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 헤어졌지만, 사귄 기간 보다 헤어진 기간이 더 길어질무렵까지 사랑했던 전 여자친구를 만났다.
난 걜 아주 오랜 기간 사랑했다. 함께 했던 경험들을 너무 자주 생각하곤 했어서, 그 기억은 전혀 빛바래지 않은 채 보존 되어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있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
과거를 돌아보지 않기로 결심하고 앞을 보는데에, 그녀는 걸림돌이었다.
"그때 이랬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의 시작과 끝에는 항상 그게 어떤 사건이었던 간에 걔가 있었다.
제주에서도, 해외에서도 쓸쓸한 광경들을 마주할 때면 내 앞에는 그녀가 서 있었다. 그렇게 되버리고 나면 나는 다낭에 있든 , 방콕에 있든, 도쿄에 있든, 서귀포에 있든, LA 있든 그녀 앞에 서있는 내가 되곤 했었다.
아무리 멀리 떠나고, 아무리 새로운 생각을 해도 결국 그녀 앞에 서있는 나로 돌아올 때면 나는 다시 처음부터 출발해야 했다. 출발지는 매번 같았고 도착지는 없는 생각의 여정을 하곤했다.
그래서 그녀를 봐야겠다 생각했다.
내 머릿속에 너무 많은 이상화가 진행되었고, 이걸 깨기 위해선 그녀를 실제로 보는 것 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를 만나기 전에, 꽤 많은 말들을 준비했었고 상황에 따른 선택지를 만들어갔었다.
나는 그녀를 봤을 때, 내 머릿속 판타지가 죄다 깨져버리는 것을 최선의 선택지라 생각했다. 제발 그러길 바랬다.
그렇게 만났던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내가 사랑했던 구석구석들은 여전히 아기자기하게 생글생글했다.
그녀는 좋은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하고 있었고, 불안했던 시절을 넘어 행복하고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시형아 난 네가 평일에는 막노동을 하고, 밤에는 글을 쓰고, 주말에는 잠만 자는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어.
단순하고 깊게 살았으면 좋겠어"
순간 생각했던 것 같다. 오로지 얘만이 나를 알고 있고, 얘만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라고.
내가 생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그녀에게 더 이상 내가 필요하지 않고,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남아 있지 않은 상황. 편안하고 친근한 우정만 둥둥 떠다니는 최악의 상황.
그 상황이 내 눈앞에서 벌어지면 난 완전히 무너져 집 안에 틀어박혀 한달 내내 소주만 마시며 서글피 울다 다시 인생을 허비하기 시작일 것이라고, 가까운 친구에게 고백하며 걱정하곤 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치솟았던 마음은 잘 가라앉았고 그 이야기를 듣는 내 마음이 참 편했다.
여전히 손을 내밀어 얼굴을 구석구석 보듬고 싶은 마음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 마음을 잘 달래고 그녀를 축복할 수 있었다.
지난 몇년 간,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본적이 없었다. 내 마음 속, 사랑의 방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항상 그 애를 위한 공간으로 다 남겨두었다. 그래서 종종 새로운 사랑이 들어오면 잠깐 자리를 내줬다가 다시 밀어내곤 했다. 그렇게 텅빈 방에 나는 홀로 앉아 문이 언제 열리나 기다리는 텅빈 창고의 문지기였다.
문지기는 이제 인정하게 되었다. 이 방에 더이상 내가 기다리고 있는 손님은 오지 않는다. 사실 문지기 또한 그것을 알며 아무 것도 없는 창고를 지키는 일만큼 이상한 일은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이상하게 계속 그 문을 지켰다.
오늘 아침, 홍대를 걸으며 나는 더이상 문지기로 살지 않겠다 생각했다.
그것은 서운함이나 아쉬움 슬픔 씁쓸함 같은 기분이 아니라, 오히려 후련함이었으며 새로운 시작에 대한 두근거림이었다.
정말이지 진심을 다해 그녀의 미래를 축복한다.
그리고 드디어 오랜 외로움의 시간을 아주 멋지게 극복해낸 내 자신의 미래를 축복한다.
참 다행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