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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 May 24. 2022

우리 동네에는 욕쟁이 아저씨가 있었다

#518

[주간자유] 5월 두 번째 주제 #518

이건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역사적 사실 관계를 다루는 글은 니다. 내가 겪은 주관적인 경험에 의한 200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의 개인적인 에피소드의 나열일 뿐이다. 9N년대생인 내가, 그러니 518민주화운동과 전혀 연관성이 없는 내가 겪은 광주의 오월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광주광역시 0구 끄트머리의 작은 동네에서 학창 시절을 다 보냈다. 여느 동네가 그렇듯 모두가 아는 '이상한 아저씨'가 한 명 있었다. 그 아저씨의 별명은 욕쟁이 아저씨로, 초등학생이던 나는 그 아저씨가 보이면 길을 에둘러 돌아 갔다. 큰 소리 씨부렁대며 욕하는 아저씨가 갑자기 돌변해 내게 욕설을 이을 것 같아 두려웠다. 한 손으로 시츄의 목줄을 잡고 반대 손으로 지팡이를 집고 걸어가는 욕쟁이 아저씨는 항상 지팡이로 하늘을 툭툭 찔러대며 큰 소리로 욕을 했다. 아저씨는 항상 하늘에  아주 크게 씨발을 외치며 시작했다. 누가 무엇을 어쨌네, 저쨌네, 개새끼들, 씨발새끼, 하늘에 대고 이어지는 호통은 멈추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 아저씨를 잘 알았다. 학원이 끝나고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집에 가는 길이면 사거리 신호등 앞에 서서 '저기 욕쟁이 아저씨다'라며 서로 귓속말을 나누기도 했다. '오늘은 웬일로 욕을 안 하네?' 그 아저씨는 이따금 조용하게 시츄와 함께 걸었다. 그러나 신호등 앞에 서면 다시 땅을 딛던 지팡이로 하늘을 쿡 찌르며 우렁차게 욕을 시작했다. 주변 어른들은 아저씨를 흘끔거렸지만, 아무도 자리를 피하진 않았다.


그러니 그 익숙해진 반응만큼이나 아저씨는 우리 동네에서 유명했다. 그러나 아저씨가 먼저 누구에게 시비를 거는 일은 없었다. 욕쟁이 아저씨는 항상 허공에 욕을 했다. 누군가위협하던 모습은 내가 그 동네에 살던 20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주변의 누구를 특정 짓지 않았다. 그 위협적인 지팡이로 누군가를 때리지도 않았다. 그저 항상 관리가 잘 되어 보이는 작고 귀여운 시츄 한 마리와 걸었다. 항상 욕쟁이 아저씨의 시선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빈 공간에 있었다.


이제 파리바게트 사거리의 신호등 건너편에서 욕쟁이 아저씨를 마주쳐도, 나와 같이 신호를 기다리며 욕쟁이 아저씨를 마주쳐도 아저씨가 내뱉는 욕설들에 살짝 놀랄 뿐이지 그 아저씨가 무섭진 않았다.


엄마와 함께 장을 보러 나가는 길에도, 혼자서 학원을 가는 길에도, 친구들과 놀러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그 아저씨와 시츄가 보이면 나는 항상 말했다. '어, 저기 욕쟁이 아저씨다.' 가끔 친구들이 먼저 말하기도 했다. '욕쟁이 아저씨 온다.' 어른들도 더 이상 그 아저씨가 보이면 피하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될 무렵이었다.


'어, 저기 욕쟁이 아저씨다.'


동네의 파리바게트 사거리가 아니었다. 손에 항상 들고 있던 지팡이는 있었지만, 귀여운 시츄의 산책 줄은 없었다. 아저씨는 욕을 하지 않았다. 그 아저씨는, 기이한 행동으로 몇 년간 우리 동네의 유명인사가 된 아저씨는 일반 사람처럼 말을 했다. 허공이 아니라, 자신에게 질문을 하는 기자에게.


그 아저씨에게는 이름 석 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붙은 설명이 있었다. 518 국가 유공자.


아.

이렇게까지 역사가 내 피부에 와닿은 적이 있었을까?  


욕쟁이 아저씨는 자신이 살고 있는 처소라며 뒷산의 허름하게 대강 지어진 천막의 비닐을 걷어 보였다. "내가 잠을 못 자요." 아저씨는 말했다. "그날 이후로 마음 편하게 자 본 적이 없어요." 기자의 질문에 답했다.


