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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 Jan 05. 2023

엄마와 딸 그리고 음식에 대하여

다큐멘터리 <수프와 이데올로기>와 <두 사람을 위한 식탁>

Ⅰ. 들어가며



우리에게 첫 번째로 남겨진 식사에 대한 기억은 무엇일까? 세상에 태어나 울음을 터트렸을 때, 탯줄이 끊기고 영양분을 입으로 섭취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을 때의 최초의 음식은 필연적으로 가족을 소환한다. 다른 이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인간으로 태어난 숙명으로, 최초의 섭취는 그러니 처음으로 겪는 타인과의 관계이자 작은 사회이고, 가족은 "음식을 경험하는 장"(참1. p.114)이 된다.


우리는 가족 내의 음식을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의미에 빗대고는 한다. 음식은 삶에 필수적인 영양소를 넘어서, 가족 간의 유대감과 부모와 자녀 관계의 연대와 사랑의 의미를 한껏 담고 있다. 그렇다면 2023년에 가정 내 여성의 존재로 대표되는 '음식'에서 우리는 어떤 것을 엿볼 수 있을까.


원자화된 시대에서 우리가 개인의 삶을 엿봄으로 얻을 수 있는 단면이라는 것은, 

다큐멘터리라는, 감독이 개입하지만 개입하지 않는 형식을 취하며 조심스레 우리에게 비춰 보여준 음식의 함의는 무엇일까. 




Ⅱ. 한 사람과 한 가족과 두 개의 신념과 세 번의 백숙, <수프와 이데올로기>



양영희 감독은 이 영화의 제목이 어느 나라에서도 다른 뜻을 가지지 않기를 바라며 제목을 지었다고 했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라고. 수프라는 단어를 듣고 떠올리는 서양식 크림수프와는 다르게 이 다큐에서 보여주는 수프는 우리나라의 백숙이다. 생닭의 배 안에 찹쌀과 대추 등등을 넣은 우리나라의 보양식인 백숙. 양영희 감독의 어머니이자 이 다큐의 주인공인 강정희 씨는 그 생닭의 두 다리를 묶고는 푹 익힌다. 손으로 닭고기를 잡아 뜰었을 때 야들야들, 질겨지지 않게 시간을 재고 양영희 감독이 뚜껑을 열어보자 뚜껑을 열지 말라며 타박한다. 


더운 날씨에 강정희 씨가 백숙을 삶는 이유는 딸인 양영희 감독의 일본인 남자친구가 처음으로 그를 만나러 오는 날이기 때문이다. 집에 찾아오는 새로운 손님을 위해, 그는 백숙을, 치킨 수프를 만든다. 



어린 시절 제주에서 산 강정희 씨는 1948년부터  오사카에서 살고 있는 북한 국적을 가지고 살고 있는 재일 조선인이다. 그는 당시 친적들의 도움으로 어린 동생을 업고 오랜 길을 걸어 간신히 밀항선을 타고 오사카로 와 살아남았다. 끔찍하고 잔혹한 사건을 몸소 체험하며 일본에게도 남한 정부에게도 배신당한 그가 택할 곳은 북한이었다. 


국민을 총으로 쏴 죽이는 남한 정부도, 그렇다고 일제강점기의 주범인 일본 정부도 믿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고르게 된 북한 정부는 김일성의 환갑 선물이라는 이유로 큰 아들을 비롯한 세 명의 아들을 강제적으로 북한으로 데려가고, 결국 큰 아들은 북한에서 죽고 만다. 


강정희 씨의 막내딸인 양영희 감독은 왜 세 오빠를 거의 북송시키면서도 김일성을 지지하는 부모님을 이해할 수 없었고 김일성을 찬양하는 부모와 북한에 간 세 오빠와 달리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로 정의한다.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활동을 열심히 하던 아버지에 대한 다큐멘터리 <디어 평양>과 평양에서 지내는 조카를 다룬 <굿바이, 평양>의 개봉으로 북한에서 반체제 인사로 낙인직힌 양영희 감독은 북한 입국이 금지되었고 2009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강정희 씨는 양영희 감독과 둘만 남게 된다. 


이러한 일들에도 김일성을 믿는 강정희씨를 이해할 수 없는 양영희 감독과 어느 순간, 친적과 남자친구들이 군인들에게 칼에 찔리고 두드려 맞고 총살 당하는 모습을 증언하기 시작하는 강정희 씨의 모습으로 상황은 비틀린다. 


강정희 씨는 침묵하다 제주 4.3사건에 대한 증언을 하기 시작했으나, 알츠하이머 증세도 함께 찾아 온다. 그의 기억은 머릿 속에서 계속 엉키고 엉켜 처음으로 특별 여권을 발급받아 제주도로 향하게 된 시점에서는 강정희 씨의 기억은 전보다 아주 흐려진다. 


