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몬순>
전쟁은 사회와 사회가 맞부딪치는 일이다. 이때 개인은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만 전면에 나설 수 있다. 개인의 특수성은 인정되지 않고, 사회 보편적인 특성은 강조된다. 그러므로 개인은 곧 사회의 일부에 불과하다. 한 가지로 단순화된 목표는 그 목표를 수행하는 데에 불필요한 모든 일들을 제거한다. 사람들은 단순한 목표를 믿고 전진하지만, 구성원 간 공유되지 않은 채 설정된 추상적인 목표는 평생 쟁취해 낼 수 없기 마련이다.
단절된 시대의 사회와 사회의 맞불, 우리는 그 거대한 스파크를 전쟁이라고 칭하기로 했다. 그러나 내 방의 침대에 누워 지구 반대편의 전쟁을 실시간으로 목도할 수 있는 초연결시대의 전쟁은 조금 다르다. 그 거대한 스파크는 실제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 지리적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거대한 스파크는 마치 커다란 캠프파이어 주변에 타오르다 날아가는 작은 불씨처럼, 바람과 같은 네트워크 연결망을 탄 채 널리 퍼진다. 그렇게 전 세계에 새끼손톱보다 작은 불씨들이 널리 퍼졌을 때, 우리는 그것을 전쟁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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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몬순>은 총 세 갈래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서로 만나는가 싶다가도 어긋나고, 교차하나 싶다가도 평행을 이룬다. 총 6개의 스크린과 두 단으로 나뉜 무대에 그들은 바로 옆을 지나가면서도 보지 못하고, 대사를 주고받으면서도 서로를 인식하지 못한다. 전쟁이 벌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라 타트에서 온 ‘네이지, 몬, 코우쉬코지’가 각각 한 갈래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데, 이들은 현재 타트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긴밀하거나,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극이 진행되는 현대의 한국과 유사한 가상의 국가 A, B, C국에서 ‘네이지, 코우쉬코지, 몬’이 만나고 관계 맺고 사랑하는 이들은 타트의 전쟁과 더 느슨하게, 그리고 더 세밀히 연결된다.
A국의 네이지에게 전쟁은 가족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생존에 직결된 문제이고, C국의 몬에게 전쟁이란 스스로의 소수자성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어 C국의 사회에서 자신을 배제시키는 특성이고, B국의 코우쉬코지에게 전쟁이란 개인으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타트인’으로서만 대학교 안에서 존재하게 하는 소수자성임과 동시에 B국으로 온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되짚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난민, 교환학생, 소수자 등으로 가상의 국가 타트의 전쟁은 우리 사회 속의 실재 난민, 소수자성으로만 정의 되는 소수자,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자 등 여러 방식으로 드러나고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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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몬순〉의 네이지는 현재 교환학생으로 A국의 ‘차미’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고 있다. 가족들은 타트에서 식당을 운영하는데, 네이지는 몇 시간마다 한 번씩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가족들에게 영상통화를 건다.
어느 날, 네이지에게 전화가 온다. 네이지의 남동생이 크게 다쳐 병원에 갔다는 소식이다. 엄마는 ‘적국의 군인이 우산으로 남동생의 머리를 내려쳤어. 우산이었다고. 몬순이라고 적힌 장우산. 아들을 죽인 군인에게 복수할 거야. 누구인지 잊지 않겠지. 잊지 않을 거야.’라는 내용의 대사를 반복한다. 이 말을 건너 듣는 네이지에게 미안하지만 지금 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못 참겠다고.
엄마는 마치 단편소설의 대사를 읊는 듯이 문학적인 표현으로 남동생이 쓰러질 당시를 자세히 설명한다. 뜨거운 피가 느껴졌고, 우산에는 살점이 붙어 있었고, 자신은 아들을 때린 적국 군인을 죽이려고 했는데 남동생이 자신의 손을 잡아 말렸다고.