씨발새끼들, 허공에 흩어 날아가는 욕설과는 달랐다. 그날 이후로 공황과 불안에 시달린다며 말하던 아저씨는 인상을 찌푸렸다. 눈썹은 팔자로 쳐졌고, 그와 함께 눈은 하나의 깊은 주름처럼 접혔다. 억울해 보이기도, 화가 나 보이기도 했다. 자신이 복용하는 약이라며 한가득한 약봉지를 카메라 앞에서 흔들기도 했다. 자신에게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어 기뻐 보이기도 했으나 이내 퍽퍽퍽 가슴을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에 내 목도 턱 하고 막혔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그의 인생이 궁금해졌다. 처음으로, 그 아저씨가 왜 길거리에서 욕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길거리에 NPC처럼 존재하던 '욕쟁이 아저씨'가 내게 처음으로 인간이 됐다. 사람이 되어서 가슴을 내리치며 울었다. 원통하다고 했다. 거친 피부를 타고 내리는 눈물은 담긴 것이 많아 끈적이고 뜨거울 것 같았다. 팔뚝의 피부가 따끔거렸다.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이후에도 욕쟁이 아저씨는 한 손에 지팡이, 한 손에 산책 줄을 잡고는 거리에 나왔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친구에게 '어, 저기 욕쟁이 아저씨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중학교 교복을 입고 떡꼬치를 들고 학원에 가던 나는 그 아저씨를 보면 1980년의 5월 18일이 떠올랐다. 언제든.


아직도 그 시대에 살고 있는 아저씨처럼, 나도 갑자기 시공간을 넘어 아저씨에게 훅 끌려가는 듯했다. 2000년대에는 518이 민주화운동이 아니라고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 팔 길이만큼 두툼한 회색의 컴퓨터 모니터 속에서, '홍어'라는 단어를 보면 나는 욕쟁이 아저씨가 떠올랐다. 그 아저씨는 아직도 길거리에서 욕을 했다. '전라디언'이라는 단어를 보면 또 그 아저씨가 온 근육을 찌푸려 말하던 표정이, '빨갱이', '간첩'이라는 단어를 보면 같은 다큐멘터리에 광주에 배치된 계엄군이었다던 변조된 목소리의 울음이, 자기는 잘못이 없다며 기자를 쫓아내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 장면은 내 속에서 아저씨의 처소와 교차되었다. 그리고 그 파리바게트 사거리와도. 아저씨의 귀여운 시츄도, 지팡이도, 붉어진 얼굴로 터진 듯 쏟아지는, 그러나 내게 와닿지는 않던 욕지거리가.




파리바게트 사거리 맞은편의 작은 공원에는 그만큼 작은 광장이 있었다. 두 개씩 놓인 벤치에는 이따금 신호를 서서 기다리기 힘든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앉아 계셨다. 어린아이들도 공중에 뜬 두 다리를 동동거리며 500원어치 컵떡볶이를 먹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나였다. 학원 가방을 메고 종종거리며 걸어가던 어느 날은, 그 공원에 사람이 많았다. 나는 앉아서 3백 원 주고 사온 튀긴 쥐포를 먹고 싶었다. 그러나 영 사람들이 너무 부산스러웠다. 사진들을 막 걸어놓는가 하면 그 반대편에는 아주머니들이 모여 밥을 펐다. 사람이 그나마 지나다니지 않는 쪽의 벤치에 앉아 곁눈질로 사람들을 쳐다봤다. 아주머니들은 맨밥을 두 손으로 꾹꾹 눌렀다. 밥은 흰 맨밥이었고, 김도 맛있게 생긴 양념도 없었다. 몇 번을 힐끔거리다, 쭈뼛쭈뼛 그곳을 걸어가니 한 아주머니가 나를 불러 주먹밥을 건네며 말했다.


 "옛날에는 이렇게 사람들이 나와서 시위하는 사람들한테 주먹밥을 만들어서 나눠줬어. 배곯지 말라고."  


공짜라고 했다. 아무것도 안 든 맨 흰쌀밥으로 만든 주먹밥. 이런 게 맛이 있나 싶었으나,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그 주먹밥이 무척 맛있었다고 기억한다. 왜냐하면 금세 먹어 치우고는 하나를 더 받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모두에게 나눠주는 것이라는 아주머니의 말이 걸려서 소심하게 발길을 돌려 집으로 곧장 갔다.


