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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 Jun 15. 2023

동물의 몸과 인간의 정신으로 살아가기

- 팻 머피의 '사랑에 빠진 레이철'

최근 서구 백인 남성을 중심으로 하는 인간 정의에 대한 도전적인 시도로,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선을 설정하려는 질문들이 등장한다. 진리라고 믿었던 인간이라는 생물종의 정의가 흐려지고 있다. 흐린 경계선을 되찾기 위한, 그러니 인간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끊임없이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끌려온다. 한 생명체를 인간/비인간으로 구분하기 위해서는 비인간의 정의가 필수적이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당연한 기준일지도 모르지만, 이 흐린 경계선 위를 밟고 서 있는 한 침팬지가 있다. 1987년 미국의 과학자 겸 작가인 팻 머피Pat Murphy가 쓴 SF 단편 〈사랑에 빠진 레이철〉의 주인공이다.




동물의 신체와 인간의 자아



레이철은 에런 제이컵스 박사의 죽은 10대 딸 레이철의 기억을 이식받은 작은 갈색 침팬지이다. “외부 자기장을 이용하여 한 동물의 전기장 패턴을 다른 동물의 뇌에 덮어씌우는 실험을 진행”하던 에런은 레이철의 두뇌가 생성한 전기장 패턴을 어린 침팬지의 뇌에 결합한다. 인간의 발성기관의 생물학적 구조와 유인원의 구조는 다르기 때문에 레이철은 아버지인 에런과 수화로 대화를 나눈다. 영화 〈타잔〉을 좋아하고 페인티드 사막의 변두리의 목장에 사는 레이철은 집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지만, 에런은 아직 사회는 레이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절대 나가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금기는 단편 초반 에런의 죽음으로 사라진다. 2주 뒤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레이철은 강제로 유인원 연구 센터로 끌려간다. 유일한 인간 보호자를 잃고 인간으로서 존엄을 잃은 채 동물 우리에 갇힌 레이철에게 인간들은 ‘번식용 개체’라는 범주에 넣은 채 기생충 검사를 하고, 주사를 놓고, 약물을 분사한다. 레이철은 우리 안 화장실을 찾다 결국 구석에 가서 소변을 해결하고, 소변은 우리 안의 카펫을 적시며 냄새를 풍기고, 인간들이 넣어 준 사료 위에는 파리가 앉아 있다. 


동물을 다루는 동물원과 같은 익숙한 처리과정 속에 인간과 같은 방식의 자아가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 개입하면, 모든 과정은 도덕적이지 않고 윤리적이지 않은 방법이 된다. 우리 안에서 큰따옴표 안의 대사가 없는 침팬지들에게는 위의 상황들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다고 생각되지만 레이철에게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레이철에게는 두 가지 기억이 공존한다. “달콤한 향수 냄새를 풍기던 금발 여자”, 즉 인간으로서의 엄마를 기억하고 동시에 “검은 피부, 털복숭이고 농익어서 달짝지근한 과일냄새를 풍기”며 침팬지 우리에서 살았던 생물학적 침팬지로서의 엄마를 기억한다. 공존하는 두 기억 속에서 레이철은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10대 여자아이의 마음을 가졌으나 유리창에 비친 두꺼운 갈색 손가락은 그에게 어떤 자아 인식을 제공할 것인가? 남성 보호자가 세운 금기가 외부 요인에 의하여 사라진 세상에서, 아직 키메라를 받아들일 수 없는 세상에서, 레이철은 어떤 존재인가? 


생물종으로서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재생산을 통해 태어나고, 재생산이 가능하다. 그러나 두 종이 결합한 콜라주 같은 키메라로서 ‘레이철’의 탄생은 인간이 지적으로 설계한 결과물이다. 이는 영혼과 신체 중 무엇이 존재를 정의하느냐는 후속 질문을 끌어 낼 수 있다. 레이철의 경우 영혼이 우세하다면 입장에서는 인간이며, 신체가 우세하다는 입장에서는 침팬지이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의 박사가 만들어 낸 피조물과 괴테의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호문클루스처럼, 과학 기술의 발전을 기반으로 한 상상력은 새로운 종의 출현을 예고하거나, 포스트-휴먼의 가능성을 개진한다. 창조자로서의 인간과 창조물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묻는다. 