이런 극한 감정과 부모 앞에서 자식을 죽이는 잔인함, 머리를 내리치는 폭력성이 우리가 ‘전쟁’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으면 떠오르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네이지는 A국에 있다. 차미와 굴과 함께 피크닉을 나온 순간이다. 무대 한 편에서 전화를 받던 네이지의 시선은 무기회사 몬순의 팀장인 차미가 아들인 굴에게 선물로 주는 드론이 포장된 상자에 가닿는다.
네이지는 엄마의 입에서 동생을 죽인 [몬순]을 들으며 ‘몬순’이라고 아주 크게 회사 이름이 쓰인 그 포장 상자를 본다. 차미와 아들 굴이 바라보는 포장 상자의 몬순과 네이지가 바라보는 남동생의 살점과 피가 묻은 우산에 적힌 몬순은 같지만 다를 수밖에 없다.
네이지에게 전쟁이라는 경험이 덧씌워지면 세상은 전과 같지 않다. 코우쉬코지가 지내는 B국의 대학원생 ‘새벽’이 하는 FPS(일인칭 슈팅 게임)의 총소리와 네이지가 전화로 듣는 총소리는 더 이상 같은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두 단의 무대는 두 인물의 대사를 교차시키며 관객들에게 정말 이 두 소리가 같은 것으로 들리느냐고 묻는다.
C국의 몬은 안무가이고 타트인이며 게이다. 몬은 남과 다른 자신을 설명하기 위한 여러 소수자 정체성 가지고 있지만, 극 초반에서 그는 자신의 애인이 리오, 그리고 레즈비언 홀키와 함께 성소수자라는 특성으로 묶인다. 홀키는 전쟁이 일어난 지 30년이 넘은 D국에서 왔다. 홀키는 태어난 순간부터 전쟁과 함께 자랐다. 홀키에게 전쟁이란 일상이다.
몬은 슈퍼에 담배를 사러 갔다가 청소년 ‘조’에게 이유 없이 심하게 폭행당한다. 몬은 폭행의 이유를 자기 자신에게서 찾고자 한다. ‘내가 꺼내기 힘든 곳에 있는 담배를 달라고 해서? 내 헤드셋에 소리가 너무 커서? 내 몸짓이 마음에 안 들어서? 내 말투가 듣기 싫어서?’ 몬이 이러한 이유를 찾는 이유는 하나다. ‘나라서, 내가 게이라서, 타트인이라서’가 아니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 몸집에 C국 사람인 애인 리오는 이 지점에서 몬을 이해할 수 없다. 계속해서 폭행당한 시점을 재현하는 무대를 만드려는 몬에게 리오는 ‘사람들은 이런 걸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행복한 이야기를 보고 싶어 한다고, 이런 재현은 의미가 없다고, 되풀이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사건의 반복은 몬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다. 리오처럼 보고 싶지 않다고 보지 않을 수 있는 ‘가상의 이야기’가 아니다. 같은 소수자성을 가지고 있지만, 몬의 경험은 망명한 타트인과 성소수자라는 두 가지 개념을 교차하고 나서야 얻어지는 특수한 것이다.
대학교 교환학생으로, 대학원 강의를 도강하는 B국의 코우쉬코지는 졸업 작품을 준비하는 대학원생 새벽을 만난다. 교수님은 이곳에 ‘타트인’이 있다는 점은 묻지만, 그가 도강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대학 신문도 마찬가지이다. 전쟁 소식을 듣자 타트인의 생각을 묻고자 찾아오지만, 사실 코우쉬코지가 타트에서 큰 지진이 났을 때 타트를 위한 모금 기사를 실어달라는 부탁을 지면 부족으로 무성의하게 거절한 같은 인물일 뿐이다. 이 작은 사회 안에서 코우쉬코지는 아직은 A국 말을 원어민처럼 자연스럽게 하지 못하는 외국인이자 전쟁이 벌어진 국가의 난민이다.
