔-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ifc몰-JP Books-맥도널드-Pottinger Stree-Hashtag-Chau Kee-트램 타보기-Cosmos Books Lt-숙소
목표: 차찬탱, 에그타르트, 중경삼림 촬영지, 서점, 트램 탑승
친구들에게 홍콩 에그타르트를 맛 보여 주고 싶어 최대한 마지막 일정에 베이크하우스를 방문하고 싶었지만 3월의 홍콩의 날씨는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원래 세웠던 계획을 뒤엎고 2일 차에 홍콩섬의 센트럴과 셩완을 방문했다. 사실 엑셀에 여행 계획을 세웠으나 카톡으로 담아 온 파일은 확장자 문제로 열리지 않았고 하루에도 흐림과 강풍과 이슬비를 반복하는 홍콩에서 계획 같은 건 불필요했다.
베이크하우스의 오픈 시간에 맞춰서 가는 길에 혹시나 웨이팅이 있을까 싶은 마음에 편의점에서 참치빵이라는 걸 사봤는데 말 그대로 단팥빵 같은 기본빵에 참치통조림이 들어간 빵이었다. 이 무슨 퍽퍽하고 비릿한 조합인지. 먹는 내내 참치가 샌드위치 빵에만 들어갔던 익숙한 조합을 고맙게 생각하게 되었다. 베이크하우스 앞에 도착할 즈음에 추적추적 비가 더 많이 내리기 시작한 탓인지 웨이팅이 많지 않아 세 번째로 도착해 에그타르트, 핫 크로스 번, 애플파이 쿠키를 테이크아웃했다. 따끈따끈한 에그타르트를 품에 안고 비를 피해 먹는데 말 그대로 행복이 전해지는 맛이었다. 하지만 냉정히 평가하자면 부산대의 에타리가 더 맛있는 것 같아. 아무튼 행복하게 요기를 채우고 떠나던 와중에 골목 시장에서 빨간 스카프를 두른 고양이를 발견했는데 말린 곡식을 판매하고 있는 가게에서 주인마냥 다리를 떨고 있는 모습이 아주 위풍당당했다.
홍콩에서 합석은 공기와 같은 거라고 하더니 싱흥유엔에 와서, 아니 싱흥유엔 이후로 계속 합석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테이블 중앙에 꽂혀있는 메뉴판을 보며 토마토 라면과 동윤영를 주문하고 연유번을 망설이고 있으니 가게 아주머니가 “빵! 맛있어!” 하며 한국어를 날리셨다. 하오! 원 브레드 플리즈! 음꼬이! 보통어와 영어와 광둥어가 볼품없이 섞여있었지만 여행 내내 이러고 다녔고 어지러운 손님 속에서 찰떡같이 알아듣는 현지인이 신기했다. 작동은 하는 걸까 싶은 찌든 선풍기는 쌀쌀한 날씨에 다행히 틀어놓지 않았고 테이블의 위생상태는 음.. 물티슈가 필수다. 토마토라면은 가히 토마토+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고 집에서 만들어보고 싶은 맛이었으며 동윤영은 밍밍한 맥심커피에 연유를 탄듯한 맛이었는데 애초에 아침부터 찬 음료+우유+단 커피 조합은 체질에 맞지 않아서 조금만 마셨다. 내 입은 오직 빵만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실패할 수 없는 조합이라 그런지 연유를 바른 번이 제일 맛있었다. 별거 아닌데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맛. 엄마가 조미김으로 싸준 밥 같은 맛.
배도 부르겠다 조금 걷고 싶었으나 바람이 심상치 않게 부는 통에 얇은 차림새가 여간 짐이 되었다. 바람막이라도 살 겸 IFC몰로 이동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다. 아니 올라타려고 했으나 에스컬레이터는 오전에는 하행, 오후에 상행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계단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중경삼림>의 주인공처럼 여유로이 고층 건물을 훔쳐보고 싶었는데 말이지. 대신 건물을 보수하는 인부들을 볼 수 있었는데 보행하는 외관을 철근으로 둘러싸지 않고 대나무로 정글집처럼 만든 모습이 흥미로웠다. 대나무가 그렇게 많나? 친환경 정책인가? 하는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백화점 입성. 아직 10시도 되지 않아서 오픈 한 매장이 없었기에 화장실 찾아 삼만리를 하다가 지쳐서 홍콩의 대관람차가 보이는 벤치에 앉아 찌끄러져 쉬었다.