주먹밥을 나눠주는 천막 맞은편에 주르르 전시된 사진은 흑백이었다. 곤봉으로 내리치는 사람, 쓰러진 사람들, 아이가 울고 있는 사진, 여러 관들이 놓인 사진. 흑백이었지만 잔인했고 잔혹했다. 모자이크 없는 날것의 고통스러운 사진들이 초등학생 앞에 놓였다. 그 장면을 더 이상 잔인하게 느끼지 않을 만큼 518은 익숙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매년 오월이 되면 학교에서는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시청각 자료를 보여주었다. 가끔은 영화가 되기도 했고, 오월의 현장체험학습이 되기도, 글쓰기 대회가 되기도 했다.


시골에서 명절을 쇠고 광주로 돌아오는 길, 518 국립묘지로 향하는 길목만 들어서면 차례를 지내기 위한 차들이 빼곡했다. 도로에 20분 갇히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매번 길을 잘못 들었다고 타박하는 말을 했지만 아무도 그 이상으로 타박하지는 않았다.


 '한 집 걸러 한 집, 5월에 제사가 있다. 5월이 되면 충장로에서는 향 냄새가 진동했다'라는 문장을 증명이라도 하듯. 차와 사람들은 아주 빼곡했다. 내 친구는 매번 차가 너무 많이 막혀서 그 전날 미리 다녀온다고 했다. 그래도 사람이 많다고.


한국사가 무엇인지도 모를 때부터 518은 너무 익숙하게 내게 다가왔다. 한 번은 서울에 사는 친척들이 전남 할머니 집에 내려온 5월, 동갑인 사촌에게 518에 대해 물었다. 나는 광주 사람이었고, 그 애는 서울 사람이었다. 너무 어린 나는 내가 이 세상 중심인 줄 알았고, 그 애는 생전 처음 듣는 표정으로 518이 무엇이냐고 내게 되물었다. 나는 그때 말했다. 맨날 5월 되면 말해주는데, 너는 그것도 모르냐고. 세상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았다. 사실 변두리였던 것은 나였다. 특이한 것은, 조금 다른 것은 나였다고.


인터넷 속 사람들은 518민주화운동에 대해 여러 유언비어들을 퍼트렸다. 간첩이 조작한 거라고, 광주 사람들은 다 빨갱이 간첩이라고, 광주는, 전라도는, 518은 폭동이라고.


친구들과 충장로에 놀러 가면, 새로 지어진 건물들 사이에 곧이라도 무너트려야 할 듯한 빌딩이 하나 있었다. 그 전일빌딩에는 당시 헬기가 시민들을 사격했다는 증거가 되어주는 탄흔의 흔적이 있었다. (최근 리모델링한 전일빌딩은 총격 흔적은 그대로 유지하였고, 그 부분에 노란 테이프를 붙여 표시했다.) 전일빌딩 옆에 있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도슨트를 들었을 때, 518민주화운동을 기리 위하여 전일빌딩보다 낮게, 지하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지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모든 건 중간고사 끝나고 놀러 나간 시내의 버스정류장 옆에, 친구와 놀러 나가는 길목에, 미용실에서 기다리며 읽은 만화책에, 학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가에, 학교에 지각할까 급히 잡아 탄 택시기사 아저씨의 말 안에 있었다.




내가 다닌 대학교는 5월에 축제를 하지 않았다. 축제 기간은 이제 저녁이 조금 선선해지며 쌀쌀해지는 듯싶었던 맨투맨에 긴바지를 입으면 조금 춥기도 했던 9월 말쯤이었다. 인터넷에서는 대학 축제기간이라며 떠들썩했다. 어디 축제에 어떤 연예인이 온다느니 여러 말이 무성했으나 모두 다 나와는 딴 세상 이야기였다.


9월 마지막 날, 과 주점에서 서빙을 하며 동기들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술을 텄다.


'광주만 축제 9월에 한대.'


내 말에 동기들은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처음 듣는 이야기인 양 눈을 동그랗게 뜨기도 했다. 학교 후문의 쌈밥집에서 도매로 떼온 제육볶음은 내가 만든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맥주와 매화수를 번갈아가며 마시다가도 좀 유명한 가수가 왔다고 하면 운동장으로 뛰어 갔다.


'5월에는 518 있으니까.'


광주에 사는 동기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 한 명이 꿀강의라며 신문방송학과의 교양필수과목을 들고 왔다. 매번 새로운 연사가 강의를 하는데, 감상문만 적어 내면 패스라는 그 강의는 꿀강이라는 이름값처럼 타전공 학생들도 많았다. 인원이 많으니까 강의실도 넓었고, PPT만 찍으면 어떻게든 버무려 A4 1장 분량의 감상문(그것도 내기만 하면 되는)은 쓸 수 있었으니 아무도 강의를 열심히 듣지 않았다. 20살들은 항상 피곤했고, 심심했다. 엎드려 자는 사람도, 대놓고 핸드폰만 보는 사람도 많았다. 타과생인 나는 적당히 졸고 적당히 농땡이를 피며 출석의 머릿수를 채웠다. 연사들도 어린 학생들 앞에서 하는 강의니만큼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쉬운 이야기들을 하곤 했다.


