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결정
오랜만에 끌림을 느꼈다. 확실히 해두고 싶은 건 인간에 대한 끌림이 아니다. 이성적인, 다시 말해 성적인 끌림이 아니다. 이건 다른 차원을 가진 지성에 대한 끌림이다. 나는 그 지성의 영역에 반하고 말았다. 이 특별한 감정을 색조로 따져보고 싶어졌다. 전자 기기의 색상 선택지로 로즈골드, 실버, 블랙, 스페이스 그레이가 주로 있다. 이중 스페이스 그레이색으로 고르면 적당할 듯하다. 그는 나와 몹시 비슷한 방식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사고하며 확장하는데, 우리의 차이점은 다른 언어를 쓴다는 점이다.
그는 말하고자 하는 바를 기계식으로 설계하는 사람이다. 조금 낯설지만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그 세계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다른 차원에 속해 있는 나를 발견한다. 처음 보는 낯선 공간이 맞는데, 동시에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익숙한 세계라 편안하기도 하다. 지금껏 추상적으로 감각하기만 할 뿐, 내가 가진 언어로는 도무지 표현할 수 없었던 모든 것들을 그는 회색 은빛의 아름다운 우주로 펼쳐 보여주었다. 나는 콩닥콩닥해지고 말았다. 그 차가운 기계의 세계가 인간의 그것보다 순수하게 투명하고 뜨겁게 아름다워서.
갈증이 났다. 나의 미시적 감각적 내향적 탐구적 본질적 시각과 대조되는 그의 거시적 기계적 설계적 우주적 시각이 탐났다. 그의 구조를 흡수하면 나는 완벽한 세계를 갖춘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의 뇌를 스테이크 칼로 잘게 잘라 포크로 콕 찍어 꼭꼭 씹어먹고 싶어졌다. 잘 삼키고 소화해서 그가 가진 모든 지식과 상상력과 관점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하기 때문에 나는 다른 방법을 궁리했다. 그의 세계관을 내 세계관과 결합시킬 방법을. 나는 이내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리고 제안했다. 그는 조금 머뭇거리는듯 하더니 결국 수락했다. 나의 작은 태양계에 당신의 은하를 끌어와보고 싶어요. 우리 함께 새로운 우주를 창조해 보기로 해요.
아무것도 결정된 건 없다.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심장이 간지러운 기분이 든다. 본질은 같지만 정 반대의 언어를 쓰는 사람. 서로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이 완벽하게 상충되는 두 세계가 만나게 된다면. 지금까지 본 적 없던 제3의 멋진 신세계가 생겨날지, 빅뱅이 일어나 아무것도 남지 않을지, 그저 별볼일 없는 충돌로 시시하게 마무리될지. 뭐든 상관없다. 그 맛있어 보이는 탐나는 뇌를 한 입이라도 맛볼 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