높은 물가 탓에 홍콩에서 옷쇼핑을 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창 밖으로 나부끼는 야자수를 보고 교토에서 홀로 감기로 개고생 했던 지난날이 떠올라 만만한 자라ZARA로 들어갔다. 베이지 색의 귀여운 외투는 선물할 요량으로 하늘색 니트와 함께 골라 갔는데 옥토퍼스 카드는 결제가 불가능했다. 바보 지출을 완료하고 따뜻해진 몸으로 센트럴 거리의 JP Books 등 서점을 방문했는데 표지만 봐도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과 대충 말랑한 캐릭터들이 마음을 다독여줄 것 같은 힐링북이 베스트셀러라는 것만은 알았다. 규모와 진열은 영풍문고 정도였고, 친구들에게 선물할 문구류 구경이 목적이었지만 일본 제품이 대부분이었다. 홍콩에서 산리오를 사는 건 어딘가 잘못된 것 같아 다시 거리로 나왔다.
영화 <타락천사>에서 등장한 맥도널드를 가자 센트럴의 모든 가게가 그렇듯 사람이 북적였고 목구멍에 아직 토마토라면이 남아있는 것 같아 더 걷기로 했다. 맥도널드의 맞은편 거리에 줄지은 간이 상점과 붉은 등이 눈에 띄어서 오르기 시작했는데 이때의 나는 몰랐다. 따라따라 길 따라 병이 발동되어 두 시간을 넘게 걷고 있을지. 걸으며 보며 찍으며 어딘지도 모를 아파트 벤치에서 쉬다가 -테이블에 장기판이 새겨져 있었다- 걷기를 반복했다. 이왕 걸은 김에 트램을 타고 가보고 싶었던 카페 Hashtag도 결국 걸어서 갔다. 라테아트로 유명한 이곳에서 요정이 그려진 멋진 커피를 받아들였고 커피맛 알못인 나도 끄덕 일정도로 커피가 맛있었다. 여전히 완독 하지 못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으며 쉬다가 이른 저녁을 먹기 위해 근처에 있는 차우키 Chau kee 식당으로 떠났다.
홍콩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을 꼽으라면 에그타르트도 우유 푸딩도 딤섬도 아닌 차우키 식당의 참깨새우 샌드위치였다. 얼마나 맛있냐면 남겼다간 후회할 것 같아 꾸역꾸역 먹다가 역류성 식도염이 도져 앉아서 잠을 청하게 돼도 먹어두길 잘했다고 생각되는 맛이다. 차우키는 관광객보다 현지인이 많이 찾는 곳이고 어중간한 시간에 방문해서 그런지 자리는 널널했고 음악도 없어서 오히려 무료할 정도로 한산했다. 참깨새우 샌드위치, 부추 딤섬, 커스터드 딤섬까지. 이곳은 센트럴 중심부보다 멀리 떨어진 셩완에 더 가깝기 때문에 남은 일정 속에서 다시 방문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주문했다.
먼저 나온 자스민티로 입맛을 돋운 후 샌드위치를 한 입 먹고 마음속으로 축제를 열었다. 잘게 다진 탱글탱글한 새우 속을 바삭바삭하게 튀겨진 참깨빵이 감싸고 있었다. 이거지 이러려고 왔지 여행을 미친 개맛있ㄷ 거리면서 먹다가 속이 투명하게 비치는 부추 딤섬 받고 2차 기절. 근데 고수맛도 났던걸 생각하면 정확하게 어떤 딤섬을 시켰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찌 됐건 맛있었고 맛있게 먹었으면 됐지 뭐. 커스터드 딤섬은 뜨거울까 봐 맨 마지막에 먹었는데 그 노력과 무관하게 내용물이 터져 나와서 바지를 다 적셨다. 하필 소스는 왜 또 노란색인가. 국제 똥오줌쟁이가 되는 것인가. 다행히 걸칠 여분의 셔츠와 물티슈가 있어서 대충 정리하고 식사를 이어나갔는데, 커스터드 딤섬은 혀에 이물감이 남고 다소 퍽퍽한 찐빵 같은 타입의 빵이라 입에 맞지 않아서 하나만 먹고 나머지 음식을 클리어했다. 고작 딤섬 6피스와 샌드위치 4장 따위 쉽게 해치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맞은편에 앉아있는 아저씨가 딤섬 3개로 식사를 마치는 걸 보고 내가 과욕을 부렸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방금 들어앉아 메뉴를 고르는 한국인 모녀를 보며 답지 않게 추천을 하고 나왔다.