그곳에서 양영희 감독을 처음으로 그 날의 흔적을 확인한다. 제주도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 오사카로, 오사카가 폭격당하자 다시 제주도로, 그리고 그 제주도에서 벌어진 도륙 사건에 강정희 씨는 갓난아이를 업고 어린 동생 손을 잡고 깜깜한 밤에 몸을 숨기며 밀항선으로 뛰어갔다. 앙영희 감독은 그제야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1948년 4월 3일, 오빠를 죽게 만든 북한을 왜 선택했는지, 왜 아직까지도 찬양하는지. 


이 영화는 아주 담백한 시선으로 양영희 감독과 그의 어머니 강정희 씨를 담는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그들의 가족만의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역사적 소용돌의 속에 존재한다. 



일본인이나 미국인과의 결혼은 절대 안 된다는 아버지와 강정희 씨의 말에는 전과 다른 이유들이 겹쳐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강정희 씨는 양복을 입은 채 땀을 뻘뻘 흘리고 들어오는 일본인 사위 카오루를 위해 백숙을 삶는다. 병상에서 잔인한 학살을 증언하면서도, 오사카에서 차별과 핍박 속에 살아온 세월을 되짚으면서도, 그럼에도 김일성 찬양가를 잊지 않는 강정희 씨는 닭을 뜯어 사위에게 나누고 앉아서 밥을 먹는다. 


이들에게 함께 이 치킨 수프를 나눠 먹는 행위는 남다른 의미를 띈다. 이들의 세계는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커다란 이데올로기 속에 단절되어 왔다. 그러나 그 지점 속에서도 그들은 음식을 나눈다. 


강정희 씨와 일본인 사위 카오루는 같이 마늘을 까고 닭 안에 재료들을 넣고 닭을 삶는다. 탄생의 순간에서 어머니-음식-사랑으로 이어지는 이 표상들은, 일본인 사위가 직접 강정희 씨를 위해 백숙을 준비하며 요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쌍방으로 향하는 사랑을 확인하게끔 하는 매개가 된다. 


"같이 밥 먹자 그리고 함께 살아가자"라는 포스터 속의 문구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여러 이유들은 재쳐두고 함께 수저를 든다. 음식은 이렇게 발화 없이 서로의 입을 열게끔 한다.  





Ⅲ. 통제와 충동으로서의 입, <두 사람을 위한 식탁>


<피의 연대기>로 우리에게 알려진 김보람 감독의 다큐멘터리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은 거식증을 앓는 딸과 엄마,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장편 다큐멘터리이다. 박채영 씨는 열다섯 살이 되던 해 거식증 판정을 받고 정신 병동에 입원하고 박상옥 씨는 이러한 딸을 어떠한 방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다. 


박채영 씨는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입원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내 삶을 완벽하게 통제하며 살고 있는데, 내가 처음으로 얻은 나의 통제권을 빼앗긴 것 같아서 화가 났다고. 


그에게 입으로 음식을 씹어 삼키는 행위란 무엇이었을까.

음식이란 우리에게 생존의 수단이다. 그러나 음식은 "'음식 습관과 음식 선호'를 통해 주체성의 축을 형성하고 지탱하는 '자아의 중심적 관행'"(참1. p.111)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먹기에서 살펴야 할 테제는 먹느냐 먹지 않느냐가 아니다.  무엇을, 어떻게, 왜 먹느냐는 질문을 통해 우리는 음식을 먹는 행위를 실존 철학적 측면에서 되살필 수 있다. 


박채영 씨의 어머니인 박상옥 씨는 대학 시절 노동 운동과 학생 운동에 열을 지피던 운동권이었다. 그에게 운동권의 해체와 임신과 출산은 지금까지 삶을 영위하게 만든 원동력의 상실이었고, 그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로 딸 박채영 씨를 키우게 되었다.


어느 어버이날, 왜 전화하지 않느냐는 농담 섞인 엄마의 질문에 박채영 씨는 박상옥 씨에게 젊은 시절 당신이 아무리 학생운동을 하던 진보적인 운동권이라고 해도, 딸을 이렇게 키워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모녀 관계의 뒤틀림을 뒤따라가면 자연스레 박상옥 씨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딸 박채영 씨와 자신의 관계를 떠올리며, 자신과 엄마의 관계를 대치시키는 박상옥 씨는 언제나 자신의 어머니가 화장실에서 변기를 붙잡고 토를 하던 것을 떠올린다. 급하면 길가의 나뭇가지를 끊어서라도 목에 넣어 구역질을 하던 어머니를, 자신이 스스로 통제할 수 있었던 일이 하나도 없었기에 식도가 다 상해서 더 이상의 구토는 위험하다는 의사의 말을 듣던 어머니를 떠올린다. 


거식과 폭식을 반복하며 음식을 거부하고 욱여넣고 다시 내뱉는 입출구의 양방향성을 띠는 입은 흔히 말하는 다이어트나 외모 강박만으로 발생한다고 말하기엔 부족하다. 


무엇을 어떻게 왜 먹느냐는 통제감을 그럼으로써 우리가 그들의 삶에 던질 수 있는 실존적 주체로서의 삶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다. 