강의 내용도, 내가 적어 낸 감상문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그 수업의 유일한 기억은 연단에서 갑자기 나이 많은 남자가 우는 모습을 목격한 나의 생경함뿐이다. 60대는 되어 보이는, 양복을 차려입은 나이 많은 남자였다. 오래되어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전남일보와 관련한 연사였던 것만 얼핏 기억이 난다.


매번 기자의 마음가짐에 대해 이야기하곤 하는 연사들이었으니, 그날도 반쯤 다른 생각을 하며 연사를 바라보았다. 연사는 몇 번의 헛기침 후에 1980년의 이야기를 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로 시작한 문장은 익숙히 518을 꺼냈다. 그 당시 광주의 참상을 기사로 한 줄도 실지 못했다고 했다. 역사책에, 지금껏 보아온 518민주화운동 관련 지료들에, 근현대사 시간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연사에게는 달랐다.


자신은 당시 00일보에서 근무하는 기자였다고 했다. 강제로 침묵해야만 했다고 말하며 그 늙은 남자는 안경을 들썩였다. 자신이 기사를 쓰지도, 실지도, 발행하지도 못했다면서 80년을 살아보지도 못한 우리의 앞에서 울었다.


광주에서는 계엄군에 의해 시민들이 도륙당하고 있는데, 광주 밖으로 나가는 기사들은 '광주에서 폭도들이 무장폭동을 일으키고 있다'라는 소식이었다고. 눈앞에 있는 사실을 쓰지 못한 것이 아직도 마음에 남았다고 말했다.


사회탐구 영역에서 근현대사를 선택한 나는 그 사실을 배웠고 외웠다. 그러나 나는 연사의 눈물을, 회환을 배우지는 못했다. 그러니 내가 반복해서 잊는 것은 그것이 '실제 사람들에게 벌어진 사건'이란 점이다. 연사는 헛기침을 하곤 미안하다는 짧은 사과와 함께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 갑자기 잊고 있던 어린 시절 욕쟁이 아저씨가 생각났다. 공원 광장에서 쭈뼛쭈뼛 받은 주먹밥도, 518 국립묘지 앞 도로에 꽉 막힌 차들과 그 안의 사람들도, 버스정류장 뒤의 전일빌딩의 탄흔들도, 충장로를 지나가며 518 기념관에 가본 적 있냐는 택시 기사 아저씨의 이야기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지상 1층과 지하층수로만 이루어진 이유들도 함께 떠올랐다.


역사는 책, 다큐멘터리, 영상 안에만 있지 않았다. 나는 광주에서 살았던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 밖에서 배운 것들이 있었다. 남들과 다름없이 일상을 살아가다 이따금 한 번씩 마주하는 사실들이, 누군가의 경험이, 분노가, 후회가, 목격이 있었다. 매번 그래 왔다. 일각에선 아직도 시민군이 먼저 무장한 채 군인을 공격했다느니, 북한군의 침투가 있었다느니, 헬기 사격이 없었다느니 거짓을 일삼으나 꼭 한 번 말해주고 싶다. 아주 조금이라도 광주에서 지내보라고, 얼마나 1980년의 5월이 아직도 광주에 깊게 파였는지 확인하라고.


타지에서 사는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사투리를 고치는 일이었다. 광주가 고향이라 말하면, 누군가 '아, 전라도?' 묻는 부정적인 뉘앙스에 익숙해진 만큼 더 빨리 전라도 사투리를 입에서 떼고 싶었다. 경기도 00시에 사는 친적이 나를 '시골에서 온 애'(광주는 '광역시'다)라고 소개해도, '전라도 사람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너는 다르다'라는 듯 말하는 이야기에도 익숙하고 작게, 눈이 꼭 깊게 팬 주름처럼 웃었다. 계속해서 파이기만 했다.


나의 얕은 파임은 아직도 1980년의 5월을 목격한 채 아직까지 광주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의 접촉에서 시작한다. 그것이 나의 파임이고 나와 광주가 맺은 관계이며 나의 역사이자 추억이고, 좁은 땅의 작은 도시 안의 우리가 공유하는 시대정신이다.


나는 광주를 떠난 지금에도, 오월이 되면 그 아저씨가 아직도 허공에 욕을 하고 계실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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