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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 Aug 20. 2022

일기日記를 읽으면 답은 일기일 수밖에

황정은 작가의 에세이 《일기》를 읽고.

도서관에 가는 일은, 무제한으로 사용 가능한 남의 명의의 카드를 들고 백화점에 가는 일과 같다는 말을 들었다. 왜인지, 도서관만 가면 신나더라니. 


생각해 보니, 책 대여비는 무료이고 그 안에 있는 모든 책을 꺼내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선사하는 자유는 시간제로 요금을 받는 만화방이나, 입장료나 음료값을 지불하는 북카페와는 다르다. 


쉬는 날이면 도서관에 가는 걸 즐긴다. 현관 앞에서부터 걸어서 40분쯤 가면 도착하는 동네 도서관은 바로 옆에 작은 공원을 두 개나 두고 있어서 공원과 맞닿은 창문 앞에 앉으면 블라인드와 창틀 사이 두 뼘의 틈으로 나무의 푸른 잎이 보인다. 


바람 불면 흔들리는 그림자가 책 위에 어른거리는 것이 보기 좋아 블라인드를 내리지 않고 두었는데, 

옆에 교복 입은 학생이 앉아서 블라인드를 끝까지 내렸다. 아무래도 문제집 위에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일을 낭만 있게 바라볼 수는 없을 테니까.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지어진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여고였다. 교장 선생님은 체육을 전공한 호탕한 여자 선생님이었고, 언제나 교장 선생님 말씀은 다섯 줄로 끝났다. 


'결혼도 안 하고', '머리도 짧고', '맨날 바지만 입는', '풍채 좋은' 교장 선생님은 아이들 사이에서 어떨 때는 불쌍한 사람이 되었다가 어떨 때는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우리는 그런 교장을 처음 봤으니까 다들 의견이 분분했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교장 선생님을 꽤 자랑스러워했다. 훈화 말씀을 권위 의식으로 여기는 교장 선생님은 언제나 우리를 운동장에 오래 세워두지 않았으니까.



새로 지어진 여고는 흔히 학교들이 다 그렇듯 언덕 위에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생활복이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매번 교복 치마에 기모 스타킹과 스타킹을 두 겹을 껴입어도 겨울에 언덕을 오르는 동안 겨울바람에 허벅지가 베이듯 아팠다. 


언덕을 반을 깎아서 넓은 운동장을 내고, 그 위에는 작은 정원과 그만큼 더 작은 하트 연못을 두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연못을 가로지르는 다리도 있었던 것 같다. 



광주는 어느 지역보다 빠르게 학생인권조례가 통과되었지만, 내가 3학년 때 기사에 따르면 '학업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한 두 명의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했고, 선생님들은 자를 들고 머리 묶은 위치에서부터 머리카락의 길이를 재며 돌아다녔다. 


최대한 낮게 머리를 다시 고쳐 묶느라 아이들의 손은 바빠졌다. 야간자율학습은 단 한 번도 자율인 적이 없었고, 선생님은 아무리 밖으로 뛰어나가고 싶어도 창문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당시에 고3은 토요일도 학교에서 자율 자습이라는 이름의 등교를 했다. 


우리 학교는 급식이 맛있기로 유명했고, 토요일 특식은 근방 학교 학생들도 알만큼 소문이 자자했다. 


아이들은 꽤 높은 출석률로 토요일 학교에 나와 점심시간을 기다리고, 생크림이 얹어진 와플에 토마토 스파게티와, 함박 스테이크, 양송이 스프를 마구 삼키고는 학생주임 선생님이 눈감아주었다고 밖에 할 수 없는 빈 교문을 넘어 슈퍼에 갔다. 


그러고는 입에 아이스크림이나 군것질거리들을 물고는 삼삼오오 모여 운동장을 돌다가, 정원을 거닐었다. 정원 사이사이 벤치에는 항상 급식을 먼저 먹은 아이들로 바글바글했다. 




교실 뒤의 잠이 오는 아이들을 위한 스탠딩 책상이 두 개 있었다. 스탠딩 책상에 가면 창문 너머로 학교 정원이 한눈에 보였다. 


토요일이라는 평일과 주말의 어른 경계 사이에서 특식을 먹고 친구 따라 내려간 슈퍼에서 집어 온 젤리 몇 개를 입에 넣고 오른팔로 턱을 괴면, 햇빛에 선명하게 비치던 정원이 보였다. 