우리는 인간의 자아를 가진 침팬지를 인간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렇다면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은 인간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렇다면 신체는 존재하지 않고 정신만이 존재하는 인공지능이 자아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발전한다면 AI를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인간의 의식을 네트워크로 옮겼을 때, 그 데이터는 여전히 인간일 수 있는가? 뇌의 일부를 기계로 변형시킨 경우, 생물학적 뇌가 몇 퍼센트 남아있을 때 우리는 그 존재를 여전히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레이철의 존재에 의문을 가지지 않는 이는 에런이다. 에런은 혼란스러워하는 레이철을 ‘자신의 딸’, ‘진짜 소녀’라고 정의한다. 자신이 죽으면 집과 얼마 되지 않은 유산을 모두 물려줄 자기 자식이라고 확신한다. 레이철이 탈출한 유인원 연구 센터장은 레이철을 ‘단지 동물’이라고 정의한다. 센터에서 도망치는 레이철을 도운 시민은 모자를 눌러 쓰고 가방을 멘 채, 음식을 가방에 담고 나뭇가지로 흙에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남긴 레이철을 ‘똑똑한 원숭이’라고 말한다. 레이철은 침팬지 엄마가 자신을 쓰다듬던 손길에서 온기를 느끼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인간 엄마에게서도 사랑을 느낀다. 스스로 배척하지 않는 동물종으로서의 신체적 경험은 우리에게 레이철을 본 적 없는 새로운 키메라로 받아들이는 일을 가능케 한다. 


 


침팬지도 사랑에 빠질 수 있나요



키메라로서 레이철은 악몽을 꾼다. 침팬지 엄마에게 수화로 대화를 청하지만 아무도 레이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 엄마는 레이철의 수화를 보고도 ‘원숭이처럼 울부짖는 소리가 아닌 인간처럼 말하라’라고 한다. 상반되는 종에 겹친 키메라 레이철이 ‘레이철’으로 존재하게끔 하는 순간은 사랑에서 온다. 


10대 소녀의 자아가 형성된 레이철은 유인원 연구 센터의 야간 청소부 제이크를 짝사랑한다. 청각장애인인 제이크는 이따금 동물들에게 간식을 챙겨주는 업무태만 청소부이지만 레이철에게는 자신이 수화를 할 줄 아는 사실을 알려도 해를 가하지 않는 인물이다. 레이철은 제이크와 수화로 이야기하며, 그의 청소를 돕는다는 약속을 하고 짧은 시간 동안 우리에서 탈출한다. 레이철의 성적 욕망은 제이크의 성인 잡지에서 시작되어, 우리에서 첫 발정기를 맞으며 극대화된다. 레이철은 제이크를 흘끔거리며 눈에 화장품을 덧바르며 그의 관심을 끌면서도 동시에 수컷 침팬지 존슨의 손길에서 온기를 느낀다. 레이철은 낮에는 존슨에게 차근차근 간단한 수화를 알려주고, 밤에는 제이크와 함께 청소하고 위스키를 마신다. 


레이철을 제이크와 청소하는 동안 사무실의 버려진 로맨스 잡지를 읽으며 사랑에 대해 익힌다. 자신이 인간이었을 때의 남자애를 짝사랑하던 기억과 잡지에서 읽은 여러 사연과 제이크의 성인 잡지 속 여성들의 모습은 모두 레이철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세상의 교재가 된다. 레이철은 제이크와 함께라는 이유만으로 센터에서 탈출하는 일을 고민하지만, 자신의 유혹을 무시하는 제이크를 확인하자, 미련 없이 (그의 물건을 하나 훔쳐 가지만) 존슨의 손을 잡고 유인원 연구 센터를 탈출한다.


