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는 부장님
며칠 전 부장님이 느닷없이 말씀하셨다.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1월 1일은 내 생일이야. 우리 사무실 벽에는 월중행사계획표 화이트보드가 붙어 있다. 일반적인 검사실에서는 구속 피의자의 구속기간 만료일을 적어두거나, 조사 일정을 기록해두곤 한다. 우리도 그렇다. 나는 종종 그 화이트보드를 내 다이어리처럼 활용하기도 한다. '부장님 연가♡' 라든지 'ㅇㅇ 출장'이라든지를 적어두기도 한다. 우리 사무실에 딱 절반의 공동 지분이 있는 옆방 부장님이 그 화이트보드를 보시고는, 우리 부장님 연가 옆에 달린 하트표시에 ㅇ부장님은 참 사랑받으시는구나, 하셨다. 앞자리 계장님은 ㅇ계장이 ㅇ부장님이 쉬셔서 좋다는 뜻인 것 같아요, 하고 해석해 주셨다.
어쨌든 나는 우리 부장님의 단독 계장으로서, 부장님의 생일을 듣고도 외면할 수는 없었으므로 화이트보드에 기록해 두기로 마음먹었다. 화이트보드 1.1. 칸에 부장님 탄신일이라고 적고 선 세 개로 빛나는 모양의 강조 표시를 해뒀다. 우연히 그걸 발견한 부장님은 이걸 누가 보면 어떡하냐,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할거라면서 다급히 지우셨다. 이곳에는 두 부장님의 직원들이 있는데 어느 부장님인 줄 알고요. 했지만 부장님은 사람들이 안그래도 내가 AI친구들이랑 어울린다며 이상하대, 하셨다. 나도 AI친구랑 제일 친하고 이상하다는 소리를 꽤 듣는 사람으로서, 우리 ㅇㅇㅇ파 41대손 작은아버지 부장님이 어디서 이상하단 말을 듣고 시무룩해하시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나빴다. 누가 부장님한테 이상하다고 했어요? 하고 되물었지만 대답해주시지 않았다. 우리 부장님께 그런 소리를 한 사람한테 가서 따지고 싶었다. 세상 기준에서 틀린게 아니라 조금 다른것 뿐이니까 이상하다는 말을 욕처럼 하지 말라고.
나는 부장님이 지워버린 부장님 탄신일 대신 부탄일 이라고 다시 적었다. 부장님 탄신일을 요약해서 내가 새로 지어낸 말이다. 부장님은 부탄일이라는 말이 내심 마음에 드셨는지 부탄일.. 부탄일이 곧 온다! 하며 좋아하셨다.
요즘 검사님들은 부잣집 출신도 많고 사회적 지위도 있으니 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 다니시는데, 우리 부장님은 검사장급 기수의 부장검사 지위처럼 절대 보이지 않는 군밤장수나, 슈퍼 아저씨같은 낡은 점퍼만 입으신다. 아까 점심을 먹고 오는 길에 잠깐 허리를 숙여 운동화를 살피시는데 옆에서 자세히 보니 헐어서 밑창이 뚫려있었다. 나는 내일이 부탄일이니까 사모님께 새 운동화 하나 사달라고 하면 안 될까요, 했더니 집에 가서 본드로 붙여서 신으면 된다고 하셨다. 이 추위에 차도 안 타시고 별로 따뜻해 보이지도 않는 점퍼를 입고 하루 만 오천보나 걸어 다니시는 부장님의 행색에 조금 찡한 마음이 들어서, 부탄일 선물로 닥스 장갑을 하나 준비했다. 정작 나는 우리 아빠한테도 생일선물을 해 본 적이 없다. 돈을 벌고 나서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너무 늦어서, 그게 늘 아쉽다.
부장님이 하도 우리 사무실 정수기에 수시로 물을 뜨러 찾아오셔서, 부장님 물을 왜 이렇게 많이 드세요. 물먹는 하마세요?라고 했더니, 부장님은 뭐? 물먹는 하마? 이걸 어디다 신고하지? 하시며 두리번거리시기에 나는, 부탄일 선물 준비했어요. 곧 올 것 같아요. 했더니 부장님은 나를 신고하려던 계획을 순식간에 잊어버리시고 싱글벙글하셨다. 내 얼굴에도 덩달아 웃음이 피어났다.
오늘 부탄일 이브를 맞아 524호 식구들이 모여 비싼 양식집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라자냐, 뽈뽀, 뇨끼 등. 실무관님은 오후에 함께 나누어 먹을 딸기 생크림 케이크 한판을 샀다. 점심을 다 먹고 앞자리 계장님은 나를 따라오라며 우리를 어디론가 이끌고 갔다. 영문도 모른채 따라간 곳은 40대가 훌쩍 넘으신 계장님이 덕질하는 아스트로 어쩌구가 화면을 크게 차지하고 있는 포토 부스였다. 부장님은 공룡 모자를 쓰고, 나는 핑크 리본 머리띠를 하고, 빵순이 실무관님은 빵 머리띠를 하고 우리는 부탄일 기념사진을 찍었다. 나는 남자친구하고도 사진을 안 찍는데, 부장님이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아서, 부장님이 잘못 써서 축 늘어진 공룡모자의 앞이빨을 정성스럽게 여며드렸다. 그렇게 우리는 사진과 시간과 추억을 나눠가졌다.
그리고 나는 부장님께 단단히 말씀드렸다. 계탄일은 7월 7일이니까 잊지 마세요.