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도취

by 표시형


여름이 아주 가버렸다. 곧 겨울이 올텐데. 난 무얼했나. 조바심이 난다. 이 맘 때쯤의 난 항상 그랬다. 동물이 털갈이를 하듯 뭔가 벗겨지는 기분. 봄, 여름 내내 꽉꽉 채워놨던 삶의 의미들이 가을 비에 속절없이 녹는다. 이 배신자들. 허망하고 우울해. 영원은 없구나. 괜찮다. 계절과 기분은 함께 찾아온 다는 사실을 알게 된 즈음 부터는 이런 기분이 더이상 당황스럽거나 아프지는 않다. 쌀쌀한 날 두터운 스웨터를 걸치듯 마음을 감싸면 되는 일인 것이다. 초록이 진다. 오래 좋아했던 사람이 부쩍 늙은 모습은 세월을 실감하게 한다. 요새는 거울 속에서 시간을 본다. 내 삶을 들여다보는 일이 즐겁다. 올해 새로 발견한 것이 있다면, 어쩌면 나만 몰랐던 것이겠지만, 나는 꽤 많은 반복적인 패턴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나를 다루는 방법을 알아간다. 원하는 방향으로 조종할 수 있을까? 어느덧 운동이 삶 속 일부가 되었다. 가슴 속엔 여전히 꿈과 야망이 불탄다. 정지해서 도통 나아가지 못할 것 같은 삶은 가속을 붙이며 전진한다. 오늘보다 내일이 기대되는 삶이 될 수 있을까 ? 기대감이 생긴다. 아. 자아도취가 나를 포근하게 감싼다. 부드러워라. 어쩜 이리 멋지게 살고 있는지. 내 미숙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계절이 있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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