저녁도 해결했겠다 마지막으로 셩완의 Cosmos Books를 가기 위해 트램에 올라탔는데 저렴하고 낭만 있는 교통수단임은 분명하다만 20분 이상 타기는 힘들었다. 밑창이 얇은 슬리퍼마냥 앉아 있으면 땅의 굴곡이 고스란히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정신없이 덜컹거리다가 Cosmos Books에 도착했다. 이곳은 한 층 지하로 내려가 입구부터 아동 코너와 일반 코너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이상하게 소란스러워서 들어가 보니 작가 팬사인회 같은 게 개최되고 있었다. 다들 같은 책을 품에 안고 상기된 얼굴로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문구류를 봤는데 역시나 홍콩스러운 스티커와 팬시는 없었다. 중국령됐으면서 왜 과자와 문구류는 일본한테 잡아먹혔냐고 캐릭터 상품 개발 안 하냐고. 결국 뱃속은 두둑하게, 손은 가볍게 숙소로 돌아갔다.
2024.03.10 3일 차 (일)
카우론공원-Dolphin Sunset-호주우유공사-카도라 베이커리-홍콩예술관-홍콩문화센터-K11 Musea-Moviemarks-Oi Man Sang-숙소
목표: 우유푸딩, 푸딩빵, 홍콩미술, 소화 잘하기
차우키에서 무리하게 먹은 탓에 역류성 식도염인지 위염인지 모를 것으로 속이 갑갑해서 숙면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계속 누워있기에는 체한 느낌이 가시질 않아서 공원으로 가기 위해 나왔다. 이때 노란색의 일반 버스를 처음 탔는데 2층 빨간 버스는 뒤에서 타서 내릴 때 결제하고 노란 버스는 한국처럼 앞으로 타서 결제하고 뒤로 내린다. 몰라서 어버버 거리다가 이상한 데에 핸드폰을 들이밀며 결제하려고 했는데 기사 아저씨가 인상을 찌푸리며 쳐다보기만 했다. 아 좀 도와줘욥.
얼레벌레 도착한 카우론 공원에는 아침 체조가 한창이었는데 용의 해라고 용그림이 그려진 제로콜라를 뽑아 마시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공원에는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외국인 관광객과 그 식사를 노리는 턱시도 고양이와 울창하게 조성된 나무 숲이 있었고, 안쪽으로 더 이동하자 빽빽거리며 우는 필라밍고 무리를 발견했다. 내 기억 속에 필라밍고는 분명 분홍색의 동물이었는데 생각보다 하얀 털을 가지고 있었고 어디로 통하는지 모를 도로 위 육로를 건너자 높은 빌딩 숲과 바다를 전망할 수 있는 포인트뷰가 나왔다. 가볍게 조깅도 할 수 있을 만큼 길게 튀어나와 있어서 빅토리아 하버가 한눈에 들어왔는데 풍수지리 상 용의 머리가 건물에 끼이지 않기 위해 ㄷ자를 엎어놓은 모양으로 지었다는 빌딩을 볼 수 있었다. 혼자서 핸드폰과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찍고 있으니 조깅하던 아저씨가 와서 뭐라 뭐라 하시곤-여기서 이렇게 찍어야 짱이다 대충 이런 말인 것 같았는데-홍콩 바다와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셨다. 고마운 마음에 음꼬이 씨에씨에를 남발하며 헤어졌는데 마지막날 핸드폰을 도난당해서 이 사진만큼은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걷다 보니 속이 조금은 괜찮아진 것 같아서 호주우유공사의 우유푸딩을 먹어보기로 했다. 이곳은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에서도 유명한 곳인지 줄이 반바퀴 둘러쌀 정도로 길었는데, 회전이 빨라서 금방 줄어들었다. 혼자인 것도 한몫했고. 차찬탱 메뉴로 유명한 토스트도 주문하고 싶었지만 먹었다간 남은 일정을 망칠 것 같아서 우유푸딩만 주문했다. 따뜻한 푸딩은 아무래도 낯설고 다소 물리는 맛이라 차가운 푸딩이 더 맛있다는 후기에 차가운 것으로 선택했는데 한 입 먹어보니 따뜻한 푸딩을 했어도 내 체질에 더 알맞았을 것 같았다. 한 번쯤 먹어볼 만한 맛이었지만 푸딩만 먹기 위해 굳이 찾아갈 필요는 없는 정도. 식당에서 나와 곧바로 근처에 있는 카도라 베이커리로 향했다.