새벽의 졸업 작품의 주제는 전쟁이다. 낙하하는 사람들로 표현된 미사일은 전쟁의 수직적인 측면을 나타낸다. 전쟁은 위에서 아래로 향한다는 것, 그것이 새벽이 작품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그러나 그 지점에서 ‘왜’라는 의문을 품을 때, 전쟁의 의미는 다시금 사라진다. 미사일은 왜 떨어지는 걸까? 새벽은 이 문제에 답을 얻기 위해 타트인 코우쉬코지를 인터뷰한다. 그러나 코우쉬코지는 타트인으로서 전쟁에 관한 질문에 지쳤다. 그가 궁금한 것은 ‘그래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이다. 그래서 코우쉬코지는 동아리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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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를 무너트린다. 개인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거대한 사회인 나라가 나라와 벌이는 일이다. 이는 상부에서 하부구조로 내려오는 수직적인 명령체계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쟁은 ‘산책을 좋아하는 유리 괴물’이다. 유리 괴물은 산책하며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파편을 뿌리는데, 이 주변의 사람들은 살갗이 다 찢어지는 고통을 느낀다. 강한 스파크의 중심에 있는 불꽃이 아니라 새끼손톱보다도 작아서, 불을 다 끄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데 나의 살갗에 닿으면 따끔거리는 짧은 고통과 좁쌀 물집을 남기는 것처럼.
우리는 모두 전쟁에 어느 정도 반대하고 어느 정도 기여한다. 초연결시대의 전쟁 속에서 ‘전쟁’으로만 상처 입지 않는다. 네이지의 남동생처럼 적군에 의해 물리적으로만 공격받지 않는다. 우리는 몬처럼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다른 이에게 폭행당할 수도, 코우쉬코지처럼 ‘나’라는 인간은 지워지고 소수 인종으로만 대우받을 수도 있다.
전쟁은 유리 괴물처럼 차츰 자신의 범위를 넓히는 중이다. 타트의 사창가에서 태어난 사생아라는 자신의 약자성을 벗어나고자 무기 기업 몬순에 들어가 직업적으로 성공한 차미는 얻어낸 성취를 응당 그래야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과거를 고백하며 차오르는 눈물은 그 뒤의 응어리를 상상하게 한다.
“차미가 서 있는 그곳과 내가 있는 곳은 서로 멀지만, 다르진 않다는 거.”
네이지는 차미의 집을 떠나며 말한다. 차미는 타트를 공격하는 무기를 만드는 회사의 직원이고, 네이지는 타트인이다. 조는 몬을 폭행하고, 레오는 조를 폭행한다. 전쟁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자신의 꼬리를 무는 우로보로스다. 너무나도 긴밀하게 연결된 탓에, ‘너’를 향한 주먹은 ‘나’를 향해 날아온다. 우리는 그 주먹을 뻗어 ‘나’ 혹은 ‘너’를 타격하는 일에 얼마큼 기여하고 있을까.
연극 〈몬순〉은 판단하여 답을 주지 않는다. 옳고 그름, 선과 악, 피해자와 가해자, 당사자와 외부인. 이 모든 기준은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관객이 스스로 겪은 개인적인 환경에 의하여 생성된다. 관객은 자신만의 기준을 가진 채로 객석에 들어오고, 〈몬순〉은 그저 우리에게 전쟁이 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얼굴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생존, 정체성, 무력감, 죄책감, 호기심, 사회적 성공, 피사체, 동화 속 괴물. 여기서 당신이 느끼는 전쟁은 어느 곳에 가까운가? 그리고 이 극은 대학원생 새벽이 계속해서 전쟁의 의미를 탐구한 것처럼 관객에게 쉬지 않고 질문한다. ‘누가 잘못했는가?’ 대신에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커튼콜 때 보내지 못한 기립박수를 이 글을 마치며 뒤늦게나마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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