참새들은 무릎이 없다는 걸 처음 알았다. '총총총'이라는 시각적으로도 길쭉한 모양의 의성어가 지상에서의 참새들의 수직 이동을 표현하는 단어라는 것도 고3 때 스탠드 책상에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렇게 참새는 몸을 수그려 얻는 반사작용 없이 맨땅에서 수직으로 갑자기 뛰어올라 단에 오르락내리락했다. 


1학년들이 가끔 먹이를 챙기는 길고양이도 정원을 거닐었고, '미세 먼지'라는 단어가 뉴스에 존재하지 않았던 하늘은 언제나 청쾌했다. 기분 탓인지 토요일 교실 안에서 본 날씨는 언제나 좋다는 말로 부족했다. 


잎사귀의 색들은 시시각각 변했다. 연한 녹색에서부터 짙은 초록색까지, 잎에 빛이 닿으면 유광 코팅을 해놓은 듯이 빛이 막 반짝였다. 



나는 턱을 괴고 창밖의 정원을 보면, 언제나 당장 내려가고 싶었다. 그럴 때면 선생님의 우스갯소리가 다시 생각났다. 


'아무리 밖에 나가고 싶은 충동이 크다고 해도 창문으로 뛰어내리면 안 된다'라는 말. 그럴 때면 3층에서 뛰어내리면 얼마나 크게 다칠까도 궁금했다. 


그렇게, 당장이었다. 

그만큼 당장 나는 도약을 하고 싶었다. 


포물선을 그려 가장 높은 정점을 찍는 상승과, 정점에서부터 떨어지는 하강을 하길 원했다.


나도 햇빛을 받고 정원의 일부가 되어 반짝이고 싶었다. 그리고 그 반짝임을 누군가가 목격해 주기를 바랐다. 



토요일의 오전 자율학습의 낮은 언제나 밝았고, 

땅에 뿌리를 박은 잎은 반짝였고, 

참새는 총총거렸고, 

고인 연못에 빠지면 '성병 빼고 온갖 병에 걸린다'라는 소문이 무성했고.

당직 선생님은 나무 막대기로 스탠딩 책상을 탁-탁- 치고 지나갔다. 멍 때리지 말고 집중하라는 의미에서. 






밤 9시 50분에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면, 아이들은 15분 안에 우르르 쏟아져 나간다. 학교 언덕 경사면에는 아이들을 태우로 온 차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셔틀버스 아저씨들은 저마다 도착하는 동네 이름을 들고 서 있었다. 나와 친구는 언제나 15분 뒤에 나갔다. 


우리의 이름은 성과 모음 한 자만 달랐고, 우리의 부모님은 차로 태우로 오지 않았고, 우리가 사는 동네로 가는 버스는 10시 25분에 학교 정류장에 왔다.


가끔 수위 아저씨가 빨리 나가라고 채근했고, 복도의 불은 항상 깜깜했지만 교복 밖에 입는 외투가 금지였던 우리가 정류장에서 마주하는 겨울은 너무 추웠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학원에 갔다. 10시에 끝나, 10시 25분에 학교 앞 정류장에 도착하는 버스를 타고, 10시 46분에 내려, 공원을 가로질러 학원에 갔다. 


순종적이지만 성실하지 않았던 나는 언제나 슬라이드 핸드폰의 안테나를 길게 빼어 DMB나 라디오를 틀어놓기도 했다. 그때는 심심타파가 세상에서 제일 재밌었다. 


영어 선생님은 장발을 하고 뿔테 사각 안경을 쓴 마른 체격의 젊은 남자였다. 내가 라디오를 틀어도, 멍을 때려도, 숙제를 안 해도 별 신경 쓰지 않고 내 이름을 부르던. 


영어 선생님은 내가 빠진 수업을 보강해 준다고 했다. 그러니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면 학원으로 오라고 했다. 일대일 수업이니까 최대한 일찍 오면 일찍 끝난다는 말에, 환승해서 가려고 하교하는 학생들의 커다란 흐름에 탔다. 언덕배기를 너무 빠르게 내려가다, 열린 승용차 문을 보지 못하고 문의 날에 허벅지를 그대로 가져가 박았다.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지만, 환승을 놓치면 다시 10시 25분 버스를 타야 했다. 발은 바빴다. 


학원은 평소보다 조도가 낮았다. 


오늘은 쉬는 날. 

보강은 일 대 일. 


긴 책상에 내가 먼저 들어가 앉고, 영어 선생님이 바깥에 앉았다. 다행히 환승에 성공해서 평소보다 일찍 도착했으니까,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끝나는 날. 


허벅지가 너무 아려서, 가방을 내려놓고 문제집을 꺼내어 책상에 내려놓으며 영어 선생님에게 오다가 차 문에 허벅지를 박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파 죽겠다고.