카도라 베이커리는 베이크하우스나 타이청 베이커리처럼 홍콩의 대표적인 빵집은 아니지만 동네 빵집으로서, 그리고 푸딩빵으로 유명한 곳이다. 바게트볼 안에 커스터드 크림이 가득 찬 단순한 형태지만 한국에서는 또 본 적이 없는 빵이라 구미가 당겼다. 주요 관광지인 조던역에서 거리가 있다 보니 걸으면 걸을수록 작은 공원과 맨션 1층에 딸려있는 상가와 시장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매대에 팔고 있는 과일들의 빛깔이 참 산뜻했다. 작은 공원에는 어르신과 어린이가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골목의 짧은 횡당보도를 건너고 건너 도착한 카도라 베이커리에서 피스타치오 푸딩빵은 아쉽게 발견하지 못했지만 오리지널 푸딩빵과 에그타르트, 미니 머핀을 무사히 구입했다. 평소 같으면 길에서 와구와구 먹어보겠지만 여전히 속이 편치 못하여 먹는 건 나중에. 강해지는 비바람을 뚫고 Austin역으로 달려갔다. 소화가 안되면 될 때까지 걷는 수밖에.
이스트 침사추이역에 도착해 지하에서 백화점으로 곧바로 들어갔다가 길을 잃었다. 어딜 가야 할까 열 두 개로 가는 조각난 골목 기ㄹ 한참을 빙빙 돌다가 결국 밖으로 나와 이슬비와 강풍을 뚫고 눈에 보이는 가까운 건물에 들어갔는데 예정에 없던 홍콩예술관을 방문했다. 그리고 여기서 예정에 없던 막대한 지출을 했다. 정말 이곳에 오기 전까지 '홍콩 정말 살 거 없다, 이러다 밀크티만 사서 가겠네, 홍콩스러운 굿즈가 이렇게나 없을 수가 있나' 하며 돌아다녔는데 예술관에서 파는 개비싼 마그네틱 액자 두 개를 사고 나오니 프리마켓을 열고 있었다. 이건 또 뭔데. 찻잎으로 향을 담았다는 찻잔 캔들을 홀린 듯 두 세트 사고 나니 남은 일정동안 쓸 식비와 교통비를 빼면 빈털터리가 됐다. 이것도 할머니가 애플페이를 잘 못 다루셔서 못 살 뻔. 현금 탈탈 털어서 겨우 샀다. 손이 무거워지니 급격히 피곤해져서 K11뮤세아 백화점의 지하 식당으로 가 크림솔티코크를 찌끄렸다. 일본의 크림소다 같은 음료를 생각했는데 이상한 열매가 하나 들어있는 짭짤한 맛의 사이다여서 먹는 내내 흠터레스팅 했다.
저전력으로 버티고 있던 배터리와 체력을 충전하며 영화를 키워드로 홍콩 여행을 검색하다가 영화 포스터와 굿즈를 파는 매장 Moviemarks를 발견했다. 갑자기 아리던 발바닥이 멀쩡해지는 착각이 들면서 내일 저녁에 센트럴을 한번 더 둘러보려면 지금 당장-마감까지 한 시간도 안 남았지만-가야 한다는 생각에 곧바로 버스를 탔다. 혹시나 구글 지도에 표시된 영업시간과 다를까 싶어 내리자마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뛰어갔는데 다행히 예정대로 8시가 클로즈라며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이야기해달라고 친절히 설명해 주셨다. 매장에는 어떻게 이걸 다 모았을까 싶을 정도로 세세하게 연도별로 나라별로 포스터가 정리되어 있고, 홍콩 영화지만 일본어로 된 잡지도 있었다. 내 전공 고마워. 일단 왕가위 감독의 회지를 찜해놓고 둘러보다가 고레에다 감독의 괴물怪物 각본집도 있어서 눈 돌아갔다가 여긴 홍콩이라며 마음을 다독였다가 후하후하 오타쿠 살려. 직원분이 한국어도 굉장히 잘하셔서 중경삼림 포스터와 엽서로 몇 가지 골라 계산하려는데 현금만 가능하다는 벼락같은 소식을 듣게 됐다. 몇 시간 전 프리마켓에서 현금을 탕진한 나에겐 100 HKD도 없어서 다시 남은 돈을 탈탈 털어 중경삼림 포스터와 보관용 투명파일을 간신히 구매하고 나왔다.
