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제기 연장

사기죄의 성립 여부와 신념

by Ubermensch







중요경제범죄조사단에 근무한 지 4개월이 됐다. 변제기 연장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기죄 성립에 해당하는지 여부에 대해 인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평소 상세한 가이드라인을 주시며 지시를 하셨던 부장님께서, 며칠 전 사건기록에 '검토 부탁드립니다'라는 포괄 위임 문구가 적힌 포스트잇을 붙여 내게 건네주셨다. 기록을 들고 내게 찾아오신 부장님께서는 이건 좀 어려운 건데..하며 내 눈을 마주치셨고, 나는 기대감에 몸을 들썩거리며 뭔데요 뭔데요 얼른 주세요 했다. 그리고 그 문구가 적힌 포스트잇을 본 순간 희열이 넘쳤다.


얼마 전 부장님의 기소 의견의 수사결과보고서를 작성하라는 지시에 항명하고 온갖 판례를 뒤적여 혐의 없음 의견의 수사결과보고서를 가져다 드린 일로 부장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고 하셨지만 나는 부장님을 설득하는 일에 성공했다. 그 일을 계기로 부장님이 나를 대하시는 태도가 달라진 것일지도 모른다.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시키는 일만 할 수 있는 수동적인 수사관이 아닌 판단의 주체가 될 수 있겠다고 보인 것이면 좋겠다. 어쨌든 부장님께서는 내게 어려운 사건을 나름대로 검토해 보아라 하는 미션을 주신 것이다. 내 마음은 콩닥거렸다. 부장님께서는 사건에 얽힌 민형사적 개념과 주요 내용을 설명해 주셨고, 판례를 찾아보고 문어나 낙지처럼 유연한 사고로 판단해 보라고 하시곤 들어가셨다. 변제기 연장과 사기죄의 연관성에 대한 기본 개념이 없던 나는 판례를 몇 개 읽어보다가 믿을 구석 비빌언덕 검사님께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믿구비언 검사님의 정성스러운 설명을 통해 마침내 사건의 본질과 문제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주제를 벗어난 이야기지만 우리 믿구비언 검사님은 내가 마음에 안 들거나 뭔가 잘못했을 때는 개장님. 평소에는 게장님이라고 호칭하신다. 마치 육개장이나 간장게장처럼. 처음에 이의제기를 했을 당시에는 검사님 손이 크고 두꺼워서 오타가 난 것이라고 하셨고, 나는 우리가 나눈 대화 속 무수한 단어 중 굳이 제 호칭 부분에 한정해서만 유독 오타가 나는 이유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지만 검사님은 오타 주장을 굽히지 않으셨다. 우리의 대화는 주로 메신저 상으로 진행되므로 검사님의 당시 표정을 볼순 없었지만 분명 피식피식 웃고 계셨을 것으로 추측된다. 시간이 좀 더 흐르자 검사님은 내 호칭 문제를 오타로 가장하는 것을 그만두셨다. 그리고 내가 개장이나 게장이 아닌 계장님으로 불릴 수 있도록 더 노력하라고 하셨다. 나는 믿구비언 검사님을 제외한 모두에게 2년 5개월 전부터 계장님으로 불리고 있다.


변제기 연장 주제로 돌아오면 우리 믿구비언 검사님의 관점(실무, 법익)과 우리 부장님(원칙, 법감정)의 견해는 달랐다. 판례를 백 개쯤 읽어보며 나는 양쪽의 관점을 모두 납득할 수 있었다. 변제기 연장 행위 자체가 사기죄에 해당하는지 여부에 대한 판례는 제각각이었다. 사기꾼이 변제기를 연장하는 행위를 불가벌적 사후행위로 보아 무죄로 보는 경우도 있었고, 변제기를 연장하는 행위만을 별도로 새로운 기망행위이자 재산상 이익 편취로 보아 그 자체를 사기죄의 성립으로 보는 경우도 있었다. 원심에서 무죄였다가 항소심에서 유죄로 뒤바뀐 경우도 있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나에게 유연한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강조하시고 본인 역시 문어나 낙지 같은 입장이라고 말씀하신 부장님께 지금까지 내가 모은 판례의 태도를 말씀드렸더니, 부장님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재판에서 무죄가 났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어떤 검사는 그 사건을 재판으로 가져가서 판단을 받아볼, 그러니까 기소할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판사가 무죄로 판결을 했다는 것은 그 재판을 맡은 판사 개인의 판단일 뿐이지 누가 절대적으로 맞고 틀린 것이 아니다. 항소심에서 다른 판사들이 무죄를 유죄로 바꾼 판례도 있으므로. 무죄 가능성이 높다고 해서 선제적으로 불기소를 하는 게 과연 맞는가. 그건 개인 신념의 문제다. 내가 공무원의 복종 의무가 사라졌다며 부장님께 항명해서 반대 의견의 보고서를 작성해 간 이유도 본질적으로 같은 맥락이었다. 내 신념을 관철해보고 싶어서. 그리고 설득할 자신이 있어서.


유연성이 개입될 여지가 있는 사건에서, 양쪽의 관점이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가질 때, 결정을 앞두고 개인의 신념을 유지하는 쪽이 있고 사회보편의 정합성에 맞추는 쪽이 있다. 판례를 뒤지던 도중 8년 전 우리 부장님이 동일한 사안의 변제기 연장 사건을 기소해서 유죄가 나온 판결문을 발견했다. 부장님은 평검사 시절인 8년 전에도 지금도 동일한 신념을 유지하고 계셨던 것이다. 부장님은 기억도 못하시는 그 사건의 판결문에 나는 커다란 빨간색 하트 포스트잇을 붙여두었고, 우리 부장님을 조금 더 존경하게 되었다. 믿구비언 검사님도 관점이 다를 뿐 신념을 지키는 분이기 때문에 그쪽에 대한 존경도 여전하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