아이를 키우는 양육자는 아이에게 입으로 씹어 영양분이 될 음식만을 먹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치를 먹이고, 철학을 먹이며 규칙을 먹인다. 아이들은 그것들을 과하게 혹은 과소하게 받아먹다 어느 순간 입을 닫는다.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은 박채영 씨의 할머니의 제사상을 차리고 함께 밥을 먹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두부를 먹지 않지만, 할머니가 해주시던 기름에 지진 두부는 먹는다는 박상옥 씨의 말로 영화는 끝이 난다. 


두 명의 등장인물과 엮인 삼 대의 여성들의 서사는 긴밀히 엮여 섭식의 문제로 세상에 조금씩 드러나고, 그 서사 속 내밀함은 다큐멘터리의 형식으로 서로에게도 관객에게도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Ⅳ. 엄마와 딸 그리고 음식에 대하여


ⓒUnsplash.

다큐멘터리 <수프와 이데올로기>와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은 어쩌면 공통점이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개인에게서 사회를, 사회 속에서 개인을 조명해나가는, 정반대의 영향을 끼치는 이 두 영화의 교차지점은 '엄마와 딸' 그리고 그 사이의 '음식'이다. 


평화롭고 행복한 가정이라는 이미지에는 꼭 따뜻한 한 끼의 밥상이 보인다. 창밖에서 행복한 가정을 훔쳐보는 장면은 꼭 식탁에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을 가져오는 장면을 흘기는 것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가정 내의 여성과 음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지독한 관계를 맺게 된다. 그들이 맺는 관계는 스스로 만들어 나갔다기 보다 사회에 의하여 강제적으로 다가오는 역할이며, 그것은 아이의 돌봄, 용서, 사랑으로 대변되기도 한다. 그것은 억지로 맺어진 양육자의 역할이기도, 얽매여 벗어날 수 없는 모녀간의 위계 관계이기도 하다. 


 "음식은 인간과 가족을 규정하는 핵심 약호로 규정되어"(참2. p.146) 있다. 이 기호는 만드는 자와 받는 자, 먹이는 자와 먹는 자의 층위로 인물을 구분시키지만, 두 영화 안의 인물들은 각자 이 층위를 넘나들며 '음식'이라는 하나의 기호체계의 속에서 상호작용하며 다면적인 의미를 부여받는다. 이 시점에서 음식은 층위 관계를 넘어선 화합과 배려의 계기로서 작동한다. 


알츠하이머 증세가 시작된 강정희 씨는 집 안에서도 이따금 먼저 떠난 남편과 자식을 찾을 때가 있다. 일본인 사위는 그런 그를 위하여 그가 해주던 백숙을 요리하기 위해 시장에 간다. 끔찍하게 군인들에 의해 살해당한 가족들에 대한 기억도, 북송당한 후 죽은 큰아들에 대한 기억도, 그로 인하여 일본인과 절대 결혼하지 말라던 말도 모두 사라지고 그들 가족에게 남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덜어주고 나눠주는 한 그릇의 수프가 된다. 


기억 속에 언제나 구토를 하던 할머니와 그런 엄마와의 관계가 너무 싫었던 박상옥 씨와, 또 새로이 어려운 관계를 맺고 끊기를 반복하는 박채영 씨도 할머니의 제사상을 함께 먹는다. 시골을 떠나고 싶다고 말하고, 할머니가 해주는 반찬에 대해 말하며 상에 올린 술을 한 잔씩 나눠마시면서 누군가가 눈을 흘기는 가족의 한 상을 나눠 먹는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가족 내의 엄마와 딸로서, 가부장제의 사회의 여성으로서 모녀는 한없이 가까운 사이 일 듯하지만 그 누구보다 서로를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애증의 관계이다. 그러나 그 사이 한 끼의 식사와 나누는 음식이, 그들이 출구 아닌 입구로서 음식과 함께 서로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일이 되지 않을까. 


커다란 신념의 대립에서부터 개인 간 신뢰와 애정의 대립까지 한 숟갈에 한 마디를 삼킨 채, 그럼에도 다음 숟갈을 위해 입을 벌릴 수 있게. 


"인간의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일종의 통로"(참1. p.132)가 되어 먹기 위한 입이 열릴 때, 서로 나눌 수 있는 마음도 함께 열릴 수 있기를 그로 인하여 이들이 모두 마음의 짐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기를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간절히 바란다. 










- 참고문헌

1. 이신조(2020), <한국 소설에 나타난 음식 모티브와 가족 관계의 의미 양상 - 권여선, 은희경, 그효서의 단편 소설을 중심으로>, 《한국문예비평연구》 67, 한국현대문예비평학회, p.109-138.

2. 이경(2004), <근대 소설과 음식의 기호학>, 《현상과 인식》 92, 한국인문사회과학회, p.144-173.

3. 손시내(2022), <한 사람의 삶이라는 거대한 바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월간 한국노총》 586, 한국노동조합총연맹, p.42-43

4. 민용준(2022,10.24), "‘수프와 이데올로기’ 역사가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보그코리아

5. 서울독립영화제 <두 사람을 위한 식탁> 소개 페이지 (https://whal.eu/l/opqbAQN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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