여행의 목적을 소소하게 달성한 덕인지 드디어 홍콩스러운 것을 손에 넣었다는 후련함 덕인지 급격히 배가 고파졌다. 홍콩에서 고독한 미식가 찍는 줄. 아무튼 급하게 구글 지도를 찾아보니 백종원 선생님이 다녀갔다는 술안주 맛집이 있었다. Oi Man Sang은 위치가 애매해서 원래 일정에서는 갈 생각도 못한 곳이었는데 마침 잘됐다 싶어 포장해서 숙소 식당에서 먹기로 했다. 원래도 현지인에게 유명한 곳인 건지 테이블은 이미 만석에 테이크아웃을 기다리는 사람도 많았고 사람 키를 뛰어넘는 불기둥과 궁중팬이 쉴 틈 없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음식 냄새가 도라방스라서 식도염인지 위염인지 모를 것도 다 뚫어줄 것 같았다. 배고파 홍콩 편을 보며 제일 군침 돌았던 소고기감자볶음을 포장해서 칭따오 맥주 사들고 딸랑딸랑 숙소 식당으로 갔다. 고기도 부드럽고 감칠맛 나는 양념과.. 모르겠다 그냥 거를 타선이 없는 이상적인 소고기감자볶음 안주를 먹고서 답답했던 속이 마법같이 풀렸다.
2024.03.11 4일 차 (월)
웰컴마트-홍콩문화박물관-Bute st-레이디스마켓-Mammy pancake-익청빌딩-eslite spectrum Taikoo store-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Vission Bakery-Ebeneezer's kebabs&Pissera-센트럴 스타페리-NED KELLY'S LAST STAND-청킹맨션-숙소
목표: 쇼핑, 영화 덕질, 홍콩 에그와플
매일 이만보를 걸은 다리와 알코올 쓰레기인 간을 달래기 위해 느지막이 기상하려고 했으나 점심 전까지 비가 온다는 소식에 일정을 뒤엎었다. 저녁에 기념품 살 시간이 없을 것 같아 숙소 근처의 웰컴마트에서 장을 봤는데 뭐랄까 여기가 일본인지 영국인지 중국인지 모를 정도로 다양한 나라의 식료품이 있지만 유통 글로벌화로 딱히 살게 없었다. 홍콩 쇼핑 리스트를 검색했을 때 품목이 많지 않았던 이유를 체감할 수 있었고 고심 끝에 트와이닝과 립톤의 밀크티와 라면, 과자, 뭔지 모를 빨간 조미료를 구매하고 돌아와 어제 먹다 남은 소고기 감자볶음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홍콩 문화 박물관은 대표 관광지와 반대로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곳이라 교통편이 애매했는데 오히려 중심지와 동떨어져있던 숙소에서는 근처에 버스가 다녀서 수월하게 갈 수 있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속에서 입구에 다다르니 발차기를 하고 있는 이소룡 동상과 견학 중인 어린이집 아이들이 보였다. 박물관은 입장료가 따로 없이 무료인 데다 유물과 미디어 자료와 동선 같은 것들이 잘 구성되어 있어 전혀 관심이 없었던 가극이나 인물에 흥미를 둘 수 있었다. 다만 영어와 중국어만 제공되고 모든 관이 촬영 금지인지라 번역기를 돌리려면 씨큐에게 잠깐씩 해명을 해야 했다. <중경삼림>은 홍콩 영화의 역사 중 갱 Gang 장르에서 로맨스로 넘어가던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소개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전체의 역사를 다뤄야 하다 보니 분량이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라도 현지에서 어렵사리 만나서 반가웠다. 홍콩의 문화도 시대에 따라 글로벌화되면서 사람들이 즐기는 매체와 방식도 다양해졌는지 포토카드 뽑기 기계가 유물(?)처럼 전시되고 있었는데 무려 90년대에 사용되던 기계였다. 정말 덕질에는 국경도 없고 시대도 없다.