그런데, 갑자기 영어 선생님이 앉아 있는 내 교복 치마를 올려 걷었다. 들춰진 치마만큼 심장이 잘게 뛰어올랐다 내려앉았다. 참새처럼. 무릎도 굽히지 않고 쫑쫑 뛰어오르던 참새처럼 갑자기. 그러고는 여기냐고 묻고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갑자기 멍이 들 것 같이 욱신거리는 허벅지를 문지르다가,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와 목을 그대로 굳힌 채 눈동자만 굴려 학원 강의실 창문 너머를 봤다. 이어 보이는 사무실에도 강의실에도 아무도 없었다. 그 시선이 도움 요청의 시선이었는지, 십 년은 더 지난 지금 생각하면 어렴풋하다. 그런 생각이나 이유를 붙일만한 여유도 없는 반사작용이었다. 


본능적으로 이 손을 쳐내면 안 될 거라는, 불쾌감을 드러내면 더 큰일이 생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흐름은 너무 자연스러웠고, 내 시야 밖에 컴컴한 학원 사무실과 강의실에 근거했다. 나는 아주 게으르고 영리하지 못했지만, 눈치는 있었고 내 목숨이나 삶의 영위에 대한 욕구는 충만했다. 


나는 그 상황에서도 내가 느낀 불쾌감과 두려움을 상대가 알아차려 나에게 윽박지를까 두려웠다. 


왜 예민 반응하느냐고,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오히려 나를 몰아세울 것 같았다. 윽박지르거나 소리 지르는 남자는 가정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억압적이었다.


그리고 영어 선생님은 내 허벅지를 만지던 손을 떼고 들춘 치마를 내렸고 수업을 했다. 유난히 그날 학원의 조도가 낮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때 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왜 예민하게 반응하느냐고,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란 소리는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이 일은 아무것도 아니어야 했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반응했는데, 나는 '꽃뱀'이나 '걸레'같은 게 아니었으니까. 


성실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이제 더 이상 순응적이지도 않았던 나는 학원에 자주 결석했고, 영어 선생님은 다시 한번 보강을 잡았다. 


버스 타고 오면 너무 늦으니까, 자신의 차로 데리러 온다고 했다. 밤 10시에, 학교 언덕배기에 아주 익숙한 인산인해 무리 중 하나로.


괜찮다고 사양했지만, 싫다고 말할 수 없었다. 

사양은 영어 선생님에게 문제가 되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나는 '네'라고 답했다. 


'네'라고 답하는 순간에도 나는 절대 그 남자의 차에 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랬다. 그날 나는 친구들의 틈에 섞여 후문으로 돌아 버스 정류장에 갔고 가장 먼저 도착하는 버스를 타고 환승을 해서 집으로 갔다. 


그때 내가 쓰던  슬라이드폰의 자판 색은 눈이 시린 빨간색이었다. 불나게 전화가 울렸다. 받지 않았다. 진동이 울릴 때마다 덜컹거리는 심장은, 그날따라 버스기사의 운전이 거칠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의 차를 타며 내일 보자는 인사를 하는 친구, 오늘도 어김없이 향하는 동네를 들고 있는 셔틀버스 기사 사이에. 두렵고 무섭지만, 두렵고 무섭다고 절대 말할 수 없고 말해서 안 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의 단조로운, 그리고 벗어날 수 없는 일상에 절대 존재해서 안 되는 것이 한 가지 끼어 있었다. 그래서 언덕배기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를 차와, 언제 열려 내 허벅지를 강타할 차 문이 두려웠다. 내가 두려운 것은 그것이었다. 멍든 허벅지. 그랬다고 믿었다. 


그리고 주말의 한낮, 형광등의 빛보다 밖의 자연광이 더 밝게 빛나는 시간에 아이들과 선생님으로 바글거리는 학원 안에서 나는 그 남자에게 보강을 까먹었다고 말했다. 전화는 왜 안 받았냐는 말에, 그날 핸드폰 안 들고 갔다고 답했다. 


그 남자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보강을 잊었냐는 말도, 굳이 잡아 준 보강에 또 결석했다며 화도 내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그날 버스를 타고 지나쳤던 가게의 간판을 기억한다. 



일기를 읽으면 답은 일기일 수밖에 없고,

고백을 받으면 답은 고백일 수밖에 없다. 



"어떤 날들의 기록이고

어떤 사람의 사사로운 기록이기도 해서, 그것이 궁금하지 않은 독자들이 잘 피해 갈 수 있도록 '일기日記'라는 제목을 붙여 보았"(p.197)다는 저자의 말처럼  사사로운 기록에는 일기의 이름을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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