자신의 능력을 알고도 해를 가하지 않을 남성 인간 보호자 밑이 아닌, 자신이 수화를 가르쳐 주고 길을 이끌어 주어야 하는 수컷 침팬지 존슨과 함께 레이철은 아버지 에런과 살던 사막의 목장으로 향한다. 이러한 레이철의 여행은 목격자들에 의하여 세간에 크게 보도되었기 때문에, 이미 에런의 집 앞에는 낯선 이들과 방송국 차들이 즐비하다. 레이철은 언덕 위에서 고민하다가 존슨과 함께 발걸음을 옮긴다. 


레이철은 더 이상 인간 엄마에게 인간의 말소리를 내라는 악몽도, 침팬지 엄마와 소통이 되지 않는 악몽도 꾸지 않을 것이다. 끊임없이 인간과 침팬지의 경계에 희미하게 존재하던 레이철은 스스로 괴물, 즉 키메라임을 인정하며 키메라로서 새로운 삶을 위해 존슨을 이끈다. 레이철의 인정 투쟁이 우울하거나 끔찍하거나 패배주의적으로 향하지 않는 이유는 이곳에 있다. 평생은 에런의 금기 아래 살던 레이철은 스스로 ‘사랑’하는 동반자를 선택한다. ‘사랑에 빠진 10대의 레이철’이기 때문에, 이 단편 안에서 레이철은 괴물 레이철이 아닌 사랑에 빠진 레이철으로 명명된다. 이때 그가 가진 존재의 불확정성은 사라지고 인간과 같이 감정을 느끼는, 세상에 실존하는 주체로 탈바꿈된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인정 투쟁보다 한 존재의 사랑 이야기로, 주체적 삶을 끌어가는 이야기로 변모할 수 있다.


 

마치며



한국에서 작품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 팻 머피는 제임스 팁트리 상의 창설자로 더 유명하다. 여성이 썼다는 이유로 소설이 폄하 당하던 1970년대, 남성적 SF의 대명사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가 사실은 여성 작가임이 밝혀지자, SF계가 발칵 뒤집혔다. 머피는 이후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상’(현 아더 와이즈상)을 창설하여 여성과 젠더를 다루며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SF 및 판타지 작품에 이 상을 수여하였고, 어슐러 르 귄, 조애나 러스, 메리 도리아 러셀 등과 같은 유명 SF 작가들이 수상자에 이름을 올렸다. 남류 작가의 시대에 끊임없이 여성 화자로 그들의 이야기를 꺼내던 팻 머피는 아마도 자신이 이 상을 창설하지 않았다면 수상자로 이름을 올렸을 것이다. 


2023년 4월 허블에서 출간된 팻 머피의 단편집 《사랑에 빠진 레이철》에는 당시 가부장제 속에서 여러 방면으로 억압당하던 여성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분노하고, 반격하고, 사랑하고, 자유를 원하고, 스스로 길을 선택한다. 팻 머피는 “어떤 층위에서, 여전히 나는 침대 밑 마녀의 존재를, 언젠가 깨진 노면 틈에서 찾아내고픈 마술 동전의 가치를 믿는다”라고 말했다. 머피는 언제나 새로운 차원으로 향하는 비밀의 문을 찾다가 결국 나만의 문을 창조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 레이철’이 그 문으로 이 세상에 들어왔다. 그렇다면 이제는 독자가 그 문을 열고 ‘레이철’의 세상으로 걸어갈 차례가 왔다. 나의 익숙한 세상이 레이철에게는 이국적이고 낯선 세상인 것처럼, 이제 내가 SF를 통하여 익숙하지 않고 모든 것이 새로운 머피의 세상으로, 레이철의 세상으로 간다. 






[원문 링크]

아트인사이트, [Opinion] 동물의 몸과 인간의 정신으로 살아가기 - 팻 머피의 '사랑에 빠진 레이철' [도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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