다시 중심 관광지로 가기 위해 한 시간 정도 걸리는 버스에 올라탔는데 전시를 돌아보고 나오니, 비가 거짓말처럼 뚝 그쳐서 돌아가는 내내 도로의 얄따랗고 키 큰 나무가 보다 맑아졌다. 외국을 여행하면 내가 타국에 와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 중에 하나가 식물인데-나머지는 신호등 소리, 택시의 색깔, 건널목에서 오른쪽을 봐야 하는 것 등-홍콩은 유독 야자수 같은 나무와 빨갛고 분홍색의 꽃이 곳곳마다 피어있었고 이 꽃이 1880년에 홍콩 동식물공원에서 육종 된 양자형洋紫荊이라는 홍콩란香港蘭임을 여행을 돌아와서야 알게 됐다. 동전에 버젓이 똑 닮은 꽃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에.
홍콩 하면 금붕어가 떠오르는 건 다 중경삼림 때문이다. Bute street 근처 금붕어 마켓은 갈 생각이 없었지만 조던과 침사추이의 거리를 생각보다 즐기지 못한 것 같아서 버스에서 내려 일직선으로 쭉 걷기 시작했다. 배가 고프다고 다리가 살려달라고 외칠 즘에 Bute street에 도착했는데 어류뿐만 아니라 고양이, 토끼, 거북이 펫샵이 줄지어 있었다. 구경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캣타워 위 고양이와 성견만 한 거대 토끼와 빠끔 대는 거북이 모두 희망하지 않는 인간과 함께 살기 위해 갇혀있었다. 보고 있자니 집에 있는 구피가 생각나서 빠르게 빠져나왔다.
레이디스 마켓은 동남아의 시장과 비슷하게 가짜 명품과 기념품이 될만한 잡화를 파는 곳이지만 결코 저렴하지 않다는 구글 지도의 후기를 보고 일정에서 제외한 곳이었는데, Moviemarks 매장을 소개한 블로그에서 이 인근에 홍콩 팬케이크 맛집이 있다는 글을 발견하여 겸사겸사 방문해 보기로 했다. 일직선으로 발 가는 대로 걷다 보니 어디서부터가 마켓인지 짐작이 가질 않았는데 변신로봇마냥 처마를 펼칠 수 있는 이동식 상점이 늘어선 곳을 지나다 지도를 보니 이미 지나고 있음을 알게 됐다. 얕게 흩뿌리는 가랑비 때문인지 열려있는 가게가 많지 않았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지린내가 코를 찔러서 탈주하고 홍콩식 에그와플이나 먹으러 갔다. Mammy pancake는 체인점이라 꼭 지점에서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후에 갈 곳을 생각하면 손에 간식 하나쯤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오리지널 플레인 와플을 주문했다. 에그와플은 벌꿀 아이스크림이나 대왕 카스텔라처럼 한국의 디저트 시장을 한때 누린 철 지난 간식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남포동 야시장에서 한번 먹어본 게 다였다. 매끈하고 동글한, 거대 뽁뽁이 같기도 한 에그와플을 한 입 떼어서 먹자 이곳을 소개한 블로그에 대해 신뢰도가 최고치를 찍었다. 한국에서는 한 철 디저트였지만 나에게는 겨울철 호떡 같은 존재가 됐다.
한 손에 와플을 소중히 들고 이층 버스를 탑승했다. 오늘은 목적지가 양 끝으로 떨어져 있는 곳이다 보니 염원했던 이층 버스를 원 없이 타며 '혹시 저게 그 악명 높은 익청빌딩?' 하며 사진을 찍어댔지만 아니었다. 지도에서 표시하는 대로 꼬치 간식과 문방구가 있는 건물 입구로 들어가면서도 도대체 어디 있다는 건지 의문을 가지며 뒤로 고개를 올려다보니 이미 익청빌딩 속에 있었다. 몬스터 빌딩이라고도 불리는 이 아파트는 인구밀도가 높은 홍콩의 주거환경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였는데, 건폐율과 용적률이 얼마나 될지 짐작도 하고 싶지 않았다. 홍콩을 다녀왔다고 하면 대표적으로 센트럴의 소호 벽화와 무지개 아파트, 익청빌딩을 배경으로 사진을 많이 찍기 때문에 대기하는 사람들이 줄을 지었다. 부산의 감천 문화마을처럼 실제로 사람들이 거주하는 공간이라 조용히, 건물을 전체적으로 감상하기 위해 지하 계단으로 빠져나왔는데 계단의 또 다른 1층 입구에는 비교적 새로 지어진 것 같은 매장의 통로가 멀끔하게 빛나고 있었다. 대외적인 '홍콩스러움'은 현지인의 고충이지만 나라 그 자체이기에 버릴 수 없고, 새로운 것, 지저분함 없이 깨끗한 것은 생활의 불편함을 줄여주지만 존재의 본질을 잃는다. 그러한 도시는 점차 색깔이 없어진다.
외곽 도로로 걸어 나와 백화점 내 서점인 eslite spectrum Taikoo store를 찾아갔는데 반디 앤 루니스인 줄 알았다. 대형 백화점 안에 있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따뜻한 채도의 조명과 진열 방식 같은 것들이 굉장히 닮아있었고 함께 파는 팬시 잡화도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 친구들에게 선물할 다꾸 용품을 끝내 찾지 못해 의자에서 쉬다 나왔다. 이제 홍콩의 마지막 저녁 시간이 될 센트럴에서 무엇을 할지 버스에서 생각하다가 하늘을 봤더니 내일이 맑기라도 예고하는 것처럼 구름이 많지 않고 별까지 반짝였다. 버스에서 내려 여행 둘째 날 제대로 만끽하지 못했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다시 찾았는데, 오늘은 다행히도 저녁시간에 알맞게 맞춰 올라가는 방향으로 탈 수 있었다. 회사를 마치고 지쳐 보이는 현지 사람과 마냥 신나 보이는 관광객이 어우러진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낮에 봤던 센트럴 스트리트와 또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확실히 저녁 시간이 되자 술을 함께 즐길 수 있는 화려한 펍이 반짝였고 그러한 가게를 모두 지나치며 마감을 앞둔 Vission Bakery에 들어갔다. 이곳은 크로핀이 유명한 곳인데 아무래도 페이스트리류를 잘하는 것 같고 거의 품절인 상태라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퀸아망을 구매했다. 가게 앞 조그만 벤치에 앉아 퀸아망을 카삭카삭 깨물어 먹으며 거리의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옆에 앉아있던 분이 책을 읽고 있기에 나도 모르게 e북을 켜서 같이 읽었다. 상대는 모르는 암묵적 독서 모임.
책을 읽다가 하늘을 보아하니 바다도 예쁠 것 같아서 침사추이로 건너는 마지막 저녁 길은 지하철이 아닌 페리로 가기로 했다. 그전에 배가 출출해져서 덕질 겸 저녁을 포장하기 위해 바로 근처에 있는 Ebeneezer's kebabs&Pissera로 향했다. 흔하디 흔한 홍콩 전역에 있는 체인점 중에 굳이 이곳을 방문한 이유는 <중경삼림>에서 왕페이가 셰프 샐러드를 팔며 귀청 터지도록 캘리포니아 드림을 듣던 곳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나오던 가게는 이미 사라지고 없어졌지만 유적지를 간다는 느낌으로 찾아가 팔라펠 케밥을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냉장고에 이슬 톡톡이 있어서 기분이 묘했다. 케밥은 상상했던 것과 달리 바게트의 반이나 되는 많은 양이라 흡사 몽둥이 같았는데 두둑한 몽둥이, 아니 케밥을 들고 스타페리를 타기 위해 선착장으로 향했다. 관광으로 흔히 타는 피크트램이나 페리에 흥미가 없어서 아무런 정보도 없이 가고 있던 터라 표를 어떻게 사야 할지 몇 시에 출발하는지 모르는 상태로 갔는데 탑승은 만능 옥토퍼스카드로 지하철 타듯 입장했고 거의 10분마다 한 번씩은 오가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기름냄새가 진동하는 페리 안에서 홍콩의 밤바다 와에 빌딩의 불빛들을 구경하다가 케밥을 한 입 물었는데 도착장이 보였다. 왜 이렇게 짧아. 케밥은 내일 아침밥인 걸로.
스타페리는 침사추이 부두에 도착해 센트럴행 손님을 싣고 빠르게 떠났다. 마지막 행선지는 NED KELLY'S LAST STAND라는 펍. 한국에서는 홀로 술집을 가본 적도 없고 술을 즐기는 편도 아니기에 혼자 펍을 간다니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이곳은 해외고 나는 이방인이니까라는 배짱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소심하게 다시 나왔다. 아아악. 괜찮아 암오케. 후회하고 싶지 않으면 혼자를 견뎌라. 최면 걸고 다시 들어가 매운 프렌치프라이와 블랑을 시켜놓고 10시에 시작하는 재즈 공연을 기다렸다. 그러나 10시 반이 넘도록 연주자는 등장하지 않았고, 옆 테이블에서 물어보기로 오늘은 공연을 안 하는 요일이라고 해서 천천히 감자튀김만 먹다가 나왔다. 희한한 것은 리뷰가 많지 않았는데 유독 여행 중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 여기서 가장 많이 봤다. 한국인들 언제 이렇게 재즈에 미쳤었던 건가. 이러나저러나 다음 해외여행에서는 더 당당하게 혼술을 즐기러 가야겠다고 기약하며 호불호가 많은 청킹맨션 입구에 다다랐다.
1961년, 홍콩이 아직 영국의 산하에 있을 때 지어진 청킹맨션重慶大廈은 구룡성채가 1993년에 철거되기 전까지 구룡반도의 대표적인 슬럼가였다. 열일곱 개의 층수 중 이층까지는 상점이 들어서 있어 한국으로 치면 주상복합 맨션이라고 할 수 있는데, 들어가기를 입구부터 망설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밤 11시가 다가오는 시간인 데다 인도계인지 아프리카계인지 모를 남자들이 까마득하게 쳐다보고 있었고, 무시하고 들어가자 분명 군데군데 환전소뿐만 아니라 음식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닥에 꽁초와 뭔지 모를 것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무엇보다 다시 레이디스 마켓에 온 것처럼 지린내가 나서 공허한 걸음으로 빠르게 둘러보고 나왔다. 금발의 임청하가 왜 여기서 총을 쏴대고 다녔는지 알 것도 같았다.
숙소로 돌아와 빠르게 씻고 아침 비행기를 위해 모든 짐을 정리하고 행복하게 잠을 청했다. 내일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는 채.
2024.03.12 5일 차 (화)
숙소-홍콩국제공항-김해공항 x-인천공항-광명역-부산역-집
목표: 집 가기
비의 요정은 내가 한국으로 떠나는 날을 알고 귀신같이 비구름을 거둔다. 숙소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일출과 함께 공항행 버스를 타는 동안 여행 내내 보지 못한 맑은 홍콩의 바다를 마지막으로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공항에 내려 있었던 일은 더 이상 주절대며 남기고 싶지 않다.-친구들에게 너무 많이 말했다.-요약하자면 기계에서 여권 스캔이 불가능했고 직원이 도와주다 시간이 지체됐으며 기내용 수화물 짐을 정리하고 오니 보딩 타임이 오버되어 하루에 한 번 있는 부산행 비행기가 날아갔고, 점심쯤 출발하는 인천행 티켓을 다행히 잡았고 그 와중에 케밥은 눈물 나게 맛있었으며 화장실을 갔다가 핸드폰을 도난당했다는 것이다. 인천에 도착해서 부산은 또 어떻게 가나 하는 막막함보다 여행 동안 허벌나게 찍어댔던 사진과 영상이 아까워서 눈물이 앞을 가렸다.(이때는 진짜 울었다.) 이런 울적한 마음을 알 리 없는 공항 직원은 동의하지 않은 보험 설명과 같은 설문조사를 해대며 답례로 빨간 이층 버스 마그네틱을 건네주었다. 기뻐해야 하나.
비행기에 탑승하며 마지막으로 승무원에게 분실물 센터에서 온 연락이 없는지 문의했으나 그런 희망 따위 기적에 가깝기에 공허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승무원과의 대화를 들은 옆자리 승객이 자신도 홍콩에서 핸드폰을 분실한 적 있는데 이참에 액땜하고 새로 산다고 생각하라며 물과 과자를 나눠줬다. 다른 것보다 사진이 아깝다고 말하니 여행은 기억 속에 남아있다며 그 사람은 웃어 보였다. '여행은 기억 속에 남아있다.' 이 말에 갑자기 삶의 이치를 깨우친 사람처럼 편안해져서 하늘 위 반짝이는 홍콩 바다의 윤슬을 눈에 담고 마지막 필름을 소진하며 인천에 도착했다. 인천에서 부산까지는 공항 인포메이션 센터에 문의하여 광명역으로 가는 버스와 기차를 타고 어찌어찌 집으로 무사 귀국을 완료했다. 사진이 없으니 글로 남겨야겠다고 벌인 일이지만 이렇게 할 말이 많을지 몰랐다. 몸 건강히 잘 먹고 잘 보고 온 홍콩 기행문. 드디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